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설교
제목: 만져주옵소서!
본문: 마가복음 1:29-31
서론)
메리 크리스마스크!
2020년 성탄절에 나누는 인사법이랍니다.
2020년은 마스크를 쓰고 맞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느 날 외부에 출타했는데 나오고 보니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코로나 19라는 질병이 전염될까? 의 염려가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경계할까? 의 두려움 때문에 그날 너무 힘든 시간을 외부에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크!
이제는 너무 당연한 일상이 된 2020년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근래, 교우들과 비대면 심방을 SNS를 통해 하다보면 스트레스지수 100은 되어 보이는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왜 아니 그럴까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폭발 일보 직전이라는 표현을 쓰면 부적절한 표현일까 싶지만 딱히 다른 표현이 없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음에 저도 대단히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동서남북을 보아도 어디 하나 웃을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만이 보여 마치 독사가 똬리를 틀고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형세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런데 이 아픔 속에서 성탄절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2020년 우리는 이 참담하고 무거운 성탄절 아침에 어떤 생각을 하며 예수 탄생의 의미를 새겨야 할까요?
지난 30여 세월 동안 강단을 지키며 설교를 해온 목사도 이번 성탄절에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에 탄식하며 지난 시간들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새벽예배를 인도할 때, 하나님께서 종의 입술을 제어하시며 강권적으로 내뱉게 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만지심’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만져주시기를 원합니다. 를 반복하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해서 서재에 들어와 만지심이라는 단어를 묵상했고 오늘 성탄의 아침에 우리 교우들에게 하나님에게 강권적으로 만지시는 은혜를 기대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지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다시 말해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초창기를 배경으로 한 기사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유대 종교의 교리에 고착화 되어 딱딱하게 굳어있는 종교인들을 경종하기 위해 그들 앞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기적을 베푸신 주님은 곧이어 회당을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부르신 제자 베드로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도착을 한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서 돌발적인 사건을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사투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본문 29-30 전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뮌헨 대학교 교수인 요아킴 그닐카(Joachim Gniilka)는 자신의 마가복음 주석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걸려 있는 열병이 치유 불가능의 질병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질병 상태를 알리는 ‘누워있다.’라는 헬라어 동사 ‘카타케이마이’는 그냥 누워있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 일어나지 못하는 누워있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다. 그 여인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유대인들의 전승 중에 하나인 미슈나에 따르면 열병은 기괴한 불(Hitze)이기에 마시기는 해도 먹지는 못하는 불이라고 불렸다. 즉 그녀는 위독한 상태였다.” (국제성서주석 마가복음, 한국신학연구소,104)
다시 말하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은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견들에 동조한다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한 베드로의 집에 싸늘한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헌데 이렇게 분위기가 우울하고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주목할 마가의 보고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30절 하반절입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이 대목을 읽겠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몸져누워 있었는데, 열이 불덩이 같았다. 그들이 예수께 알렸다.”
무슨 말입니까?
마가는 분명히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지 못하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음을 증언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심방을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장모를 예수님께 그녀를 고쳐달라고 단 한 마디를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 집에 들어와 있는 다른 사람들 즉, 추측건대 그 동네에서 베드로와 베드로의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던 동네 지인들이 예수님께 베드로 장모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전했고 베드로 대신 그녀의 아픔을 대신 토로하며 그녀를 고쳐 줄 것을 청했다는 사실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이 말은 다른 각도로 해석하면 베드로의 장모가 지역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전제로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그 다음 구절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31절을 보겠습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께서 베드로 장모에게 보여주신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녀의 손을 붙드신 것입니다.
영어성경 KJV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he came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lifted her up.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잡고 그녀를 취하신 뒤 그녀를 들어 올렸다.”
얼마나 최선을 다해 그녀를 붙들고 당신 쪽으로 끌어당겨 견인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하는 것과 사생결단의 마음을 갖고 반응하는 것을 분명히 느끼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전인격적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생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여인을 고치기 위하여 행하셨던 반응은 최선을 다하신 만지심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읽다보면 아연실색하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18:15-17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의 율례에 의하면 할례를 받고 성인으로 정식 인정받는 해를 13세로 규정합니다.
