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 기도원에 다녀왔습니다. 수요 예배를 기도원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로 드리러 갔다가 예기치 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침 담임목사님이 필리핀 단기 선교를 나가 나이가 지긋한 장로님이 몇 안 되는 신자들과 함께 수요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되었는데 예배에 참석을 했다가 뜻 밖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장로님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고, 기력도 많이 쇠한 상태이기에 소리 자체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 20 분 정도 진행된 설교 시간, 파일 철에 스크랩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6:1-4절을 중심으로 하여 ‘목회자가 스스로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제목으로 또박또박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필리핀에 계신 담임목사님이 스스로 하실 수 없는 말을 모처럼 설교 위임을 받았기에 여러 성도들에게 전하기를 바란다는 멘트로 그렇게 설교는 시작되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목양 사역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목사님에게 기도케 하는 성도가 되지 말고 마음껏 목양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신자들이 되자는 그런 많이 들어본 그리고 듣기에 따라서는 식상하다고 느낄 정도의 단순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저는 예기치 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뒤 그 중요한 서신을 전폭으로 신뢰하여 로마 교회에 보내는 전령으로 낙점했던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처럼,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을 하면서 디모데와 실라가 합세하기 전까지 정말로 외로웠던 바울을 도와주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보호자가 되어 주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한 안부를 로마교회 지체들에게 부탁하는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이런 동역자가 되자고 역설하는 노 장로님의 설교는 이론적인 설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설교가 삶으로 말하는 증언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잔잔하지만 노 장로님이 전하는 울림은 가슴을 때렸습니다. 근래에 보기 드문 현상이라는 것 때문일까요? 서로 물고 뜯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당수 많은 교회와는 달리 목사와 장로의 끈끈한 사랑을 담보하지 않으면 도무지 전할 수 없는 백발이 성성한 장로님의 설교가 이름 있고 저명한 목사들의 상업적인 설교를 뛰어 넘는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근래 우리 교회는 가장 안정적인 분위기와 하나 됨으로 나아가는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후반기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통한 건강한 세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시골 교회에서 울려 퍼진 수요 예배의 평신도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조명을 받게 되는 예기치 않은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교회, 품는 교회, 소통하는 교회, 그리고 차별이 없이 교우들을 아우르는 교회가 숫자의 증가만이 교회 성장이라고 정의되는 비극의 시대에 진정한 아름다운 교회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노 장로님의 설교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들었습니다. 이전 멘토 목사님의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네바 한인 교회는 제네바의 역사적인 교회인 오비브라는 교회를 임대하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번은 그 오비브 교회에서 월요일마다 성경공부가 있다고 해서 그 곳을 방문했다. 가보니 몇 분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 날은 마태복음 4장을 읽었는데 특히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신 장면을 읽고 있었다. 성경을 읽은 다음에 노인들이 느낌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이렇게 말씀을 나누었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을 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그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불현듯 유혹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야 합니다. 잠시 멈추어서 말씀에 서야 합니다. 말씀은 모든 것이 명료합니다. 명료하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말씀 안에 길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나는 그 날 받은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저 역시 지난 주 수요일 밤, 멘토 목사님이 스위스에서 경험했던 같은 그 비슷한 이 예기치 않은 은혜가 오래 갈 것 같다는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