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學)과 장(場) 지난 주에 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 제 20회 세미나가 있어 참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중요한 사역이기에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이 사역에 참석하여 많이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바른 교회 아카데미는 목회 현장에서 얼마든지 엇나갈 수 있는 저의 목양적 궤도 이탈을 바로 잡아주는 길라잡이였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부흥, 교회 성장 세미나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머리가 터질 정도로 몰려들지만 바른 교회 아카데미 사역은 반대로 아무리 광고를 하고 홍보를 해도 잘 모이지를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른’이라는 단어가 부담되기 때문입니다. “바른 목회를 하고 싶지 않은 목사가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바른 목회를 하고 싶지만 지금은 생존이 더 급하다. 교회가 부흥되어야 그 다음 바른 목회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항변을 들어보면 이해가 갑니다. 오죽하면 이런 넋두리를 하겠는가? 싶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분명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본질이 우선인데! 라는 개인적인 소회에서는 저들의 항변은 이해는 되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고집이기도 합니다. 지난 20회 사역은 개인적으로 또 다른 임무가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창립 10주년 기념 대담회에서 목회자가 본 지난 10년의 바른 교회 아카데미를 회상하는 패널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지난 10년 동안, 제가 섬기고 동역했던 바른 교회 아카데미의 회한을 숨김없이 토로했습니다. 그 토로함 중에 핵심은 아카데미 연구위원 세미나가 ‘그들만의 리그’에 머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는 신학자들에게 아카데미 측에서 부과한 테제들을 신학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여 발표하고 논찬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들을 발표하여 적어도 건강한 한국교회를 위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해가 갈수록 이런 연구들은 사변적이고 극히 신학적인 테두리에 함몰되어 교회 현장과는 너무 많이 유리(流離)된 이론신학의 경연장이 되고 있는 안타까움을 종이 피력했습니다. 이것이 신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나 봅니다. 제 발언에 대하여 돌아온 공격은 이 장소는 바른 교회 아카데미이기에 철저히 아카데믹한 신학적 학문토론의 장이어야 하지 실천신학의 내용들로 질적인 수준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극단적 발언까지 쏟아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신학자의 토론의 장과 일반 목사들의 장은 분리시켜야 한다는 감정적인 발언도 에두르기는 했지만 토해냈습니다. 저는 바른 교회 아카데미의 태동 멤버입니다. 이 조직이 만들어질 때 두 트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자들을 위한 연구위원 세미나가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필드는 목회자 세미나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해서 신학자들이 발표한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위한 이론들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목적이자 태동의 이유였는데 이제 신학자들의 영역에 목회자가 도전하지 말라는 선전포고를 받은 셈이 된 것입니다. 진도가 조금 더 나가면 큰 싸움이 될 것 같아 제가 발언을 자제하여 일단락되었지만 씁쓸한 잔상을 남긴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장(場)이 없는 학(學)이 그 무슨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을까? 몇 번을 곱씹어도 유감천만입니다. 도대체 신학자들의 존재 이유는 신학인가? 교회인가? 백번을 양보해도 제 대답은 신학자들에게는 곱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학자들이 원하는 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삶의 정황은 신학생이라는 준비된 자들과의 안락함인데 비해 목회자들의 삶의 정황은 치열한 전쟁터라는 차이가 이런 갭을 형성했나 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다보니 교계가 왜 이합집산이 되었는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민주주의는 생각의 다름 속에서 발전되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에 위로를 받아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