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목사님컬럼] 느헤미야 13장 큐티 하기2024-03-27 13:42
작성자 Level 10

느헤미야 13장 큐티 하기

 

1. 찬양하기 :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13:1-31

 

3. 큐티날짜 : 2011년 10월 17일

 

4. 말씀요약

 

성벽을 봉헌하는 날,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의 율법이 낭독되었다. 특히 책에서 강조된 부분은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 율법이 읽혀지고 나서 공동체 안에서 섞인 무리들 곧 이방의 무리와 혼합되어 있는 모든 부분을 정리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을 마치고 12년 동안의 예루살렘 총독의 역할을 성실히 마치고 바사로 귀환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 정확하게는 얼마의 시간의 흘렀는지는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와서 본 예루살렘 성의 형편은 기가 막힌 절망이었다. 제일 먼저 도비야의 상황이었다. 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를 위하여 성전 뜰에 방을 만들어 그에게 숙소로 제공하는 악한 일을 벌려 놓았다. 이 광경을 목도하게 된 느헤미야는 그가 살고 있었던 성전 뜰 안 방안에 있는 도비야의 모든 살림살이들을 밖으로 다 내어던져 버리고 방안을 정결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 성전의 기기들을 그 방에 채워놓기에 이른다.(4-9절) 이윽고 완전히 영적으로 다시 무너져 내린 유다 신앙공동체의 상태를 직시하고 느헤미야는 멈추지 않는 영적 개혁 강행군을 다시 시작한다. 13장에서 느헤미야가 다시 재개동한 영적 개혁의 프로젝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다. ① 와해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사역을 위해 그들에게 지급되는 것이 중단된 십일조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이었다.(10-13절) ② 하나님을 향한 유대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또 하나의 기초인 안식일 사수를 재천명하기에 이른다. 어느 정도로 안식일 회복에 천착을 느헤미야가 했는가 하면 물리력 동원하는 정도로 강하게 천착하였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에게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강수를 폈다. 안식일을 범하는 죄악을 근본적으로 척결하기 위해 성문을 닫아 왕래를 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식일에는 어떤 종류의 매매 행위를 금지시키기까지 하였다.(15-22절) ③ 혼합주의의 강력한 척결이다.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서원을 하면 인까지 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아스돗, 암몬, 모압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는 불신앙을 저질렀다. 이 범죄의 무리 중에는 영적 지도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신체적인 린치를 가하기까지 하며 다 내쫓아버린다. 강력하게 압박하였다. 적어도 느헤미야는 혼합주의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영적 고집을 사수한 것이다.(23-29절) 항상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영적 개혁의 물꼬는 반드시 지도층에서부터 솔선수범함으로 시작되어야 성공한다는 것을 안 느헤미야는 대제사장부터 이 일의 선두에 서게 하였고 그 결과 느헤미야의 성전 정결과 신앙 공동체의 영적 재각성 프로젝트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음을 보고하며 느헤미야의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repetition(1절)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학습의 효과는 반복이라는 명제가 생각이 난다. 잊을 만하면 잊지 않게 하는 것은 반복의 묘미일 것이다. 유다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각성 방법이 아마도 이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성벽을 재건하는 그 날, 모세의 율법책을 반복적으로 낭독하게 하였다 반복적인 율법의 앙독이라는 이 방법이 느헤미야 당시에도 나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지탱하게 한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었고 오늘도 이스라엘을 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게 하는 유대인들의 반복의 교육이 오늘 신앙인들인 우리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의 쉐마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4-9)

 

2.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8절)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도비야가 묵고 있었던 성전 뜰 안 문으로 들어가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들을 무자비하게 밖으로 던져버렸다. 도비야가 누구인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영적 걸림돌의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방해한 일등공신이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와 그가 성전 안의 기구들을 보관하는 방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거룩한 분노를 품고 그의 방안으로 들어가 모든 세간을 내동댕이친다. 하나님의 적대 세력과는 조금도 타협하거나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느헤미야가 무모해 보이는가? 아니면 피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으로 보이는가? 나는 레오나드 레이븐힐의 불의 도서들을 본 적이 있다. 우리들이 지금 읽고 있는 ‘소돔에는 말씀이 없었다.’ 이전의 그의 작품을 읽다가 그가 불을 토했던 사자후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단호한 죄의 척결을 부르짖는 한 영적 선각자의 포효를 듣는다. 그렇다. 죄에 찌든 세간을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오늘의 느헤미야가 필요하다. 내가 그 사람이 되리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리라.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죄와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우리 세인지체를.

