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이천을 다녀오는 것이 이제는 삶이 되었습니다. 3년 전에 소천하신 아버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 이천 호국원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가을, 추석 당일에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길을 6시간을 소비한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아예 미리 다녀오겠다는 심상으로 토요일 일찍, 길을 아내와 함께 나섰습니다. 명절 3일 전부터 납골함을 개방하는 것 또한 미리 길을 나서게 했습니다. 눈발이 날리는 이천 호국원에 도착하자 약속이나 한 둣 모든 납골함이 개빙되어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모셔져 있는 제 3구역에 도착해서 준비해 가지고 간 국화송이를 올려드리고 아버님께 인사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내와 납골함을 살피고 아버님께 아들이 군대에 입대한 일, 어머님이 많이 안 좋으신 상태 등등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보고 드렸습니다. 왠지 막내아들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하는 그런 마음을 아버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리광을 부리는 저에게 옆에 있던 아내가 한 마디를 던지며 지청구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버님, 다 아셔요.”
그럼요, 아시고 말구요. 다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하고 계실 아버님이시기에 자녀, 손들을 위해 중보하실 터이니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지천명을 넘김 아들이지만 저는 아버님께 영원한 막내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없는 말을 하고 난 뒤에 아버님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는 납골함을 조금 자세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옆에 또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존함이 새겨져 있는 명패 하단에 역시 또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말 할 것도 없이 어머님의 자리였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시면 역시 모셔질 바로 그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아주 심각해지신 어머님을 2주 전에 뵙고 와서 그런지 아버님 옆에 비어 있는 어머님의 자리가 이번에는 아주 크게 느껴졌습니다. 3년 전, 아버님이 소천하셨을 때 어머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나 죽으면 화장해서 따로 납골함에 보관하지 말고 아버지 납골함을 열어 그 안에 넣고 섞어라”
그냥 하신 말이셨지만 얼마나 그 말을 듣고 애잔했는지 모릅니다. 칠십 평생을 함께 하시면서 고운 정, 미운 정으로 해로하신 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죽어서 뼛가루를 합치라는 어머님의 아버님을 향한 그리움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들로서 크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렇듯 서로 사랑하신 아버님과 어머님의 무지하리만큼의 일방적인 자식 사랑의 젖을 먹고 자랐기에 그 열매로 이 자식이 여기에 서 있음을 말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 컸는지 어찌 그 사랑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되새겨보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겠지요. 그래서 종은 행복합니다. 아들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머님의 상태가 이제는 안 좋으시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천을 가면 그 분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영원히 가슴에 새기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버지, 어머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명절이 바로 이 사랑을 새기는 행복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버님의 납골함에서 죽어서도 가르쳐주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