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교 재학 시절에 교육전도사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지금이야 교육전도사 사역이 파트별로 구분되어 세분화, 전문화되어 있지만 제가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시절에는 교육기관은 물론 각 기관에서 사역을 담당해야 하는 전천후였습니다.다양한 역할을 해야 하는 교육전도사 시절로 돌아가 어떤 사역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를 굳이 묻는다면 여름마다 해야 했던 여름수련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유는 평신도 시절 종이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던 최초의 사건이 수련회를 통해서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81년 출신교회의 중등부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참석했던 수련회는 종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encounter 의 시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첫날의 테마는 '자복의 날'이었습니다.
교역자의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될 때 또 상투적으로 회개를 하라고 말하는 전도사님의 설교에 당시 이성적으로 아주 민감하던 종은 선포되는 설교에 무감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매일 회개하라고 저리도 소리를 지를까? 로 도리어 설교를 재단하고 비판하던 당시의 저의 자아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됩니다.
설교의 시간이 지나고 회개하는 기도의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라는 전도사님의 멘트와 더불어 시작된 기도회는 약속된 10분 기도회를 넘어서서 1시간 이상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절규가 이어졌습니다.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
환상을 보았다는 아이도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지금이야 방어논리가 분명히 있지만 당시에는 가장 큰 은혜라고 여겨졌던 입신을 경험하는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은 결국은 절제하도록 제지하는 교역자들의 만류로 1시간이 넘게 진행된 뒤에 끝난 기도회 후 전도사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아이들이 흘린 교회 마룻바닥에 흘린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이 땀을 닦아 준 마른 수건이 흥건히 적셨진 것은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신학을 공부하며 저의 신학적인 지평이 넓혀지면서 지정의의 신앙적인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저의 목양적인 지침으로 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의 여름수련회는 이강덕목사의 인생의 방향성을 주님께로 향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세인교회는 약 보름 뒤에 개척 후 첫 번째의 전 교인 수련회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전인격적인 만남을 위하여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던 수련회,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가 되던 수련회, 하나님이 가장 보시기에 좋은 작품으로 만드신 피조의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합일로 인도하는 수련회, 무엇보다도 내가 이제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도록 인도해 주었던 수련회에 거는 담임목사의 기대감은 남달리 큽니다.
사랑하는 세인의 지체들이여!
우리들에게 넉넉한 승리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수련회를 계획하셨습니다.
몰수이 몰려드십시다. 그리고 일어나 하나가 되십시다. 종을 변화시켰던 주님은 우리 세인교회 공동체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2009년 7월 31일. 우리들의 또 다른 승리의 D-DAY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