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목사님컬럼] 느헤미야 11장 큐티 하기2024-03-27 13:41
작성자 Level 10

큐티학교 : 느헤미야 11장 큐티 하기

 

1. 찬양하기 :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11:1-36

 

3. 큐티날짜 : 2011년 10월 2일

 

4. 말씀요약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결심하도록 백성들이 인을 치는 감동을 이끌어낸 느헤미야가 다시 선두에 서서 사역하는 또 다른 감동을 11장에서 만날 수 있다. 스룹바벨 제 2 성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또 다른 유다 신앙공동체의 염원이었던 성벽도 완공했다. 어느 정도 성도(聖都)의 모습을 찾은 예루살렘의 본연의 모습이 그려졌지만 완벽한 것은 없는 법, 2%의 부족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의 도시로서의 모습을 찾은 예루살렘에 살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예루살렘을 지키고 가꾸어 갈 인적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성전과 성벽이 세워졌다고는 하나 예루살렘 성 자체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는 열악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외부의 적들에 의해 항상 민감한 표적의 대상이었기에 신변의 위협도 사람들은 느껴야만 했기에 그곳에 살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소위 예루살렘 프로젝트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지켜갈 인적 인프라를 구성하는 프로젝트였다. 네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① 유다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게 강제하는 것이었다. ② 백성 중에 십분의 일을 제비뽑아 성에 거주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③ 자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④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깃(땅)이었기에 당연히 그 땅에 살아야 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과 성전이 있기에 그 성전을 마땅히 돌봐야 하는 성직자 그룹, 레위 사람들, 느디님 사람들 그리고 노래하는 백성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1-3절,22절)

이상에서 느헤미야 프로젝트는 그림이 그려졌고 이어지는 4-36절에는 성에 남게 된 사람들의 명단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계보에 따라 예루살렘 성에 남게 된 자들의 명수가 정확하게 역사기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가 928 가족이었고(8절), 유다 지파의 남은 가족은 468 가족으로 기록되어 있고(6절), 또 하나 제사장 그룹의 가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어떤 가족은 822명(12절), 또 다른 가족은 242명(13절) 그리고 128명임을 기록하고 있다.(14절) 레위 지파도 기록에 남아 있는데 248명이 거주했음을 보고하고 있고 문지기는 172명이었다.(19절) 끝으로 오늘날 성가대의 전신인 노래하는 자들의 기록도 남기고 있으며(22-24절), 25-36절까지는 마을과 들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명단을 기록함으로서 10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Que Sera, Sera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1절 전반절)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의 프로젝트에 의해 예루살렘 성에 의무적으로 거주하게 된 부류가 등장한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느헤미야에 의해 강제적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그룹이다.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치적인 구도에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녹을 먹는 지도자 그룹이었다. 이런 이유로 할 수 없이 이들은 예루살렘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남아야 했던 부류들이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명감에 불타는 예루살렘 성 사수가 아니라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부류들이었기에 영적인 차원에서 감동이 있을 리 만무이다. 아주 오래 전에 학창시절에 불렀던 팝송 중에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될 대로 되라’이다. 신앙적 삶의 여정에서 감동이 없는 케 세라 세라는 너무 비극적이지 않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류들이다.

 

2) Que Sera, Sera⁺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1절 중반절)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할 수 없이 예루살렘 성읍에 거하게 된 부류들보다 더 한심하고 보기에 불편한 자들이 있다. 제비 뽑아 걸려 든 1/10의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자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재수 없게 걸린 자들이다. 이들은 아마도 최고의 불평 불만자들일 수 있다. 정말로 살기 싫은 예루살렘 성도로 개 끌리듯 끌려와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에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말 그대로 참 비참한 인생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게 된 데에 따른 태도는 Que Sera, Sera⁺ 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신앙은 어떤가?, 나의 목양의 질은 어떤가? 나는 할 수 없이 목회를 하는 Que Sera, Sera⁺ 는 아닌가? 묵상을 통해 다시 한 번 가다듬는 시간으로 조명 받는다.

 

3) 참 똑똑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2절)

 

느헤미야는 세 번째 부류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다고 했다. 앞에 기술된 두 부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들을 강복했다는 말이다. 누구인가? 예루살렘에 살기로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강제적인 이끌림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살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자발적인 태도로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손을 든 자들이다. 예루살렘의 환경은 앞선 두 부류들이 맞닥뜨려야하는 환경과 전혀 다르지 않다. 동일하다. 그러나 이들은 부딪쳐야 하는 환경은 동일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 성을 보고 있는 눈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쏟으시는 축복을 볼 줄 아는 영의 사람들이었다. 마치 시편 기자가 시편 122:6절에서 고백한 그대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라는 고백의 참 의미를 아는 자들이 아니었겠는가? 앞에 보이는 불이익과 같은 것을 보고 계산하는 자가 아닌 유익이 되지 않아도,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대하며 순종하는 이들이 바로 참 지혜로운 자들이 아닌가 싶다. 앞 선 두 부류들이 헛 똑똑이라면 이들이야 말로 참 똑똑이가 아닐까! 오늘 나는 목사로서 이 세 번째의 부류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나를 쳐서 복종하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단해 본다.

 

 

6. 기도

 

자유의지를 주셔서 항상 우리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해타산으로 사역하는 목사가 아닌 진정으로 주님의 심장을 갖고 사역하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나약하지만 나는 헛 똑똑이가 되지 않고 참 똑똑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세인 지체들도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