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중매
한 달 전 즈음에 아들이 만날 반려자에 대한 소망에 대해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글을 세 가지로 축약해서 제 블로그와 교회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글을 올리자마자 딸을 가진 친구 목사들이 저에게 봇물처럼 성토(?)해 왔습니다. 세 번째 항목 때문이었습니다. “시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는 처자.” 내용인 즉은 왜 며느리가 너하고 대화가 가능해야 하느냐? 아들이 데리고 살 텐데 왜 시아버지까지 스트레스를 주느냐? 별 이상한 시아버지도 다 있다! 아들 장가 포기해라 등등 압박(?) 심했습니다. 실은 말은 이렇게 해도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사람은 정말로 아들 이상으로 시아버지가 아껴주고 또 귀하게 여길 텐데 조금은 억울합니다. 몇 주 전에 모교에 들렸다가 만난 동기 교수에게 같은 류(類)의 말을 들었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라고.(ㅎㅎ) 그런데 그 친구는 저의 진정성을 알기에 말끝에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제자를 선뜻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친구가 조련하고 있는 아들과 생각해 둔 자매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확신이 온 것 같았습니다. 친구의 말에 제가 더 관심을 가진 이유는 소개한 자매가 평소 참 닮고 싶은 정말로 괜찮은 동기 목사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조카면 안 보고도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아들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저와 같은 생각으로 중보하자는 의기투합도 했습니다. 이제 아들과 친구 목사의 조카 간의 인격적 만남이 순서인데 남녀문제는 하나님도 포기하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서로의 비전 공유가 같기를, 더불어서 함께 인생의 반려자로서 같은 공통분모가 있기를 중보하려고 합니다. 아들에게 이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생각보다 신중했습니다. 물론 그러려니 예상은 했지만 본인의 전 생애가 걸린 문제이니 충분히 신중할 것이라는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친구의 조카라는 사실에 더 조신한 태도를 보여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신중히 그리고 조신하게 기도부터 진행하겠다는 아들의 답변은 저에게 든든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근래에 동기회 단체 알림 SNS에 부모님의 소천 소식에 못지않게 올라오는 내용들이 자녀들의 결혼 광고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친구들의 자녀들이 거의 대부분 결혼 적령기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친구 자녀들의 결혼 소식은 저에게도 멀리 있는 일이 아니기에 꼼꼼히 살펴보는 편입니다. 2대가 믿는 가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과 함께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대화 …(ㅎㅎ) 세 번째는 그냥 희망사항으로 놓기로 했습니다. 1번과 2번 항목만 맞는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예정입니다. 딸 가진 친구 목사들의 봇물 같은 공격 말대로 시아버지가 뭐 그리 중요한 존재이겠습니까? 그러다가 아들 장가를 못 보내면 그건 정말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함께 아들과 달려갈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이가 아들에게 예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서재 창문으로 보이는 통 터 오는 가을 새벽의 일출의 여운이 장관인 토요일 아침입니다. 전무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한국교회에 충만한 주일이기를 두 손 모아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