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 사도가 아덴에서 사역을 한 보고가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승리했음을 그의 서신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유독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렸던 아덴에서는 그리 강력하지 못함을 보고합니다. 아덴에서의 사역은 이전의 사역들에 비해 적지 않게 힘이 들었던 흔적들이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아덴은 헬라 철학의 최고의 거점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메시지가 아덴 사람들에게는 그리 강력하게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이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바울의 증언 중에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종교성이 많다.’는 이 선언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아덴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 학문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던 지식의 광장인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바울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임하기가 쉽지 않다고 인정한 선언이며 좋은 성경적인 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지적했던‘종교성이 많다.’는 이 관점을 도리어 역으로 해석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 종교적이거나, 범신론적이거나, 샤머니즘적인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어렵다는 일반적인 예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도리어 오히려 그들이 올바른 영적인 이해를 전제한다면 훨씬 더 강력한 신앙인으로 설 수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유는‘종교심’이라는 단어 자체의 긍정성 때문입니다. 올바른 복음의 능력이 이렇게 종교심이 전제되어 있는 자에게 적용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더욱 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바울은 그가 다메섹으로 갈 때 그릇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피해를 주던 장본인이었지만 그가 도상에서 진정한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뒤에 강력한 이방인들을 위한 주의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 지체 중에 한 교우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기 전에 이전에 섬기던 우상의 흔적들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약한지라 본인의 영적인 상태로는 직접 그 우상의 흔적을 제거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기에 세례를 받기에 앞서 그 흔적을 제거하는데 교역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흔쾌히 지체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지체의 세례를 도왔습니다. 지체가 영적으로 억눌려 있었던 우상의 쓴 뿌리를 제거하면서 그리스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새로워지며 자유해지기를 중보했습니다.
자매가 비록 자기의 손으로 직접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정도의 성숙함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단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지를 종이 보았습니다. 바라기는 지난 주일, 자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세례를 받는 감격을 경험했는데 이제부터는 성령의 능력으로 더욱 담대히 주 안에서 승리하는 지체로 서 가기를 담임목사가 응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고린도후서 10:4)
우리 세인지체들 전체가 새겨야 할 성령의 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