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처에서 아들이 저를 보더니 뜬금없이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염색하셔야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근래 거울을 보면 흰 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훨씬 더 많아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마음으로는 그냥 그렇게 살지 뭐 염색까지 하겠는가 싶은 마음입니다. 그게 삶이고 인생의 수순이라면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 아들이 28년 전 제가 졸업한 서울신학대학을 후기로 졸업했습니다. 휴기 기간과 맞물리기도 했기에 아들 졸업식에 참석해서 앞으로 사역할 목양의 앞길을 위해 화살기도를 드리며 중보 해 주었습니다. 졸업식 막바지 순서에 교가 제창이 있어 기억이 날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멜로디, 가사까지 분명한 되새김이 가능해서 따라 불렀습니다. 식을 마치고 공룡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성결인의 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아들과 함께 찍은 뒤, 동기들과 함께 아들이 분주히 사진을 찍는 동안 교정 전체를 휘둘러보자 금방 28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28년 전, 나는 이 교정에서 아들이 오늘 하는 것처럼 졸업식에 참석하는 졸업대상자의 신분이었습니다. 허나 오늘 나는 아들의 졸업식에 참여한 흰머리가 더 무성한 중년의 한 복판에 있는 또 다른 나였습니다. 분명 28년 전, 나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맡겨주시는 양들을 위하여 선한 목자로서의 사역을 귀하게 감당하리라고 결심하며 목양의 사역지를 향하여 나아가려던 20대 후반의 피 끓던 젊은 종이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그 때 그 사람이 서울신학대학교라는 선지동산에 28년 만에 오늘 다시 서 있는데 그 젊은 종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늘 보이는 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발로 막 들어서는 또 다른 내가 거기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의 현존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이미 들어섰고, 목양의 필드는 이제 마지막 필드인 제 3라운드에 서 있는 나는 지금 28년 전, 꿈꾸었던 목사로서의 꿈을 윤동주 시인의 고백처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는 그 민감성으로 유지하고 있는가? 를 물으며 몸서리쳤습니다. 기형도 시인이 ‘입속의 검은 잎’에서 “이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 이제 자네 소원대로 되었네.” 라고 갈파했던 그대로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과감한 사형선고’ 를 보면서도 나는 울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가? 를 순간 물으면서 가슴 졸여 보았습니다.
28년이라는 시간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것을 알지만 내심 붙잡을 수 만 있다면 그 때, 나는 이렇게 했을 텐데, 아니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이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잘 한 일이야!, 너무 아쉬웠던 일이었어! 등등의 만감이 교차하는 감흥들을 그 날, 여지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의 종으로 자라게 해 준 큰 고향인 서울신학대학교 교정에서 큰 공부를 다시 한 번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역의 순간순간, 후회하지 않는 동시에 가장 행복한 사역을 감당하였다고 술회할 수 있는 또 다른 28년의 시간표를 만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후후, 물론 하나님이 그런 시간을 종에게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지만.
아들과 아비가 동문이 된 그 날, 하나님은 또 종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