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설교
제목: 채널고정
본문: 요한복음 6:66-68
2019년 마지막 예배이자 2020년 첫 번째 예배에 나오신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영적으로 스며드는 귀한 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랭던 길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 (랭던 길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간, 2013년 p,432)
저는 길키 박사의 이 말에 대한 100% 동의합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손이 오그라져 있는 상태를 타인에게 펼치는 것이라고 말한 어떤 신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 말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청산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남성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에서 함께 나눈 텍스트가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이었습니다.
나누었던 말씀의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17-20절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보다 더 선명한 복음의 메시지가 있겠습니까?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하나님의 모략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기쁨을 찾는 가장 빠른 길은 예수께서 하실 것 같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하나님의 모략”, 복 있는 사람,2012년,p,439.)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왜 나쁜 열매를 맺는 비참한 존재들이 됩니까?
예수께서 하실 것 같은 그 일에 전혀 관심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한 세월을 살아왔고 들었던 풍월을 갖고 버티는 삶을 살았기에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하실 것 같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명제 앞에서 다른 변명은 구차해 집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실 일을 찾는 것은 내가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영적 바로미터입니다.
예수께서 하실 만한 그 일을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습니까?
채널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 채널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 6장의 시작은 주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맛본 민중들은 이후에 주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그 요구를 물리치시고, 정서적으로 왕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제자들에게도 빈틈을 주지 않으시고 가버나움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 뒤, 주님은 도보로 우회하여 그곳에 가시기 위해 산으로 혼자 떠나셨습니다.
그 다음날 주님은 가버나움을 오기 위해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으로 고생하던 제자들의 배에 오셔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가버나움으로 제자들과 함께 도착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에서 없어진 것을 안 바로 전날 배불리 먹음을 경험한 많은 백성들은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찾아갑니다.
기를 쓰고 가버나움을 향해 주님을 찾아간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서도 아니요, 그리스도로 인정해서도 아닙니다.
아마도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 6: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저의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아신 주님께서 드디어 처음으로 속에 있는 마음을 전합니다.
몇 구절만 소개합니다.
6:27절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에 목숨 걸지 말라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이어지는 6:32-3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리고 결정타를 하나 날리셨습니다.
6:35절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저는 요한복음 6장을 읽을 때마다 묘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만들어낸 놀라운 떡을 요구합니다.
그 떡을 오늘은 누가 요구합니까?
들었던 풍월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교회 안의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 그 떡을 요구합니다.
이 떡을 요구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하실 것 같은 영적 본질에는 1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배부를까?
어떻게 하면 대접받는 자리에 있을까?
어떻게 하면 헤게모니를 거머쥐어 주류적인 종교적 인간이 될까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는 점에 전율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65)
그렇습니다.
주님의 유일한 관심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 그 떡을 먹는 것에 목을 걸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설교 서두에서 전한 화두로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것 같은 그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포한 주님의 선언에 썩을 수 있는 떡에 혈안이 되어 있던 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아프지만 들추어내겠습니다.
두 구절을 소개합니다.
6:41-42절입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결론적인 반응은 오늘 본문 66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저는 이 구절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정보를 얻습니다.
벳세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부류들 중에는 예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던 무지한 백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들 중에는 12제자 군에 속하지 않았던 잠재적 제자들로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들의 명칭을 분명히 ‘제자’ 즉 ‘마쎄테스’라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명목적 제자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 제자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이 원하는 떡 즉 자기만족이라는 허울 좋은 떡을 공급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그 분에 비수를 꽂을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제 정말로 중요한 송구영신예배를 주님이 세인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나누겠습니다.
본문 67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명목적인 제자들, 무늬만 제자라는 허울을 갖고 있었던 제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떡을 공급받지 못하자 주님을 떠났다고 보고한 요한은 주님이 그 다음 말을 놓치지 않고 기록합니다.
67절에서 주님이 말씀의 대상으로 못 박은 사람들은 ‘제자’가 아니라 ‘12제자’였습니다.
다시 이를 12명의 제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제자들과는 차별화된 제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을 받은 12명의 제자들 중 언제나 선임의 역할을 감당한 제자 베드로가 그 유명한 답을 고백을 합니다.
본문 6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제 오늘 설교의 교훈을 내놓겠습니다.
※ 말씀이라는 영적 채널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십시다.
성도라면 반드시 예수께서 하실 만한 일에 집중하는 자요, 더불어 그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그 일을 행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에 채널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가 아니라 12제자라면 반드시 고정할 채널은 ‘말씀’이라는 채널입니다.
왜 말씀이라는 채널에 고정해야 합니까?
그 말씀 안에 주님이 행하고자 하셨던 일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루에 100페이지를 독서하는 일을 제 공부의 일환으로 삼고 지난 10년을 달렸습니다.
어느 날 주께서 조명하셨습니다.
“이 목사야, 너는 하루에 내가 주는 꼴을 얼마나 먹고 있느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새벽에 교우들과 함께 통독하는 말씀 그리고 하루 성경 통독량으로 정한 것이 7장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제가 접하는 성경은 고작 10장 정도에 지나지 않다는 것에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 조명을 받은 이후 성경을 더 많이 가까이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제가 매일 접하는 양을 배로 늘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2제자’로 만드는 무기입니다.
주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명목적 신자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채널을 고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앵커브리핑에 채널을 고정하는 이유는 어느 경우, 앵커브리핑이 세상을 향하는 설교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잣대를 갖고 치열한 공부와 균형 잡힌 통찰로 엮어내는 앵커브리핑을 보면서 저 역시 역발상의 도전을 받습니다.
설교가 앵커브리핑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영생의 말씀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채널에 내 영적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020년, 그 어느 해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채널에 우리의 영적 시선을 고정해서 히브리서 4:12절의 강력한 은혜를 맛보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