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 상한 감정의 치유2024-03-25 16:09
작성자 Level 10

상한 감정의 치유

데이빗 A. 씨맨즈 지음/송헌복 옮김

두란노/1999년 4월/220쪽/5,500원

 

1. 상처 난 감정들

우리는 아픈 상처가 남아 있고 마음속에 억눌려져 있던 기억을 생각과 감정의 나이테 속에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대인 관계의 영역 속에 직접적으로 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력은 인생에 대한 것이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보는 태도에 나타난다. 설교자들이 종종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이 있다. 즉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구원이나 성결케 되는 체험으로 이러한 정서적인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경험이 아주 귀중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서적으로 입은 상처가 곧장 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격에 손상을 받은 정서적인 문제들은 빨리 낫지 않는다.

 

정서적인 상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문제들을 빨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상처들과 혼동된 상태들을 고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날카롭게 비난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오래 참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가짜 그리스도인이나 위선자가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의 행동이 지금 올바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과거에 받은 상처와 잘못 형성된 사고가 그 원인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이 우리의 정서적인 문제들을 즉시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화의 교리에 대해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든지 꿈틀거리는 것은 마귀라고 보고 쫓으려 하는 반면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끼게 함으로써 죄의식과 실망하는 마음을 더욱 가중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양극단의 견해 모두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마음에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오직 더 부담을 갖게 할 뿐이며 그 결과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의 문제를 잘못 다루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상처 입은 감정이란 무엇인가? 가장 공통된 감정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계속적인 근심을 안고 있고,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열등감을 가지고 “나는 좋지 못해”라고 자신에게 늘 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완전주의자 콤플렉스(perfectionist complex)’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항상 찾아다니고 항상 애쓰지만 항상 죄의식을 느끼며 꼭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 빠져 있게 된다. 또 여기에 지나친 ‘예민감(supersensitivity)’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손상된 감정이 있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은 항상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다. 아마 그 중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한 유명한 신학자가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하나님이요? 나에게 의미하는 하나님이란 내 속에 항상 이렇게 말하는 작은 음성이지요. ‘아직도 부족해.’” 그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손상된 인격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병들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잘못된 신학이 나오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고치시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고치신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에 관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롬 8:26). 이 말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동반자와 상담자가 되시어 우리의 연약함을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이 일에 동참하여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의 상처 난 감정들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①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②어떤 문제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③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 보라. “네가 진정 낫기를 원하느냐”.

④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⑤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⑥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성령님께 구하라.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마땅할지 모르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2. 죄책감, 은혜, 그리고 빚진 것 거두어들이기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책감, 원망하는 마음, 애쓰며 갈등하는 것, 그리고 근심하는 마음의 네 가지 어려운 문제 가운데 빠진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네 가지 요소들은 긴장감 및 갈등과 다른 모든 종류의 정서적 문제들을 낳게 한다. 데이빗 벨굼 박사는 현재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중 75%가 정서적인 문제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주장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이 경험하는 신체적 증상과 문제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긴 죄책감의 발로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에는 두 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용서해야 할 대상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가리는 세 가지 테스트를 해 보라.

①제일 먼저 원망하고 있는 대상이 있는가를 테스트한다.

②책임감 테스트는 조금 더 까다롭다.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자기 스스로가 책임감을 갖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서 이 둘은 동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③기억을 상기시키는 것과 나의 반응을 시험하는 것에는 매우 미묘한 면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 자기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자신의 감정이 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노출된다.

 

우리가 과거에 받은 모든 상처를 성서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의 방법은 내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과 원망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전에 경험했던 상처들과 죄와 허물을 담당하셔서 그것들을 싸매시고 그의 사랑으로 그것들을 변화시켜 주신다. 이 사실을 설명하는 가장 위대한 예가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서 가장 악한 불의와 가장 슬픈 비극을 당당하신 후 그것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선물로 변화시켜 놓으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며 더 나아가서 은혜와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짧게 이렇게 요약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 또한 예수님 말씀 가운데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이 있다. 

