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세인교회가 되기를2024-03-08 17:22
작성자 Level 10

2022년 10월 2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일흔 일곱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21:22-34

제목세인교회가 되기를

 

서론)

 

지난 토요일 아내가 친정의 일로 수도권에 있는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토요일이라 분주하게 주일을 준비하는데 알지 못하는 휴대폰 번호가 제 휴대폰에 떠서 받아야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 3354 차주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자 제게 이렇게 그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주차하신 장소는 사유지인데 여기에다 주차를 하시면 안 됩니다출차 해 주십시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유지에 주차를 하면 어떻게 해빨리 차 다른 곳으로 옮겨라

헌데 전화를 받는 아내가 시큰둥하게 응답했습니다.

알았어요.”

저녁에 들어온 아내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 차 빼달고 전화한 사람이 화가 나서 전화했어요?”

아니그러지는 않았어나름 정중하게 전화했던데.”

내 말을 듣자마자 아내가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내가 주차한 장소는 교회 주차장인데 약 100대는 주차할 수 있는 큰 교회 주차장이었어요교회 행사가 있어서 차를 주차하지 못하는 상태도 아니었고, 100여 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에 달랑 내 차 하나하고 또 다른 차 한 대딱 두 대만 있었어요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에요이러니 사람들이 교회를 가고 싶어 하겠어요?”

종로에서 뺨 맞고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분풀이로 교회에서 당한 속상함을 목사인 나에게 해서 한 방 맞았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갈무리했습니다.

하나님 혹은 성령은 구체적으로 에게 다가온다오직 그의 활동을 통해서만 타자는 가 된다그에게서 자아가 생겨난다다르게 말하면모든 인격적인 는 하나님의 너의 모형이다.”(김성호,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 동연, p,377)

본회퍼 목사의 이 갈파는 정말로 깊이 생각해야 하는 촌철살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찾아온 는 곧 타자가 된다는 이 명쾌한 해석이 나를 불 질러 놓았습니다.

이것을 믿는 목사는 반드시 이 슬로건으로 목회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

이 말은 더 치열하게 접근할 때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반드시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라고 인정할 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우리 교회가 좋다고 말을 해도 좋은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 안에 있는 상투적이고 허울 좋은 자랑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메시지가 주는 신앙적인 함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은 이삭이 태어난 이후인지 혹은 그 이전인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아 시대를 추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 기록에서 그랄 왕이었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지칭할 때 2인칭 단수를 쓰고 있는 것을 볼 때아직 이삭이 탄생하지 않았을 때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할 뿐입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떠나보낸 뒤였기에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기는 아브라함이 아직도 완전히 자신의 가족들과 식솔들 즉 하인들과 가축하는 일체의 동물들을 건사하기가 녹록하지 않은 그랄 땅에 거주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더 더욱 입지가 불안할 수 있는 시기임을 전제합니다.

바로 이 때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 22-23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이 구절을 읽다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미 20장 강해를 통해 아브라함을 찾아온 그랄 왕 아비멜렉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가나안 지역이었던 마므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이 그 땅에 기근이 들었거나 아니면 가축들에게 먹일 목초들이 바닥이 났든지 어떤 경우에서든지 더 이상은 마므레에 거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아 블레셋 지역이었던 그랄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그랄 쪽에서 볼 때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은 또 불신앙이 도집니다.

애굽에서 행했던 패륜적인 실수를 또 감행합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생존하기 위해 그랄에 정착하려고 했던 쓰라린 그 기억 말입니다.

마침 사라를 차지하려던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이 직접 현현하셔서 그 여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고도리어 아비멜렉은 겁에 질려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한에게 붙여 주며 그랄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는 기사를 살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갑을의 관계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비멜렉은 갑입니다.

마땅히 아브라함은 을입니다.

아비멜렉은 한 지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장관까지 거느리고 있는 물리력을 갖고 있는 지역의 왕이었습니다.

본문 22절에서 아브라함을 찾아간 아비멜렉을 수행한 자가 군대 장관 비골이었다는 것을 감안 할 때 아비멜렉은 분명히 군사력공권력물리력을 갖고 있었던 갑이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을이었습니다.

그는 한 가족의 호주에 지나지 않는 자입니다.

그는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입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재산과 하인들을 거느렸다고 할지라도 그는 무장한 아비멜렉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더군다나 다시 강조하지만 그는 그랄의 입장에서 볼 때 굴러들어온 돌 신세이자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내세울 것이 없는 연약한 평민입니다.

그런데 한 지역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이 굴러들어온 돌이자 이방인인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국방부장관을 대동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만난 아비멜렉이 찾아온 용건을 말한 내용이 바로 본문 23절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창세기 21:23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나와 내 가족에게 어떠한 부당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시오이곳에 사는 동안내가 그대에게 행한 것처럼 그대도 나와 내 땅을 그렇게 대하겠다고 맹세해 주시오.”

갑이 을에게 통사정하는 듯한 구절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구절도 얼떨떨하게 만드는데 그 다음 이어지는 24-27절은 더 점입가경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무슨 말입니까?

을의 위치에 있었던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아비멜렉의 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합의합니다.

그런 뒤에 적반하장으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합니다.

이전에 그랄 백성이 아브라함이 파낸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 책망합니다.

책망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카흐는 원 의미가 조금 더 강합니다.

응징하다의 의미입니다.

이게 어디 말이 될 법한 일입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응징하면 응징하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응징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친다니 이게 어디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독자인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빼앗았던 엣 일을 들먹이며 아비멜렉을 비난했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비난하는 내용을 들은 아비멜렉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6절이 보고합니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몰랐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지금 네가 말하는 말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당시 아비멜렉이 통치하던 영역은 지금처럼 국가적인 차원의 넓은 영토를 갖고 통치하던 시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부족 통치 정도의 소규모 통치였습니다.

