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설교
제목: 블루에서 해피로
본문: 예레미야 애가 5:19-22
서론)
2021년 성탄절 아침입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성탄절을 제가 이렇게 부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블루 크리스마스
영어 단어 ‘blue’는 '푸르고 푸른'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입니다.
수년 전 호주를 방문했을 때, 호주의 유명 관광지인 'BLUE MOUNTAIN'을 다녀왔습니다.
그날 일행들과 블루 마운틴을 방문하던 날의 하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전에는 그토록 푸르다 못해 시리고 시린 하늘을 본 적이 없기에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이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는데 호주의 하늘은 우리나라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이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산의 이름이 ‘BLUE MOUNTAIN’이었는데 그 산을 배경으로 한 광경과 하늘은 말 그대로 푸른 산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산의 이름을 ‘블루 마운틴’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블루’라는 단어가 ‘푸르고 푸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에 반해 조금은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울한 날’이라고 표현할 때 ‘blue day’ 라고 쓰거나, 사람의 기분이 ‘저기압’이라고 말할 때 ‘blue mood’ 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블루의 의미는 ‘우울하다’는 의미가 짙습니다.
2021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은 2021년 크리스마스가 메리 크리스마스이거나 해피 크리스마스입니까?
정녕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느끼는 크리스마스의 느낌은 ‘블루 크리스마스’인 듯해서 아픕니다.
한 여론에서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아마도 코로나 19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2024년 즈음에 토착질병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바이러스와의 동행이라는 말에 우울해지지 않는 인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우울한 모드에 빠질 것이고, 대단히 불편하고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기에 우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크리스마스 설교를 해야 하는 목사의 마음은 정말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설교를 포기할 수 없어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생뚱맞게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 본문들을 읽으면서 김기석 목사가 쓴 예레미야 산책인 ‘끙끙 앓는 하나님’(꽃자리, 2017년 간)과 한희철 목사가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꽃자리, 2018년 간)를 옆에 끼워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내가 예레미야의 마음처럼 마음껏 울고 통곡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제게 임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부록정도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접하지 않는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에서 예기치 못한 은혜가 제게 임했습니다.
성탄절 본문으로 예레미야 애가를 택하는 목사가 또 어디에 있으랴 싶어 망설임이 조금 있었기는 했지만, 본문을 잘 이해하면 그 어떤 성탄절 본문보다 더 큰 위로와 감동이 있을 것 같아 성령께 은혜 공급을 맡기는 마음으로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본론)
본문은 예레미야 애가를 구성하고 있는 총 5가지의 슬픈 노래 중에 마지막 5번째의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슬픔을 토로한 마지막 대단원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론에 해당하는 텍스트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이 슬픈 노래를 통하여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이 당해야 했던 고통을 체휼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거침없이 토로합니다.
“우리가 애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노래가 그리고 있는 슬픔, 고통, 분노이다.” (윤성덕, “예레미야애가-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 대한기독교서회, p,24.)
이렇게 처절한 유대 백성들의 다양한 아픔들을 노래한 저자는 노래를 마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로 의미 있고 감동적인 끝맺음을 합니다.
19절을 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저자는 야훼 하나님의 전존재에 대하여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저자가 이렇게 슬픔을 노래한 뒤에 대단히 중요한 반전을 보입니다.
그 동안 유다 공동체는 본인들의 멸망이 선민 공동체를 버린 하나님 때문이라고 판단하며 남 탓을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노래를 깊이 들여다보면 변화의 모습이 보입니다.
유다 멸망의 제일 원인이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유다공동체) 탓이라고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유다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진솔한 회개이자 고백이 본문 21절에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이 구절이 왜 충격적입니까?
문자적인 해석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유다 공동체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돌이킬 자정 능력이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유다 공동체를 불쌍히 여겨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돌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 담겨 있는 유다 공동체의 소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우리들이 회복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21절을 읽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이제 후반절에 주목하십시다.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이 선언은 정말 엄청난 고백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주께서 유다 공동체를 다시 새롭게 할 때만 가능하다는 동의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식이 얼마나 감동적인 선언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유다 신앙공동체의 자화상이 어떤 상태입니까?
20절과 22절을 살피겠습니다.
먼저 20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2절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유다공동체의 상태는 참담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버리신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그것도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오래 버려진 상태라고 인정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저자는 말합니다,
더 이상은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비상한 각오를 노래합니다.