이 말은 13세 미만의 아이들은 인권이 인정받는 나이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사람들이 데리고 온 아이는 유아 즉 어린아이를 의미하는 ‘브레포스’이기에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별로 존중받지 못하는 관심 외의 보잘 것 없는 생명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도 누가복음 18:1절에 있는 대로 어린 아기 한 명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리고 와서 만져주기를 원했다면 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져주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합토’는 ‘붙들다’라는 원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인지 혹은 관계되어 있는 친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가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심을 다해 아이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 상황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적인 율례라는 전통과 학습된 관례에 찌들려 있던 제자들이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반색하시며 반대로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이윽고 아이를 가까이하신 주님은 아이를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마치 베드로 장모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품에 힘껏 안으시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시며 강복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아이를 만지시고 축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을 선언하신 메시지가 심장을 쿵하게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구원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목적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 또 하나는 더 풍성이 얻게 하려 하심이 목적입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는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과 매치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만지심으로 다치지 않게 하심입니다.
만지심으로 격려하심입니다.
만지심으로 위로하심입니다.
2020년 성탄절 아침입니다.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지쳐 있는 2020년입니다.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버겁고 지난한 삶을 이어온 2020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외는 없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오늘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는 만지심입니다.
11월 25일, 제천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니까 정확하게 한 달이 되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 교회는 선제적 조치로 대면 예배를 모두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제게 습관적으로 찾아가는 사이트가 생겼습니다.
제천 시청 홈페이지 안에 코로나 상황을 올린 사이트입니다.
시청에서 확진자 발생 소식이 올라오면 곧바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진자의 동선을 확인합니다.
동선을 확인하면 또 곧바로 전화를 교우들에게 겁니다.
확진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접해 있는 교우들이 전화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지체들의 안부를 묻고 개인 건강에 최선을 다할 것을 권면하고 확인합니다.
경우에 따라 교우들이 애로를 말하면 곧바로 붙들고 전통으로 중보 합니다.
며칠 전, 이런 이유 때문에 전화를 건 지체가 제게 기도를 받고 이렇게 반응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의 여정으로 이렇게 안부를 물어주시지만 저는 목사님이 주시는 이 한통의 전화와 안부가 얼마나 위로가 되고 행복한 소통인지 모릅니다. 적어도 내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보살펴주는 목사님이 있다는 것이 코로나 사태 속에 있는 제게는 큰 감사의 내용입니다. 저 역시 목사님을 위해 작지만 중보 합니다.”
또 며칠 전, 김성숙 집사와 통화를 했습니다.
매번 황홍일 집사의 상황을 점검하고, 안부하는 교제의 전화였는데 그날은 김성숙 집사의 애틋하고 지난 한 삶이 마음으로 아렸습니다.
해서 황 집사의 안부를 묻고 김 집사님을 위로했습니다.
이제는 지칠 만도 한 때인데 내색하지도 못하고 남편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김 집사님을 위해 안부를 묻고 쓰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담아 위로하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 딸이 되게 해주시고, 반드시 옛말 하며 사랑하는 남편과 노래하는 날이 오게 해 주십시오. 힘들겠지만 매일 김 집사님을 안아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전화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김 집사의 울음 섞인 아멘 소리에 같은 마음으로 아멘 했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는 데 김 집사께서 이렇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목사님, 쓰러질 만 하면 붙들어주시는 목사님의 그 사랑에 감사드리고, 황 집사가 일어날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목사님과 세인지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주 가끔은 사람에게 진정이 있는 위로를 받을 때, 그것은 치료제가 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힘이 됩니다.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원동력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만지심이 어떨까! 하는 은혜입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이론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친 그 동네에 한센 병 환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자기의 저주받은 질병이 고침받기를 간구합니다.
누가복음 5:12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이 간구를 들으신 주께서 한센 병 환자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이어지는 13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이 구절이 주는 전율함의 은혜가 성탄절을 맞아 예배하는 우리 교우들 모두에게 강력하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2020년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누가복음 5:13절에 보고된 그대로 손을 내밀어 만지시고자 하는 의지는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원하십니다.
당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들의 손을 잡고 만지시기를 말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오늘은 성탄절입니다.우울한 분위기이기에 더욱 더 주님의 따뜻한 만지심이 필요한 성탄절입니다.
국가적으로 5인 이상이 모이지 못하는 극단의 거리두기가 1월 3일까지 지속됩니다.
이제는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단지 2m가 아닌 듯합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우리와 함께 했던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변하지 않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그래서 더 가까이 계신다는 은혜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언제나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2021년은 말씀과 기도와 묵상과 삶의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만지심을 더 강력하게 체휼하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