씨족혈연 등등의 소극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그랄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 빼앗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공격에 당황하여 궁여지책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한 셈입니다.

이것도 너무 상황에 맞지 않는 반응입니다.

변명으로 일관하는 아비멜렉이 마치 을의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은 자신의 입지를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아비멜렉이 요청한 조약을 구체화하는 행동을 속히 보입니다.

27-31절 본문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먼저 준 뒤에 7마리의 암양을 따로 세웁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에 준 암양의 용도를 묻자 대단히 지혜로운 답변을 아브라함이 내 놓습니다.

아주 쉽게 이해하자면 우물 값입니다.

이것을 대가로 앞으로는 우물에 관한 소유권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말 것을 조약의 내용에 넣은 것입니다.

전 영역에 1/2 이 사막 지역인 그랄에서 우물은 대단히 중요한 삶의 요소이기에 아브라함은 그랄과 세운 언약에 이 내용을 포함하자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아비멜렉도 흔쾌히 아브라함의 요구 사항에 동의하고 그곳에서 언약을 체결합니다.

본문은 이 기사를 이렇게 마무리하며 종결짓습니다.

32-34절입니다.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분명히 해피엔딩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간의 언약 체결은 해피엔딩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을 찾아내야 합니다.

보기에는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이 언약은 갑을 사이에 맺은 언약이기에 한쪽으로 유리한 언약 체결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어느 쪽으로 유리해야 합니까?

충분히 힘과 세속적 능력을 갖고 있는 아비멜렉에게 유리한 조약 체결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핀 대로 도리어 아브라함에 유리한 쪽으로 조약은 체결되었고마치 아브라함이 갑인 양 그렇게 아브라함의 뜻대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요?

그 답을 저는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22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렇습니다.

아비멜렉이 주눅은 든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재론하지만 아비멜렉이 갖고 있는 세속의 힘은 아브라함 정도는 충분히 우습게 여길 만한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이 본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돕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그를 두려워하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평화 조약을 요청한 것입니다.

창세기 20:6-7절을 복기하십시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아비멜렉은 그랑 왕이었기에 야훼 하나님에 대하여 들은 적도믿은 적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였던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이 직접 현현하셔서 사라에 몸에 손대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였고지혜롭게도 그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인지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20장에서 나누었습니다.

정말 주목할 것은 세상 사람이었던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 보십시다.

아브라함의 행태는 대단히 불신앙적인 작태였습니다.

세상이 자기가 죽을까봐 아내를 파는 자가 제 정신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비겁한 일을 아브라함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비겁하게 짝이 없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점입니다.

아비멜렉은 바로 그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결과아비멜렉은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무지렁이 같은 아브라함에게 다가가서 화친을 제안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 세인 지체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엉망진창의 아브라함을 위해서 일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시지 않겠느냐는 교훈 말입니다.

오늘의 레마를 나누겠습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인 교회가 되십시다.

 

교회라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마치 가장 비인간적으로비윤리적으로 엇나갔던 아브라함과 같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사신 교회를 주목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들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들로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교회들이 지천에 있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7교회에 준 편지에 담겨 있는 것처럼

어떤 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도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어떤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있는 순결하지 못한 교회도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

어떤 교회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는 영적 간음의 소굴도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어떤 교회는 살았다고 떠들지만 진짜는 죽어 있는 유명무실한 교회도 있습니다. (사데 교회)

어떤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미지근한 교회도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하나님이 이런 교회에 책망하시면서 경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은혜로 진격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문제 있는 교회도 조각하셔서 사용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며 몸부림치는 교회를 얼마나 기특해 하시며 감격해 하실까 재론의 여지가 없기에 저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며 권면하고 싶습니다.

세인교회 지체들이여!

우리 교회가 세인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세인교회의 세인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어찌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에서 세상이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우들을 하나님이 어찌 두고만 보시겠습니까?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내일 DPA 1기 포럼이 우리 교회에서 실시됩니다.

포럼을 맡은 교회 담임목사가 한 세션을 맡아 강의를 해야 해서 내일 사역을 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젊은 목회자들이 모여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역이라 저 역시 실수하지 않아야 하기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내일 동역자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강의 메시지는 제천 세인 교회의 10대 목회 방침입니다.

1.어떤 경우에도 ‘Lordship(主尊心)’에서 흔들리지 않는 목회.

2. 강대상에서 목숨 걸고 세 가지를 균형 있게 전하는 목회.

⓵ 하나님의 나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갖고 살아 내는 교회.

⓶ 오순절적인(사도행전적인성령의 일하심

3) 캐리그마(예수의 탄생고난죽음부활승천다시 오심).

3. 목사부터 끊임없이 3C를 질문하는 목회

① calling ② character ③ capability

4. 맘몬에 결코 넘어지지 않는 목회

5. 상식을 존중하는 목회

6. 자기 관리에 목을 거는 목회.

7. 쓸데없는 곳에서 절대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목회

8. 성경중심적인 성경 연구의 결과를 상황중심적인 목회에 적용하는 목회

9. ‘Vor Gott Ohne Gott’(하나님 없이하나님 앞에서)의 신학적 고집으로 지키는 목회

10. 1일 100페이지 이상 독서하는 목회

 

저는 이런 교회의 목사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교우들은 이런 목회를 존중하는 교우들이 되어 하나님이 일하시고 돕는 세인교회를 보고 지금 시대에 영적 공허함과 갈함을 경험하는 일체의 영혼들이 다시 일어서고 구원받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