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스물일곱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0:1-23 제목: 그를 잊었더라 서론)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조급성의 시대는 산만의 시대다.” (『시간의 향기』, 106쪽) 이렇게 말한 한 교수는 조급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현대인들 즉 철학자 하이데거가 사용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세인’(世人)의 특징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세인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조급성이다. 세인은 거의 몰두하지 못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에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도외시한다. 세인은 채널을 돌리듯이 돌아다닌다. ‘머무르지 못하는 산만함’ 또한 ‘머무름의 부재’를 갖고 있는 이들이다.” (같은 책, 103-104쪽) 조금 어려운 표현이지만 곱씹으면 이렇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최고의 재앙은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함이다.” 반면 성경이 제시한 메시지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나이 75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40세부터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살다가 그의 나이 80세가 되는 어느 날에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됩니다. 무려 40년이 흐른 뒤에 부름을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40년을 기다리신 셈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애굽에서 나온 지 40년이 지나서야 직선 거리로 10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외삼촌에게 20년 동안이나 종살이라고 할 수 있는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지만 하나님은 20년이 지나기까지 꿈쩍하지 않으셨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야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결국 야곱은 2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반추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위해 기다린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를 실례로 들었지만, 성경 안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때나 시간이 채워지기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셨고, 또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다리게 한 실질적 예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0장도 이런 실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근거 구절입니다. 본론) 요셉은 보디발 아내가 뒤집어씌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음을 39:20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이 구절에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보르’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단어를 37장 강해 시간에 다루었습니다. 창세기 37:24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그렇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기 위해 던졌던 ‘구덩이’가 바로 ‘보르’입니다. 결국 창세기 기자는 요셉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고난을 형들에게 미움을 당해 던져졌던 ‘구덩이’를 연상하게 함으로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요셉의 고통이 결코 적지않은 아픔을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고통을 안고 있는 요셉이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무언가 일을 행하실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본문 텍스트입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들어가 있는 ‘보르’에 당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두 사람이 무슨 연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어오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바로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가 먹는 술과 떡을 담당한 관원들이었습니다. 당시는 독살이라는 암살이 성행하던 시기였기에 바로가 먹는 음식을 담당하던 이들은 바로로부터 최고로 신임을 받던 자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이들이 ‘보르’에 들어왔다는 것만 보고하지 이들이 무슨 중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이 ‘보르’에 투옥되었다는 것과 이들이 수감된 ‘보르’는 요셉이 있던 장소라는 것,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요셉이 해주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운명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정도만 본문에서 논합니다. 저 역시 오늘 강해설교를 통해 술과 떡맡은 관원장들이 꾼 꿈과 그것에 대한 요셉의 해몽 등등은 설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메시지나 교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늘 설교의 포인트를 설교 서두에 말씀드렸던 의미와 연결시키는 교훈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14-15절을 나누겠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꿈을 꾼 두 사람 중에 술맡은 관원장에게 그의 꿈을 해석해 준 뒤에 그가 방면되고 복권될 것을 확신했던 요셉이 그에게 했던 부탁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 자신이 이 ‘보르’에 갇힐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자신은 무죄한 사람임을 밝힌 것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셈입니다. 이제 우리는 23절 마지막 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요셉의 부탁대로 복권 사면된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고 그의 청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독자인 우리들에게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청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무려 옥에서 방면된지 2년 간 전혀 요셉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창세기 41:1절이 제시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정보를 나누어가져야 하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나이가 17세였음을 살폈습니다. 이제 창세기 41:46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이미 우리가 알 듯이 창세기 기자는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준 뒤, 애굽을 통치하는 제 2인자인 총리로 등극한 시기를 요셉의 나이 30세라고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나이 30세에 바로에게 그를 소개하기 전까지 요셉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간을 2년이라고 산정할 때, 요셉이 감옥에서 방면될 때까지 구금되어 있었을 때의 나이는 28세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요셉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고난을 당했던 총 시기는 무려 13년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11년, 보르에서 2년 총 13년이나 요셉은 고난의 터널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접근하면 11년이라는 시간도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요셉에 정말로 힘들었을 시기는 분명 ‘보르’에서의 2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가닥의 희망을 갖고 오늘일까 아니면 내일일까 노심초사하면서 지냈던 2년은 요셉에게 정말로 지옥같은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2년이라는 세월 동안 요셉을 힘들게 하셨을까? 