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p,309)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 교수인 사사키 아타루가 남긴 말입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곧 혁명으로 가는 엄청난 능력이라는 메타포를 암시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타루 교수의 이 표현은 반대급부의 의미가 더 두렵게 다가옵니다. 글은 아무나 쓰지 못하는 것이라는 단호함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글을 써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설교를 작성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섬기는 교회에서 행하는 일체의 모든 설교를 원고 설교로 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글 쓰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로 공 예배(주일 낮, 저녁, 수요예배) 설교를 감당하는 주간에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글의 분량이 A₄ 용지로 약 20매 정도가 됩니다. 이 20매를 작성하는 데에만 소요되는 시간은 약 이틀 정도가 걸립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아둔하여 이 정도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설교를 위해 글을 쓰는 경우를 전제할 때입니다. 이외에도 저는 개인적으로 모 신문사에 기고문을 송고하기에 또 다른 글을 써야 합니다. 동시에 개인적으로 저의 취미 중에 하나인 독서 후에 기록하는 서평 쓰기가 있습니다. 서평쓰기는 설교 준비를 하는 전력투구와 별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서평 남기기는 제 최근 지식의 총아라고 할 수 있기에 전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 수고는 적어도 목사로 살아가는 자로서 사유와 성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대단히 중요한 공부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편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또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독서가 지식을 공급받는 통로라고 정의한다면 글쓰기는 그 지식을 내 안에 쌓는 작업입니다. 작년에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로 유명한 소설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만났습니다. 책에서 킹이 이렇게 말한 부분을 보며 공감했습니다. “소설(전공)을 쓰는 일은 언제나 거의 즐거운 작업이지만, 비소설(비전공)은 낱말 하나하나가 일종의 고문이었다.”(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p,328.) 이미 대단한 소설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소설가의 양심고백과도 같은 이 문장을 만나면서 한 편으로는 위로를, 또 한편으로는 절망감이라는 두 복합감정이 스며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킹도 글쓰기가 고문이었으니 저 같은 사람이야 두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무모한 것 같은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무모함 말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전술하며 잠시 언급한 것처럼 그래도 어줍지 않은 글쓰기로 인해 얻어지는 시너지인 설교가 천박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그렇게 글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은 무언가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정체성의 확인을 줄 수 있는 조그마한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후후, 무식의 정체가 탄로 나지 않으려고 요즈음에는 글을 쓰면서 “우리말 절대 지식”(김승용 엮고 씀, 동아시아 간)을 열심히 펼쳐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몸부림입니다. 헌데 기실, 걱정은 딴 데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이제는 점점 눈이 침침해 지고 있음입니다. 버나드 쇼의 말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조금 더 젊었을 때 용트림을 할 걸 그랬나봅니다. 미련했지만 그래도 주님의 인자하심이 가득한 한 주간이 되기를 두 손 모아 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