 

 

3.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는 치료자

우리에게는 죄와 유혹에 마음이 쏠리는 내적 연약함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도 유혹을 받으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한 감정을 이해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8).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 고통과 수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시고 그 감정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발견하며 긍휼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용서를 구해야 할 때도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죄 때문에 나아갈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한 감정에 의해서 시달리며 괴로워할 때도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친구에 의해서 배척당하거나, 실연당하거나, 놀림을 받고 비통해 할 때의 느낌이 어떤가를 아신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예수님은 기도조차도 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실까?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포기하시고 버렸다는 느낌이 들 때의 우리의 감정을 알고 계신가? 사도신경에서는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고뇌의 부르짖음을 외쳤으나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았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는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하나님은 절규의 부르짖음을 이해하신다.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여 모든 것을 경험하셨으며, 이제는 성령님을 통하여 그 모든 경험을 가지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이때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게 된다.

 

4. 사탄의 치명적 무기

사탄은 영의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있다. 성경은 사탄의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놀라운 교묘함과 술수, 속임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실망, 낙망, 실수, 포기를 하게끔 우리의 약점을 들추어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배회하는 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싸움이 어두움에 속한 악의 세력에 대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공격을 받고 속임을 당하는 것은 어두움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탄의 가장 무서운 심리적 무기는 죄책감, 열등감, 불만족,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위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열등감에 의해서 꽁꽁 묶여져 있고 깊은 무가치감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사탄은 다음의 네 가지 방법으로 모든 정서적, 심리적인 무기 중 가장 치명적인 무기인 ‘낮은 자존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패배와 실패로 이끌어 간다.

 

①낮은 자존감은 당신의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②낮은 자존감은 당신의 꿈(이상)들을 파괴시킨다.

③낮은 자존감은 당신의 대인 관계를 해친다.

④당신의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을 위한 당신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

 

 

5.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 (1), (2)

 

수년 전에 맥스웰 멀쯔라는 유명한 성형외과 박사가 쓴 『새로운 미래를 소유한 새 얼굴』이란 책이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누렸다. 얼굴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애의 문이 열렸다는 개개인의 경험담을 모은 것으로 한 사람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을 때 놀랍게도 성격의 변화가 동반되었다는 것이 저자가 다룬 주제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멀쯔 박사는 또 다른 사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가 경험한 성공적인 경우들이 아니라 실패한 경험들을 통해서였다. 그는 얼굴 성형수술을 받은 환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수술 후에도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보통도 아니고 실제로 매우 아름답게 된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못생긴 오리라고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변화되었지만 변화되지 않은 옛 성격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각 사람의 자화상이 그의 행동과 태도를 좌우하며 특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자화상 혹은 자아 개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자화상은 우리에 관해 우리가 수집한 우리의 모습과 감정들을 종합한 것을 의미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잠 23:7) 당신성격의 가장 밑바닥 중심에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결정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된다. 머리스 와그너 박사는 그의 훌륭한 저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된 느낌』에서 건전한 자화상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언급했는데 그 중 첫째 요소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속감이고, 두 번째 요소는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느끼는 것이며, 세 번째 요소는 자신감이라고 했다.

 

위대한 심리학자인 조지 허버트 미드는 인간이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를 흥미로운 구절로 묘사했는데 그는 그것을 ‘자아의 창문(looking-glass self)’이라고 부른다. 갓난아이는 자아에 대한 개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으나 성장해 가면서 점차로 자기의 생애 가운데 존재한 중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진 영상으로부터 자신의 자화상을 얻게 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3장 9절과 12절 사이에서 장성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같은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낮은 자존감이 그 인격 속에 형성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나 자신을 받아 주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사역을 위해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영적 갈등으로 보이는 많은 문제들이 그 원인을 살펴보았을 때 전혀 영적인 문제가 아닌 것들이 있다. 그들이 경험하는 죄의식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정죄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정죄하고 상하게 하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 개념(self-concept)이란 자신에 관해 세워 놓은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의 체계이다. 우리의 자아 개념이 형성되는 네 가지 근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 근원이 외부의 세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외부의 세계로부터 받게 되는 것들은 가족들의 거울에 반사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느낌과 영상이다. 우리는 어릴 때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대우와 사랑과 보호를 받았는가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또한 우리가 성장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운 말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것이다.

