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샌드백이 아닌데. 지난 주간에 지체의 가정을 심방하다가 거실에 샌드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 샌드백 남편이 운동하는 도구지요?” 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요, 목사님. 제 딸이 화가 날 때 가끔 치네요.” 이야기를 듣고 심방대원으로 함께 참여한 교우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권투 도장 말고는 보기가 쉽지 않은 선수들이 사용하는 샌드백을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래 저 샌드백이 바로 나 같다는 생각을.’ 인터넷의 바다에 들어가면 목사라는 단어는 별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신 구글 검색창에 ‘먹사’라고 치면 수십만 개의 글 창들이 열립니다. 대부분 목사로 사는 사람들의 인격을 모독하는 글들이고, 심지어는 확인 사살을 하는 소위 말하는 악플들입니다. 글들을 보다가 너무 잔인하게 목사들을 공격하는 글들을 접할 때는 가끔은 그래서 이런 자위를 합니다. “난 오래 살 거야. 욕을 많이 먹어서.” 너무 상투적인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목사가 이런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많은 부분 자업자득이라는 비아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또한 수긍하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상에서 도무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자들의 막말과 극언을 대할 때는 어떤 경우에는 ‘욱’ 하는 마음에 명예훼손으로 법적 대응이라도 할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의 억울함에 통곡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다시 한 번 곱씹고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표상의 꼭짓점에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상당수의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차례 마음으로 삭이곤 합니다. 예수께서 죄 없이 십자가라는 짐을 지셨다는 것을 빌미로 주님은 이런 일까지 당하셨는데 목사라는 자가 그 까짓 수모도 참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또 달래고 달래기는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가슴이 도리는 가슴앓이를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 역시 주님의 마음으로 버티고 또 버티면서 26년을 현장에서 살아왔는데 그 결과, 어느새 상처를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사전포석을 하고 방어막을 치면서 목회의 틀을 추구하니 어디 이게 목회라고 할 수 있나 할 정도의 자괴감이 들 때도 다분히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7-18)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기뻐하는 빌립보 교회의 제자들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구금으로 인해 제 2선에 있던 자들이 1선으로 나와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기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서 바울의 위대함을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투옥된 곳에서 죽고 싶을 만큼 외로워했을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고 있는 또 다른 서신서를 만나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성을 지닌 바울의 고독함은 죽음보다 더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먹사로 내둘림을 당하는 현대의 목회자는 결국 바울처럼 그렇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기실, 다윗이 골리앗이 아닌 엘리압에게 공격을 당할 때(삼상 17:28) 더 큰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상처를 받았지만 형 엘리압과 맞서 싸우지 않고 형에게 ‘싸바브’ (등을 돌려) 골리앗에게 집중하는 다윗의 외로운 행보를 신명기 역사서를 통해 만날 때마다 가끔은 유감스럽게도 이런 생각을 하며 자위를 해 봅니다. “목사는 샌드백이 아닌데. 목사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위로가 필요한데.” 교사주일이면 항상 떠올리는 바울의 권면이 한국교회에서 반타작만이라도 목사에게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꿈 깨야 할 망상일까 하는 자괴감이 엄습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 박물관에 표기되어 있을 법한 이 말씀이 오늘은 참 그리워지는 주일입니다. 꽃으로라도 목사를 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버틸 힘이 별로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