 

3.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하라 (12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지난 주일 설교에서 간디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역설한 내용이 기억에 있다. 개신교 목사는 가정이라는 또 다른 목양의 영역을 목회하며 승리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이 있는 자임을. 그러기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목사에게 무소유를 말함은 접근의 무리함이 있음을 말이다. 나는 이것을 합리화의 차원이 아닌 긍정의 차원으로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의 천국의 모형은 교회와 더불어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목사는 산 속의 종교가 아닌 삶의 한 복판에 있는 종교의 지도자로서 적절한 물질과 소유가 필요하다. 김동호목사께서 언젠가 청부론(靑富論)과 청빈론(靑貧論)을 주창하여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반대의 부류에서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근거는 ‘깨끗한 부자’라는 말 자체의 모순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부자는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깨끗할 수 있는 사회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적 접근으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쪽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끗한 부자라는 단어는 어패가 있다. 나 역시 불가능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부자는 다 지옥에 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 우리들이 좌지우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사가 자녀들을 위해 예금통장을 갖는 것은 죄이고, 한경직 목사처럼 통장을 하나도 갖지 않는 것은 선일까? 비교자체가 무리수이다. 그것도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목사님을 안다. 은퇴 이후에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임기 중에 조그마한 은퇴적금을 불입하면서 노후를 준비하는 선배를 말이다. 지혜로운 일이다. 그가 갖고 있는 적금을 죄악시 하면서 공격하는 자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미 반대를 위한 반대자라는 질 나쁜 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제천의 모 교회에서 은퇴를 한 원로목사가 제천을 떠나지 않고 새로운 담임목사의 목회를 적지 않게 방해하여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수치스러운 일을 알고 있다. 왜 그럴까? 은퇴를 준비하지 못하여 퇴임 이후에도 가시 역할을 하고 있는 추잡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목회자가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교회가 할 수만 있다면 목회자가 임기 중에는 목회를 전념할 수 있도록 돕고 은퇴를 준비하도록 돕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대우를 잘 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늘 본문 12절의 정황처럼 제사장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유다 신앙공동체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여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결국 그 결과로 영적으로 다시 무너지는 비극을 경험하고 있는 유다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가 잃어버린 십일조를 강권적으로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던 사역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바울은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

목사를 추악하게 만들지 말라. 추악하게 되는 것은 목사의 몫도 되지만 성도의 몫도 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양보할 것이 따로 있지.(21절)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을 돌아와 보니 또 하나의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서원하고 약속했던 안식일 사수에 대한 파기였다. 그들은 파기 정도가 아니라 안식일을 장사하는 날로 변질시켰다. 이 기막힌 일을 목도한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장사하는 자들이 성안에 들어오는 일을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성문을 닫아버렸다.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질 때부터 안식일이 끝나는 시간까지 아예 성문을 폐쇄한 것이다. 이것을 안 장사치들은 자기들의 소득원이 끊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어 예루살렘 성 밑에서 노숙하며 잠복하고 있다가 문이 닫히기 전에 성으로 들어오는 편법을 구사한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이제 그들에게 물리력을 동원하여 성 밑에 자는 자들을 한 명도 빠짐이 없이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러한 단호한 느헤미야의 정치적인 리더십으로 인해 안식일의 장사치들은 사라지고 다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집중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구도가 형성되었음을 역사가는 보고한다. 영적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따뜻한 영성이다. 그러나 더불어 냉철한 단호함을 겸비해야 한다. 죄인을 용서하는 따뜻한 영성만으로는 목회는 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단호하고 냉철한 척결의지가 동시에 목회자에게는 동시에 요구된다. 사랑에 대하여는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양보할 수 없다. 나 또한 사수할 목회의 근간이다. 양보할게 따로 있지.

 

5. 때려서라도(25절)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느헤미야의 유다 공동체를 향한 영적 재갱신 프로젝트의 마지막은 이방 여인들을 용납한 영적 매춘의 단호한 척결이었다. 느헤미야의 주목할 행위 중에 눈여겨 볼 대목은 ‘몇 사람을 때리고’이다. 느헤미야가 매를 댄 것은 이방여인을 용인한 지도자들이었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때려겠는가! 나도 아들을 키운 아버지이다.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에게 매를 댄 적이 있다. 매를 댈 때에는 원칙이 있었다. 첫째 두 손으로 때리지 않는다. 둘째 거짓말을 할 때였다. 아들이 아빠의 계명(?)을 어겨 매를 댈 수밖에 없을 때 아프게 때렸다. 그러나 아들이 아파서 울 때 나는 더 울었다. 이것이 바로 아비의 심정이요 마음이다. 말로 안 되는 것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더 큰 아픔을 훗날 아들이 경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들을 용납하는 행위를 가장 질 나쁜 죄악으로 여겼다. 그래서 척결의 의지로 이방 여인을 받아들인 유다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매를 댔다. 나는 목사이다. 하나님의 방식을 사수하는 것을 지켜야 하는 목사이다. 그러기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성도들이 죄의 길로 갈 경우 나에게 혹은 성도들에게 매를 때릴 각오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때려서라도’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목사로 남고 싶다. 느헤미야처럼.

 

6. 기도

 

하나님.

느헤미야는 이 종에게 있어서 목회자의 롤모델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느헤미야는 종을 경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저를 쳐서 복종하는 교과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늘도 이강덕목사를 목사로 만들어 가는 교범이었습니다.

느헤미야를 종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까지 끝까지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