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이라도 되십시다. 담임목사의 블로그 이름은 ‘주님의 노예’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노예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노예의 운명입니다. 찰톤 헤스톤이 열연한 영화 ‘벤허’를 기억하실 겁니다. 노예선에 묶여 있었던 유다 벤허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배 지하에서 쇠사슬로 묶인 채로 노를 젓는 것이 노예들의 운명이었기에 혹시나 배가 파선하면 그 배와 함께 수장되는 것이 노예의 비극적 삶이었습니다. 노예는 자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것이 노예라는 존재의 운명입니다. 베드로가 회심한 이후,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 위에 올라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내려온 환상을 보았습니다. 큰 보자기 같은 것에 담겨 있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기를 이것들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소리를 듣고 난 뒤에 반응한 것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였습니다. 합리적인 이유는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부정한 짐승은 율법이 정한 금지 음식이었다는 점입니다. 먹어본 적이 없었던 관례가 그로 하여금 그런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에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그 소리의 당사자에게 고백한 언어였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Not so Lord!)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한 베드로가 부른 그 대상자가 ‘主(주)’(큐리오스)였다는 점입니다. 헬라어 ‘큐리오스’는 主君(주군)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큐리오스인 주군에게는 노예를 의미하는 從(종)임에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종’ 은 그럴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종입니다. 노예와 종은 그런 존재요, 그런 운명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고유 언어에 ‘머슴’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종과 노예에 비해서는 조금은 자유가 허락된 지위의 사람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머슴은 “이전에,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사내”를 뜻하는 단어임을 알려줍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에 일꾼들을 세웠습니다. 이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는 전혀 양보하지 않고 임직자들을 세우면 노예가 되라고 했습니다.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 본 적이 없었습니다. 헌데 우리 교회 정황으로는 임직자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별로 신통치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가 이제는 그렇게 타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절충안(?)을 내놓겠습니다. 노예가 안 되면 주님을 위한 머슴이라도 되십시오. 교육 전도사 시절, 섬기던 담임목사님께서 부교역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훈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기대도 안 한다. 삯 값이라도 하는 교역자들이 되라.” 오죽 부교역자들이 마음에 안 차셨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를 훗날, 담임목사가 돼서야 그 분의 말씀의 진정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11명의 신임 일꾼들에게 담임목사가 권면합니다. 머슴이라도 되십시다. 세상에서 머슴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지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머슴이 되는 것은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는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극단적인 표현으로 독려했지만 열 고을의 권세가 탐나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식이요, 하나님 나라의 생리이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섬기는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욕먹는 것을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위해 그것도 받아보기를 바라고, 무엇보다도 섬기는 자로서 무릎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식이 되는 임직자들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멜로파크 장로교회를 섬기는 존 오트버그 목사는 이렇게 예수님을 표현했는데 기막힌 통찰이었습니다. “인간 예수, 그는 누구인가? 스스로 노예의 수건을 두른 윗사람” 이 분을 따라가는 자가 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입니다. 신임 임직자들에게 이 선한 사역을 기대하며 담임목사는 중보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