더 이상은 버려진 상태에서 고통당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과도 같은 각오를 슬프지만 노래합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다가 본문 중에 이 한 구절이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비참한 유다 공동체의 상태를 끝낼 수 있는 주체는 유다 신앙공체가 아니라고 조명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참담한 유다 공동체 상태를 종결지을 수 있는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라고 읽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3년째로 접어드는 코로나 19와의 싸움 한복판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코로나와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백신개발, 먹는 치료제 개발 등등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또 다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 19와의 투쟁을 위한 인류의 노력에 대한 과소평가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1도 없습니다.
그러나 직시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자구책이 자연적 재해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할 때 대단히 궁색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혹 사라지거나 잠잠해진다면 끝이 날 것인가?
사치스러운 환상이자, 꿈입니다.
이 땅에서의 주도권을 인간이 갖고 싶어 하는 한, 인간에게 장밋빛 미래는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적어도 유다신앙공체를 대변한 예레미야 애가 저자의 처절한 이 신앙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고백되고 행동되어지지 않는 한, 다양한 펜데믹은 앞으로도 더 치열하게 전개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5절을 읽어보십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더불어 1:9-11절을 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적어도 요한복음 저자가 말한 예수님의 초림 때에 일어났던 불신앙적인 모습이 오늘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한 펜데믹은 멈춰지지 않을 것입니다.
2021년의 성탄절 아침, 우리 모든 교우들이 깨닫고 다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내 삶의 최종적인 결재자가 내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심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21절을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내가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면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노래합니다.
주께서 나를 돌이켜 주셔야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삶의 최종적인 결재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하십시오.
내 식이 아닌, 주님의 식으로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2021년은 물론, 22,23,24년에도 펜데믹은 종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관심은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도식의 선언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에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절절한 메시지는 내가 살고 있는 환경, 가정, 처처에 주님의 식이 회복되지 않는 한, 우리들에게 임한 블루 코드는 제거되지 않는다는 권면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블루 크리스마스가 메리 크리스마스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19절에서 애가 저자는 분명히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야훼 하나님은 유다 공동체 멸망 이전이나, 멸망 이후나 변하지 않고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자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혹자들은 펜데믹 상황이 길어지는 것을 보며 이렇게 비아냥거립니다.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는가! 교회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코로나가 물러가도록 기도하는데 물러가는 것은 고사하고 날이 갈수록, 달과 해가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맞느냐고 조소합니다.
다시 재 강조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야훼 하나님은 펜데믹 이전에도 계셨고, 펜데믹 중간에도 계시며, 펜데믹 이후에도 계십니다.
그 분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뭇 백성들이 작금의 블루 코드를 빌미 삼아 하나님의 전존재를 부인하고 싶겠지만, 역발상으로 모든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재앙을 이길 수 있다는 교만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당신이 살아계시는 절대적인 권위임을 계속 보이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잘잘법’이라는 유트브 방송에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김학철 교수께서 소개한 찬송가에 관한 은혜로운 강의를 접했습니다.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FA 컵 유럽 축구대회 결승전에 모든 관중들이 부르는 노래, 힌두교의 나라이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너무 좋아한 찬양이라 인도 국경일에 부르는 찬송가를 김 교수가 소개했습니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장례식 찬송으로 잘 알려진 찬송가 481장 찬송입니다.
1절만 나누어 보십시다.
Abide with me; fast falls the even tide
The darkness deepens, Lord, with me abide
When other helpers fail, and comforts flee
Help of the helpless, O abide with me
가사의 의미를 직역해 보겠습니다.
폭포수가 빠르게 떨어집니다. 마치 밀물과 썰물의 조수처럼
어둠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다른 조력자들이 실패하고 위로가 날아가듯 달아날 때
도움이 아닌 것 같은 도움이여, 오, 나와 함께 하소서
우리나라 찬송 가사로는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주 홀로 마귀 물리치시니/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주같이 누가 보호하리까/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오늘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며 노래하며 찬양하는 성탄절입니다.
이미 나누었지만 2021년의 성탄절은 블루 크리스마스의 자국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만과 교만함으로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고집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님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저는 블루 크리스마스가 해피 크리스마스와 메리 크리스마스로 다시 돌아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러려면 찬송가 481장의 가사처럼 이 고백이 우리 안에, 그리고 너와 내 안에서 진솔하게 고백되어지고 주님께 우리 인생의 주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것도 해 보았고, 저것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2021년 성탄절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찬송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