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게 반드시 허락 받으라는 폭력에 저항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구적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극단적이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진보나 보수나 예외가 없습니다. ‘수구’라는 단어를 한자로 적으면 이렇게 적습니다. 수구(守舊) 즉 ‘지킬 수(守)’와 옛 구(舊)‘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 것을 지킨다는 참 좋은 의미의 단어인데 현실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대체적으로 수구적인 사람들의 통상적인 마인드는 대화가 안 된다는 소통 부재입니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그들을 속어로 ’골통‘이라는 단어를 항상 숙어처럼 붙이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제 하나의 단어로 ’수구골통‘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화 된 것처럼 보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수구적인 보수,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수구적인 진보는 경계의 대상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념은 항상 자아 성찰을 통하여 조금은 더 나은 형태로 변화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가져 봅니다. 이런 개인적 철학을 기초로 항상 공부하고 깨어 있는 지성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그래서 목사가 지켜야 할 상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식의 선에서 목사로서 지난 주간 참 유감스럽고. 참담한 심정을 느낀 소회가 있어 나름 몇 자 적어보기로 합니다. 문재인정부의 새로운 정부 조직인 벤처중소기업부 장관에 대한 담론입니다. 그가 창조과학을 주장하고, 그 회에 몸담은 사람이기에 벤처중소기업부 장관으로 적절하지 않음으로 사퇴하라는 압박이 거세가 일고 있는데 그 대체적인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과 사상적 인식을 같이 하는 진보적인 그룹들이라는 아이러니가 지난 주간 여론에 달아오른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벤처중소기업부 장관의 사퇴를 거듭 압박하는 것은 그의 창조과학 주장이라는 담론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정부 수립을 국가 건국의 기초로 보고 있는 뉴 라이트 계열에 있는 자이고, 보수적인 성향에 있다는 것이 실제 이유임을 모르는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목사가 정치에 대하야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또 알아도 그것을 공론화시키는 것은 아무리 정치적인 노선이 분명한 목사라도 적절한 태도가 아닌 것을 알기에 저 역시 이 담론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에 대하여는 침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직을 갖고 있는 자이기에 너무 벌쭘해서 그냥 묵과하기에는 조금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남겨보려고 합니다. 과학계에서 창조과학을 연구하고 또 그 안에 있는 학자들을 맹공(猛攻)합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그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그냥 바보라고 공격합니다.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지성적 우월의 도를 말하는 저들의 태도입니다. 백 번을 양보하여 일반 주류 과학이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비평이 학문적인 근거를 적시했다면 저는 수용합니다. 학문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직 목사로 사는 저이지만 이런 주류과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수긍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부에서 새롭게 만든 모 부처 장관에 대한 공격에 대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한 가지의 팩트가 있어 공론화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창조과학에 연관하여 자신의 학문적인 소신을 이끌어 온 자에 대한 범죄자몰이입니다. 전술했듯이 그가 과학계 주장하고 있는 주류적인 소신이 아니라 비주류적인 과학적 사고라고 판단하고 있는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자이기에 벤처라는 과학적 창의를 지지해야 하는 부서장관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하여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범죄자가 지니고 있는 사상으로 매도하고 있는 세태에 대해 경악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90년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석사논문의 논지를 ‘귀신들림 현상(Demon possession)’과 ‘정신분열증’(Schizophrenia) 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하고 이 두 현상에 대한 협동치료(team ministry)의 방법은 없는 것일까? 를 증명하는 논문을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졸저이지만 당시 ‘카스’(전국 신학대학협의회)에서 주는 실천신학 부문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당시 연세대학교 의학대학 정신과를 내 방처럼 들락날락하는 발품을 하고, 의과대학 교수들의 여러 가지의 자문을 얻기 위해 인터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과에서 발간하는 최 근래의 학술적인 자료, 저널 등을 확보하여 논문을 작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기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쓰라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의학대학교에 소속되어 있었던 몇 몇 교수들의 교만함이 그 쓰라림의 핵심이었습니다. ‘귀신들림 현상’에 대해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자들로 인한 어려움이었습니다. ‘귀신들림’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현상을 비과학적인 사고구조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고집하는 저들만의 아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DSM-Ⅵ(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 4판)에 발표된 영적 영역에 대한 항목인 Z-CODE에 대한 유효함을 전 세계의 정신의학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 위해서인지 교회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귀신들림 현상’을 비과학적인 발상과 사고라는 이유로 리젝(reject)하는 담벼락 때문에 자존심을 상했던 쓰라린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조직신학자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개념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오토는 이 ‘누미노제’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전제했는데, 그 이유는 ‘누미노제’가 ‘보이는 세계 너머의 어떤 성스러운 실제에 대한 감각’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토의 고민은 이 개념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종교전쟁’(사이언스북, 2014년)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과학자 장대식은 기도에 대하여 아주 철저한 과학적 데이터를 기초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기도의 무용론에 대해 자신감 있게 역설했습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기도는 인간 마음의 적용이라는 산물이지 신이 들어주시는 내용물이 아니라는 전개를 해나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학자인 김윤성이 이렇게 반박했던 것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기도는 효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우리 인간 삶의 의미이다.”(p,207) 과학이 담지 못할 신앙에 내용들을 과학적인 개념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지 말라는 그의 점잖은 에두름의 비판이 오늘 저의 신학적 정체성이기도 하기에 그의 말을 동의하며 담은 것입니다. 모 부처 지명 장관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목사로서 갖는 소회를 전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부연설명이 길어졌습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색깔이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곧 죄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렇게 판단하는 자가 얼마나 편협한 지식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증이며, 주류적 지식의 힘을 통한 비주류적인 힘없는 자들에게 휘두르는 질 나쁜 폭력입니다. 또한 마녀사냥 몰이입니다.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모 부처 지명 장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내면의 의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크게 작용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독교 신앙입니다.” 존중받아야 할 그의 신앙 고백입니다. 공격받을 명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그의 역사관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의 보수 성향도 별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창조과학이 일반적 주류의 과학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자기를 다스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만이 느낀 누미노제식의 기독교 신앙고백에 대하여 또 구축된 정치적인 헤게모니로, 힘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참 아프지만 기독교 신앙이 세상 사람들에게 동의 받아야 괴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된 참담함은 작금의 교계를 돌아보면 자업자득이라는 성찰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결국은 이 지경까지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우리 기독교 내부의 일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게 허락받아야 한다. 그래야 허락한다.” 웃픈 현실이지만 동의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지 세상의 식일 수는 없습니다. 재론하지만 나는 저는 지명된 장관의 앞으로의 행보에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차후 그의 입각 성공, 실패에도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백한 한 가지 “저의 내면의 의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크게 작용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독교 신앙입니다.”의 고백은 저의 고백이기도 하기에 그의 이 발언을 존중하며 그가 세상의 식 앞에서 그렇게 말한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김기석 목사의 ‘끙끙 앓는 하나님’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사람다워집니다.”(p,343) 사람이 주장하고 올곧게 서야 할 자리는 과학도, 정치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