이순(耳順) 즈음에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삶의 무게를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공자는 이때를 가리켜 이순(耳順)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그만큼 세상의 이치에 대하여 쉬 흥분하거나 쉬 좌절하지 않는 삶의 연륜이 가장 농익을 나이라서 그렇게 정의했을 것 같다는 나름의 해석을 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분들은 참 괜찮은 삶의 족적들을 남긴 분들이야! 라고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나를 뒤돌아보게 해 준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저에게는 몇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시대의 지성으로 사시다가 2016년에 작고하신 故 신영복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들을 때마다 잊고 있었던 한국인만이 낼 수 있는 한(恨)의 소리를 되살려주는 소리꾼 장사익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애석하게도 지난 주간 같은 하늘에서의 삶을 마감하신 故 황병기 선생님입니다. 신영복 선생을 존경한 이유는 도무지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지성적 성찰을 보여주심으로 인해 틈마다 저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며 목사로 살아가는 내내 어떤 모습으로 서 가야함을 인식시켜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사익 선생은 왜 노래가 슬퍼야 하는지, 왜 노래에 인생이 담겨야 하는지, 왜 노래가 영혼이 담겨져야 하는지, 왜 노래는 피를 쏟으며 불러야 하는지, 왜 노래는 립싱크가 아닌지를 알려준 고마운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황병기 선생님은 소음 천국의 지옥 같은 오늘, 침묵으로 말하는 삶과 어떻게 해야 천박하지 않은 소리를 알려준 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신 거목이셨기 때문입니다.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그래서 황병기 선생님은 소리 없이 저의 마음 한 편에 늘 자리를 잡고 나를 움직여 주시던 큰 어른이셨습니다. 특히 그 어른을 존경하게 된 이유는 큰 장인(丈人)의 겸손함 때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인 어른은 항상 지인들과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모든 연주자는 매일 연습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연주를 한다는 것은 육체의 노동이요 배임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행위는 정직해서 속임수가 안통하지요. 정신은 교활해서 거짓말도 하고, 사람을 속이고, 핑계도 대지만 육체는 정신보다 훨씬 더 신성하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속일 수가 없게 됩니다. 연습이야 말로 이런 나의 연약한 육체를 속이지 않게 해주는 무기입니다.” 목사로 사는 저에게 있어서 육체가 정신보다 위대하다는 그 어른의 지론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이 어록이 적어도 훈련과 연습을 강조한 것임을 알기에 곱씹어야 할 가르침으로 항상 제 심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쉽고 아픈 것은 이러한 큰 가르침을 주던 선생님이 이제 같은 하늘에서의 삶을 마감하셨다는 점입니다. 언제 또 이런 큰 스승을 만나고 뵙게 될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해서 신영복 선생님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 때의 슬픔이 또 다시 몰려왔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당하는 가장 큰 비극은 야단쳐 주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새삼 큰 공명으로 다가옵니다. 때론 신영복 선생께서, 또 때론 황병기 선생께서 저게는 죽비가 되어주셨는데 한 분, 두 분이 떠나시면서 이제는 야단쳐줄 스승이 옆에 없어 못내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이제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아직도 선생님 타령을 하는 내가 참 못났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을 쓰는 오늘 오랜만에 오디오로 장사익 선생의 ‘희망가’를 듣는데 왠지 그의 ‘희망가’가 이렇게 슬프게 들리는지 더욱 애절합니다.
황병기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이 남기시고 가르치신 것을 전언하는 목사로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