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분당 차병원 심방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간 김에 서울신학대학에 들려 아들을 픽업해서 제천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부천에서 제천으로 오려면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거쳐 서해안 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연결해 주는 톨게이트를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익숙히 알고 있는 길로 들어왔는데 금요일 저녁임을 깜빡한 것입니다.
퇴근시간이자 금요일 저녁, 저는 말 그대로 필리핀 마닐라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트래픽을 경험했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분기해 주는 톨게이트 진입로에서 톨게이트까지 가는 거리는 불과 약 600-700미터인데 무려 40분 정도를 소비했는데도 100미터를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향해 가는 차들은 쌩쌩 달리는 데 영동 고속도로 진입로는 하 세월이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안달을 하던 중에 일전에 지금 부분 개통된 평택-제천 고속도로가 서해안 고속도로 연결된다는 것을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어 차량 내비와 스마트폰 내비를 동원하여 길을 확인하고 초행길이지만 모험을 하기로 결정하고 차량 내비 양의 도움을 받아 신나게 달렸습니다.
뻥 뚫린 서해안 고속도로를 보면서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의기양양해 하며 내비 양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의지하여 집을 향하여 고고했습니다.
그런데 한 참을 달렸을까 내비 양이 가르쳐 준 대로 믿음을 갖고 달렸는데 우리 차는 행담도 휴게소를 지나 당진 근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내비는 분명히 제천 평택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데 차는 당진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전라도를 향하는 것인데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당진 톨로 나와 내비를 확인했더니 내비 양은 정상적으로 제천을 향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지만 심각한 기계적 트러블을 순간적으로 일으켜 전혀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기계를 초기화시키고 다시 내비게이션을 켰더니 내비양은 그 때서야 길을 빗나간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초행길이기에 내비 양을 100% 신뢰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 맨 덕에 40 정도를 손해 보고 다시 턴해서 서 평택 IC 로 진입한 끝에야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속이 상했지만 일을 겪으면서 나름 영적인 교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한 허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첨단의 문명의 이기라고 하는 것들과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그 이기들이 편만해 있지만 그 이기들은 우리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닌데도 어느 새 우리는 너무 그것들에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덧 나도 모르게 너무나 익숙해 있는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가장 따뜻하고 소중해야 할 인간의 기억들과 추억들이 살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사랑의 메시지들이 문명의 이기인 이메일과 SNS 라는 이름의 포장된 괴물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옛날 사랑하는 이의 전화번호를 나의 마음의 저장고에 새겨 그 번호를 되 뇌일 때마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커지는 행복을 누렸는데 이제는 문명의 이기라는 저장 탱크로 인해 바로 사랑의 온기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하는 조지 오웰이 말한 싸늘한 1984년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그것은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과 비극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오늘따라 하박국의 말이 깊이 다가옵니다.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합 2:19)
내비 양, 그날은 정말로 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