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목사의 목양심서 나가는 말 “10원의 가치가 빛나는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9원을 가진 자와 11원을 가진 자가 옆에 있을 때입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실시한 구약 톺아보기 강사로 섬겨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인 이한영 교수가 강의 중에 던진 말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관계가 없는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황은 무의미함을 역설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학은 인간학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고민 없는 하나님 이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날 사역을 맡아주었던 서울신학대학교 이용호 교수가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터트린 폭탄 발언이다. 아마도 이 발언을 웬만한 교단 교회에서 했다면 발언을 한 당사자는 물론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까지 신변이 위험할 텐데 이런 혁명적인 발언을 들어준 세인교회의 교우들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인간을 이해하는 목회, 그 가운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목회와 신학이 추구하는 병렬의 가치다. 이것이 다루어지지 않는 일체의 시도는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틴 부버는 이렇게 일찍이 통찰했다.
“근원어 ‘나-너’의 ‘나’는 인격으로 나타나서(소유격이 없는) 주체성(subjektivitait)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한다. 인격들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은 ‘그것’ 즉 비인격적 존재로 나타나게 되며 결국 나의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부연한다면 부버에 이 주장은 ‘나-너’의 관계는 우리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 중에서 가장 긴밀한 인격적인 것임을 역설한 셈이다. 동시에 ‘나’와 ‘너’ 사이의 긴밀한 상호 인격관계에서 우리는 인격으로서의 자신을 깨닫게 되는 자양분을 얻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서 만나게 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나’와 ‘너’의 ‘나’와 ‘나’와 ‘그것’의 ‘나’는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나’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전자는 인격적 관계 설정의 ‘나’이지만 후자는 비인격적 관계 설정의 ‘나’이기 때문이다. 목회란 무엇일까? ‘나’와 ‘그것’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이어주는 가교가 아닐까 싶다. 신학이란 무엇일까? 그 가교를 만드는 재료들은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목회와 신학을 유리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했다. 목양의 내용을 신학적 도전의 촌철살인으로 보충하려고 했다. 결과, 이 시도는 글쓴이에게도 보람으로 자리매김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긍정의 모드지만 또 다른 우울함과의 투쟁도 있었다. 졸고의 출간을 결정하면서 많은 두려움이 필자에게 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30년 정도 밖에는 안 되는 짧은 목회 연륜으로 목회의 내용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두려움이 그 첫 번째다. 또 하나는 필자의 목회가 ‘그것’이 ‘그것’이 아닌 ‘너’가 되도록 필사의 노력했는가의 물음에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망설이고 있는 필자가 그럼에도 용기를 내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이번 졸고가 아직도 미숙하고 허점투성인 필자의 목양을 채찍질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소개한 故 서정수집사에 대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몫했다. 그를 다시 글로 살려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그는 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하나님의 사람이자 필자의 사랑앓이 대상자다. 제천세인교회는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다. 속해 있는 지체들은 세상이 인정하도록 치열하게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는 마하나임들이다. 필자는 그들에게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일체의 어휘들이 있으면 모두 동원하여 격려하고 감사하고 싶다. 제천세인지기들은 최고의 동역자이기에. 필자는 국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는 국어학에 대한 문외한이다. 해서 글을 쓰고 나면 언제나 설교체가 되어버리는 참사를 저지른다. 이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어주는 세인교회 이영미 권사는 필자의 더디오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원고 초고를 들여다보고는 쓴 소리를 해주는 그녀 덕분에 졸문과 졸저가 그래도 세상에 나오는 복덩어리로 변신된다. 언제나 따뜻한 아군의 모습으로 교정에 최선을 다해 준 이영미 권사께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시골목사의 글이 뭐 그리 상업적으로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무모함을 언제나 감수해 주는 동연 출판사의 김영호 대표는 이 시대의 선비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고개를 숙인다. 필자의 두 번째 책 출간 이후 행한 북 콘서트에 기꺼이 패널로 참여해 주고 언제나 시골 목사가 기죽지 않도록 응원해 주는 장로님께 가장 큰 절로 사의를 표한다. 북 콘서트를 하던 그 어느 날, 김 장로님과 함께 참석한 아내 되시는 권사님의 후담, “목사님, 저는 남편이 만든 책 중에서 그래도 목사님이 출판하신 책에서 은혜(?)를 받아요.”라고 립 서비스 해 준 그 따뜻함에 기죽지 않고 살고 있음을 아울러 밝히며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아름답고 예쁜 책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준 편집국 지체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춘천 하늘 평안교회 오생락 목사,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는 존경하는 신학교 동기생들이다. 그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조감도 같은 교회들이다. 필자는 그들이 섬기는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처럼 목회하지 못하는 자괴감과 열등감에 무력해 질 때가 있다. 언제나 부럽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또 다른 목양심서를 써 가고 있는 두 친구들이 써준 추천사는 가뜩이나 볼품없는 졸저를 빛나게 해준 결정적인 응원이 되었다. 두 사람이 내 친구인 게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이제 아내가 의성어나 의태어의 초성을 내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100% 안다. 아내도 그렇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내 인생의 8할은 아내의 부분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렇게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보다 절대로 먼저 죽지 마!” 필자는 끝까지 이기적이다. 아내가 있었기에 여기에 내놓는 목양심서의 줄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책의 원저자는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 심재열이다. 마지막 하나, 필자는 아들을 위해 중보 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놓은 적이 없다. “하나님, 아들이 절대로 나 같은 목회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인 내가 본받을 수 있는 성령이 기름 부은 지성적 목회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들 이요한 전도사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본대학원 TH.M 과정을 가을학기부터 시작하며 지난한 학업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힘들겠지만 기쁨으로 학위 과정을 감당할 수 있는 긍정의 동력으로 에비의 이 졸저가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아들은 필자의 그냥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여기에 내놓는 이 졸저의 공저자는 故 서정수 집사다. 그의 글은 들어가는 말에서 말했듯이 이 글의 뼈대라고 말해도 절대로 과장이 아닌 글의 정수(正秀)다. 이 글은 그의 것이다. 더불어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아픔을 믿음의 노정에서 잘 극복하며 달려주고 있는 이혜용 집사에게는 최선의 격려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의 분신들인 동혁, 동성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다시 마음에 부활하는 감동의 활력이 되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 2019년 7월 제천에서 시골 목사 이강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