 

두 번째 근원은 우리의 내부 세계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육체적․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감각들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우리의 오관과 신경들, 그리고 배우고 기억하고 응답할 수 있는 기능들을 포함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내적 세계에 결함과 흠과 결점을 가지고 있다.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심리학과 다른 점이 바로 영적인 요소인데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선하며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심리학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근본적으로 악에 치우치며 잘못된 것을 행하고자 하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것을 원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단순히 죄의 희생물이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지만 우리가 현재 어떠한 사람이고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세 번째 근원은 사탄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낮은 자존감 형성에 사탄이 한 몫을 담당한다. 사탄은 그의 무시무시한 무기로서 세 가지 역할을 행사함으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멸시하게끔 만든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참소하는 자요, 또한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자이다. 이러한 세 가지 역할 가운데 사탄은 열등감과 자신을 부적절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패배시킨다. 또한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네 번째 우리의 자아 개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제 낮은 자화상을 소유하게 된 문제의 근원으로부터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화상을 소유하는 능력의 근원으로 옮겨 가자. 이제는 질병으로부터 돌이켜 치유의 근원으로 향하자.

 

자, 이제 당신의 낮은 자존감의 치료를 위해 당신이 적용해야 할 실제적인 단계들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 중 제일 큰 계명은 “너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두 번째 큰 계명은 첫 번째 계명의 연장으로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 계명이 나타난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영원한 삼각형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본적인 율법은 온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 가운데 기록되었다. 당신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순리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이 법칙을 어긴다는 것은 잘못된 신학을 좇는 것일 뿐 아니라 당신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당신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공급받도록 하고 당신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거짓된 영상에 의존하지 말라. 당신이 소유한 낮은 자존감의 치료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모든 거짓말과 왜곡과 좌절,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 당신을 건전치 못한 불신의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게 하는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당신의 귀중함에 대한 가치를 부여받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재조정하시며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당신은 그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처리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신앙의 체험도 우리의 자화상을 하룻밤 사이에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롬 12:2)고 할 때 이 구절의 동사는 행동이 계속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마음’이란 단어는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하는가. 또는 매일 매일 어떻게 삶의 태도를 가지는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당신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것을 아시고 채워 주시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잘못 형성된 당신의 자화상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아마 그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당신이 있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과정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친아들 딸로서 머리를 높이 쳐들 수 있어야만 한다.

 

 

7. 완전주의의 증상들

우울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정도의 차이가 큰데 여기서는 그릇된 영적 자세인 ‘완전주의’가 원인이 되고 있는 우울증에 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완전케 되는 것과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완전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적인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바리새인이나 혹은 정서적인 신경쇠약자로 만들어 버린다. 다음은 완전주의의 증상들이다.

①꼭 해야 한다는 무서운 압박감 ②자기 자신에 대한 멸시 ③불안 ④율법주의 ⑤분노 ⑥부인

 

완전주의로부터의 궁극적인 치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아주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단어인 은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가치가 있고 없는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 많고 가치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이며 그의 행하시는 행위 자체이다. 은혜는 순수한 선물로서 공짜로 받는 것이다.

