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3:1-20
제목: 무례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현직 대통령이 도어스테핑(door-stepping)을 중단했습니다.
MBC 방송이 지금 정부에 대하여 편파방송을 한다는 것이 화근이 되어 불편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입니다.
얼마 전, 대통령 실 홍보 비서관과 MBC 기자와 도어스테핑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간 사건을 방송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견원지간처럼 고성을 높이며 자기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감정이 격해져서 언성을 높이며 논쟁한 것이 방송에서 그대로 송출되어 저같은 일반 시민도 그 치부를 고스란히 보게 된 것입니다.
목사로 정치적인 입지를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아 당시의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코멘트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하나, 그날 절대로 하지 말아야 했을 한 가지에 대해서 설교와 관련하여 피력하고자 합니다.
그날 대통령 실 관계자는 MBC 기자와 충돌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습니다.
반말로 대처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실 홍보 관계자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자에게 반말로 반응을 보인 것이었습니다.
기자가 반말하지 말라고 다그치자 머쓱해진 홍보 비서관은 그 다음부터 마지못해 억지춘향으로 말을 짧게 하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는 것을 보면서 참담했습니다.
사적인 상태가 아니라 공적인 상태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반말하는 주체가 무식하든지, 혹은 무례하든지입니다.
풀러 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리처드 마우어의 글을 보면 의미 있게 받아야 하는 글이 있습니다.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지 문자적으로 누구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이 계명은 말이나 몸짓으로 내 이웃에게 모욕을 주거나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면서 죽이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계명이다.” (리처드 마우어, “무례한 기독교”, IVP, 61.)
그는 행동뿐만이 아니라, 말로도 결코 무례함을 범하지 말라고 경성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은 살면서 말로 결례를 범하지 말라는 이 경고에 귀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로 무례를 범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정말로 치명적인 무례의 극치는 행동과 삶으로 범하는 무례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라가 127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슬퍼하던 아브라함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내의 장사를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땅인 기랏아르바에서 아내가 죽었는데 그녀를 묻을 땅 한 평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땅의 주인인 이웃으로 지내던 헷 족속을 찾아 갑니다.
헷 족속의 땅이었던 막벨라를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과 매장지 구입하기 위한 협상에서 자신의 신분을 이렇게 밝힙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이 밝힌 자신의 정체성은 말 그대로 겸손하고 정직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이기는 했지만 지금 자기가 거주하는 땅에서 본인의 명의로 갖고 있는 땅이 단 한 평도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브라함은 나그네이고, 거류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정체성도 바로 이렇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아브라함에게 헷 족속은 언뜻 보기에는 선의를 베푸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얼마든지 우리가 갖고 있는 묘실을 택하여 아내를 장사하라고 허락합니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이것 역시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헷 족속의 지도자들 역시 아브라함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했던 것이 사실인 듯 보여주는 좋은 실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에게 좋은 감정과 호의를 보이는 듯한 협상이 매우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이 그 다음 구절들을 통해 엿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묘실 아무 곳이라도 장사할 장소를 허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호의로 보이는 헷 족속의 요구를 정중히 거부하고 단지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소유였던 막벨라 굴을 매매하겠다고 다시 협상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브론은 그 땅을 그냥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말했지만, 아브라함이 중요한 단서 하나를 건네며 다시 협상에 들어갑니다.
본문 12-13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브론이 땅을 무료로 주겠다고 한 말은 건의가 아니라 계책임을 알게 해 주는 메시지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가격으로 무려 은 400세겔을 요구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 가격은 터무니없는 대가의 요구였습니다.
그 이유를 오택현 교수의 주석으로 알아보십시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은 400세겔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800년 뒤에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산 가격은 은 50세겔이었고(삼하 24:24), 다시 200년 뒤, 오므리가 수도를 천거하기 위해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성을 샀을 때도 그 가격이 은 4000세겔이었다.(왕상 16:24) 다시 300년 뒤에 예레미야가 하나멜에게서 아나돗 땅을 샀을 때도 은 17세겔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브라함이 매매하려고 했던 땅 막벨라의 가격은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아내를 잃고 경황이 없었기에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듯하다.” (오택현, “연세신학 100주년 기념주석”, 192-193)
결국 겉으로는 예의를 보인 것 같았지만 속내는 이웃에게 무례하게 행한 성경적인 실례 중에 하나가 막벨라 구입 사건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아브라함은 대단히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본문의 마지막 메시지를 다 읽고 나면 그 의미를 달리 해석할 수 있으니 본문에 끝까지 집중해 보십시다.