이왕 ‘보르’에서 풀려나게 하실 요량이었으면 곧바로 방면헤 주실 것이지, 왜 2년 동안 요셉에게 애간장을 태우게 하셨을까? 답을 제시하기 위해 구약학자가 의미 있게 전한 주석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성경은 술맡은 관원장의 석방 이후 요셉의 2년 동안의 삶을 아무런 기록없이 지나가고 있다. 요셉에게 늘 형통함을 주시던 하나님께서 이 장면에서 요셉의 부르짖음에 무섭게 침묵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렇다. 요셉이 만일 술맡은 관원장에 의해 바로 석방되었다면 그는 다시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로 들어가거나 자유인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궤적이 향하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는 이집트 총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껙서는 이를 위해 요셉을 훈련시키셨기에 요셉이 석방시켜달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그의 기도를 들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보르에서의 2년 동안 요셉을 철저히 훈련시키고 계셨던 셈이다.”(오택현, 『연세신학백주년 기념주석-창세기』, 320쪽) 나 또한 오 교수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마지막 23절에서 보고된 술맡은 관원장의 반응은 대단히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23절) 오늘 설교 제목인 ‘그를 잊었더라’고 행하게 하신 술맡은 관원장의 반응은 요셉을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작품이라는 감동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해석을 전제로 오늘 창세기 강해를 통해 주시는 레마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잘 나가던 바리새파 출신의 히브리인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정받던 열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유대 종교 수뇌부들에게 인정받게 된 이유는 다소에 살던 그가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 예루살렘 가말리엘 문하로 유학을 온 수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적인 공부를 마친 그는 열정적인 유대 율법주의자가 되어 예수를 믿는 자들을 소탕하는 중요한 임무를 대제사장에게 부여 받고 다메섹을 향해 출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사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전인격적인 엔카운터를 경험하고,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되어 바울이라는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것을 곱게 볼 리 없는 유대 종교 수뇌부는 이후, 바울을 제거 일순위로 놓고 그를 박해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급격한 회심에 반신반의하며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자 바울은 마음을 졸이며 어쩔 수 없이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하기 위해 떠나온 고향 다소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13년 간을 칩거하며 은둔하게 됩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향 다소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게 13년을 칩거하며 은둔하던 어느 날, 바나바가 다소로 바울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바울 형제, 내가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의 위임을 받고 왔습니다. 지금 수리아 안디옥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강력하게 임하여 수많은 자들이 회심하고 에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나 혼자의 힘으로 그들을 양육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보내준 무리들을 제자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형제와 나의 사명입니다. 나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로 가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드립시다.” 이 제안을 받은 바울은 바나바의 요청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윽고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로 가서 1년간 머물며 모여든 무리들을 주의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고합니다. 사도행전 11:25-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주목할 것은 수리아 안디옥에 모여든 자들을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큰 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오클론 이카논’을 직역하면 ‘매우 많은 군중’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합지졸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오합지졸 무리들을 바울과 바나바는 일년 간 가르쳤고 그 결과, 그들은 ‘크리스티아노스’ 즉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술회해 보십시다. 13년 다소에 낙향하여 칩거하고 있는 바울은 어떤 상태로 있었을까요? 인생의 실패자라고 여기고 막 살았을까요? 내가 이러려고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는가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좌절했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바울은 13년 동안 고향에서 칩거하며 자신을 뒤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13년을 자신을 철저히 복종하는 연단의 시간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었던 일체의 세속적 가치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시간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실패한 자처럼 주변에서 따가운 눈총을 주고 있지만,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자기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을 믿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교만함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께서 지명하신 이방의 사도로 준비되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사용하시고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시간은 내게 옵니다. 그리고 오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시간이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느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신작을 어제 읽었습니다. 김 목사의 글이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며 사는 이들은 성실하다. 그 성실함이 세상을 지탱하는 토대인지도 모르겠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두란노, 66-67쪽) 심장을 파르르 떨게 하는 듯한 명문을 보았습니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농작물의 성실함과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아닌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주인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주인을 기다리는 농작물을 떠올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화들짝해야 합니다. 나는 주군이신 주님의 일하심 소리를 듣고 기다리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대림절 두 번째 주간 수요일 저녁입니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한 남자를 소개합니다. 누가복음 2:25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조금도 기다리지 않는 조급함이 양식이 된 시대, 큰 울림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계절입니다. 오셔서 완벽하게 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