 

완전주의를 위한 치료는 처음 구원 받을 때와 처음 성화의 단계에서 체험하는 은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은혜로 시작했던 삶이 후에는 완전한 행위와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완전주의를 위한 치료는 매일매일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은혜로 맺어진 관계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곤란한 사실은 때때로 그러한 깨달음은 저절로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은혜를 깨닫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은 후에야 가능해진다. 그들에게 형성된 삶의 체제는 하룻밤 사이에 바뀔 수 없으며 변화를 경험하려면 시간, 과정과 이해 및 치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생각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의 멍에가 힘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당신의 인격과 개성과 인간성에 알맞게 지워진 멍에이기 때문이다. “나의 짐은 가볍다.”란 의미는 당신에게 맞는 멍에를 지워 준 그리스도가 결코 당신을 홀로 버려두지 않고 보혜사의 형태로 당신과 멍에를 함께 지신다는 의미이다. 

 

 

8. 완전주의의 치료과정

당신이 완전주의자가 된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치유 또한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릇된 자아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생각이 고쳐져야 하며. 손상된 정서 생활이 회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의 과소 평가하는 그릇된 태도가 고쳐져야 하며, 화합하지 못하는 그릇된 태도가 변하고, 파괴된 대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깊고도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순순히 이 과정을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완전주의적인 증세를 고치는 지름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치유 과정을 통과하는 당신에 대하여 마치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와 같이 기뻐 받으신다. 어떤 부모도 자기 자녀가 걸음마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 꾸짖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신경질적인 부모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가? 치료 과정 중에 필요할 때마다 종종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 고맙습니다. 당신의 완전한 계획에 따라서 저를 치유하고 계신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손길을 항상 느낄 수 있다.

완전주의의 뿌리가 되는 원인들을 살펴볼 때 정서적인 문제들의 원인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로부터 온다. 만족시킬 수 없는 부모들이나 예측할 수 없는 가정의 분위기, 혹은 이러한 것들이 질서 없이 혼동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란 우리가 경험한 가족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가족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칭찬과 지원이 필요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필요한가! 야고보서 기자는 잘못된 것을 재조정하고, 새롭게 하며, 치유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우 우리가 서로 나누어 주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만 그것들이 가능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음속에 원통함을 품게 되는 근본 원인은 불의에 대해 참지 못하는 화(분노) 때문이다. 이렇게 손상된 사람이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곳은 바로 모든 불의의 총 집산지인 십자가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보다 더 불의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우리 주님만큼 배척을 당했던 사람은 없다. 절대로 “하나님은 내가 받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그는 그 고통을 우리와 함께 짊어지신다. 바로 여기에 ‘너무 좋기 때문에 진실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소식’이 있는 것이다.

 

 

9. 초인적 자신과 실제적 자신

초인적 자신의 모습이란 무엇이며 실제적 자신의 모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인적 자신이란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이상적으로 보이려고 만들어 낸 거짓된 당신의 이미지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도 실제적으로 나타난 당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야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왜곡된 생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연장된다. 당신의 하나님도 완전한 것을 요구하시는 절대 완전주의자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분에게 오직 당신의 좋은 점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적 자신은 보이기를 싫어한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어렸을 때에 받은 감정적인 타격으로 인하여 실제적인 자신의 모습이 쪼그라들어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격으로부터 아주 유치한 부분이 드러나는 경우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성장해야 할 부분이 과거의 어느 지점에 그대로 머물러 신체적으로는 성숙하게 변화되었지만 영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에서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서 전혀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완전주의자가 봉착하는 가장 큰 문제는 감정적인 부분에 있다. 그는 초인적 자아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이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오직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당신이 의롭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다. 감정 자체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우리의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다.

 

당신의 초인적 자아는 분(노여움)을 나쁜 감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신이 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다. 당신이 실제가 아닌 거짓된 초인적 자아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을 때 감정적 파멸과 우울증에 빠지기 매우 알맞은 상태에 놓인다. 초인적 자아의 이미지를 소유한 당신은 절대로 분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거나 경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예수님도 분을 내셨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라고 명령형을 사용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을 나타내라! 그러나 그로 인하여 어떤 형태로든지 비통과 원망 혹은 증오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다. 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감정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드시 건설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