16-20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바가지 씌움을 당한 아브라함의 행동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⓵ 막벨라가 있는 헤브론 땅에 대한 영적인 의미입니다.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과의 영토 분쟁에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세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 장소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방인을 통해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매입한 땅이 있는 지역입니다.
첫째는 오늘 본문의 지역적 배경인 헤브론 지역이고, 두 번째는 다윗이 샀던 아리우나 타작마당 그러니까 지금 예루살렘의 성전 산이고, 세 번째로는 야곱이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100 크시타에 산 세겜 지역입니다.(창 33:18-20)
무슨 말인가 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에 바가지 씌움을 당한 땅이었지만, 후손들은 이후 헤브론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지해 주는 땅으로 사수하는 의미의 땅으로 각인시켰다는 영적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면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셨다는 점을 통해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줍니다.
⓶ 하나님 백성은 손해를 보더라도 무례히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땅이 막벨라입니다.
에브론은 아브라함이 아내를 잃고 경황이 없는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정당한 대가가 아닌 무례한 대가를 요구하여 뜻을 이루었습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브라함이 노쇠하여 감각을 잃어 이런 일을 했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땅을 구입한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를 장사하기 위한 땅을 매입함에 있어서 세속적인 잣대로 계산하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그에게 있었고, 또 하나는 본인이 고백한 대로 자신은 나그네이자, 거류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대가 이상의 대가를 치르는 예의를 지킨 것입니다.
예의가 무엇일까요?
합당하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에 입성하도록 전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일하시면서 가나안에 올라가서 하지 말아야 할 일 명령하였습니다.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사기 1:27-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므낫세 지파가 자행한 일에 대한 사사기 기자의 고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배분한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내쫒지 않고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7-28절은 므낫세를 고발했지만 이어지는 사사기 1:30-36절에는 스블론, 아셀, 납달리 등등도 공범자였음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왜 가나안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나안 주민들을 남겨두었을까요?
유익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농경 문화에 익숙했던 그들을 남겨두면 농사에 대한 여러 가지 유익을 얻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하나님보다 얄팍한 세속의 판단을 선택한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간, 애굽에서 노예를 살면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짐승처럼 부림을 당했습니다.
애굽이 저지르는 무례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앙갚음을 가나안에 들어와 가나안 거민들에게 그대로 행하며 복수합니다.
역시 자기들이 당했던 무례를 그대로 점령지 백성들이었던 가나안 거민들에게 자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애굽이나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나 도진개진입니다.
무례함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힘 있는 자가 힘으로 힘없는 자를 짓밟는 일체의 행위가 무례입니다.
갖고 있는 권력으로 피 권력자들을 옴짝 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가 무례함입니다.
오래 전,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강남순 교수의 강의를 책으로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한 종교가 그 종교에 헌신하는 이들을 지극히 개인적인 안녕과 성공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종교인’으로 만들어갈 때, 이미 그 종교는 이기적인 개발자들을 위한 사유화된 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 공적 세계에서의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나’의 존재란 타자들과 ‘함께-존재(Mit-sein)’라는 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포괄적인 존재의 의미가 형성된다. 그렇기에 ‘나’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이란 ‘나’와의 종교적, 인종적 ‘동질성’을 나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름’ 속에 존재하는 이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불균형과 불평등의 세계 속에서 다양한 현실에 관여하고, 인간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키는 다양한 경계를 넘어서서 사랑, 연대, 책임적 삶을 살라는 강력한 초대장이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공적 환대라는 미션이다.”(강남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환대”, 새물결플러스, 258.)
이 글을 읽다가 내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성적 마지노선 긋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남순 교수의 일갈에 대한 거의 대부분 동의하면서 떠올린 단어는 ‘환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예의를 지키는 것은 타자에 대한 환대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예의 지키기는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손해를 감수한 것은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7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 옛 생활로 다시 복귀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호수 쪽에 서 계신 분이 주님인 것을 알았던 요한이 주님이시라고 외치자 상의를 벗고 있었던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후에 주님이 계신 호수 쪽으로 뛰어내렸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겉옷을 두른 후에”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이 절박하고 긴장된 순간에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내렸다는 보고가.
주군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무례한 신자 되지 마십니다.
부담이 되더라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예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예의범절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 형제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내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분 기뻐하시네 그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