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드디어2024-03-08 17:03
작성자 Level 10

2020년 6월 3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82번째 강해)

 

본문 욥기 38:1-3

제목 드디어

 

서론)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우리 사회에 급속히 등장한 단어가 있습니다.

대면(對面)’과 비대면(非對面)’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셀 대심방 역시 풀어 말한다면 각 가정 비대면 심방이고교회 현장 대면 심방입니다.

말 그대로 대면이라는 말은 얼굴을 맞서 보는 행위이고비 대면은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온 라인예배가 교우와 목사 간의 비대면 예배라면오프 라인 예배는 성도와 목사 간의 대면 예배인 셈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욥기 4-37장은 욥과 세 친구그리고 엘리후의 대면 논쟁이고, 38-42장까지는 야훼 하나님과 욥의 대면 대화라고 보면 극히 적절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4-37장까지 야훼 하나님은 욥을 비롯한 인간과는 비대면 하신 셈이고드디어 오늘 본문인 38장에서 대면하시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드디어 욥에게 오셔서 대면하신 야훼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 동안경우에 따라서는 답답해 보이던 야훼 하나님의 침묵을 드디어 깨뜨리시고 욥에 오셔서 당신의 의지(WILL)를 표명하시는 38-41장까지에서 제가 언제나 떠올리는 장면은 영국의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입니다.

이 영화의 압권 중에 하나는 이구아수 폭포에서 과라니 족의 핍박으로 십자가형 틀에 묶인 채로 떨어져 순교하는 사제의 장면입니다.

결국 그 사제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파라과이의 이구아수 목포 주변에 살고 있었던 과라니 부족의 복음화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 영화의 시작입니다.

제가 왜 오늘 본문 38장을 열 때마다 이 장면이 생각나는지 부연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언자 제 이사야의 대언(代言)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사야 55:8-11절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과 다르다는 것이며또 하나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은 마찬가지로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훼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말의 무게가 인간이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한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 이사야가 전한 대언의 야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않게 하겠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무게감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의 신실성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가볍지 않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결코 얕지 않습니다.

그래서 택하신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4-37장까지 들으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설전을 벌인 욥은 물론 그의 세 친구와 그리고 또 한 명 엘리후의 변론까지 끝까지 들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야훼 하나님의 생각이 그들의 생각과 분명히 다릅니다.

야훼 하나님의 길은 욥을 비롯한 외의 4명의 길과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도 야훼 하나님은 37장까지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그냥 들으셨습니다.

그렇게 들으신 야훼 하나님은 드디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절을 읽어 보십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은 자연의 엄위하심으로 임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현현(theophany)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욥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의 일성을 나누어 보십시다.

본문 2절입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드디어 욥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의 일성(一聲)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4-37장까지 욥을 비롯한 4명의 소리들을 들었다그런데 너희들이 한 말이 무지한 말이다.”

이렇게 선전포고를 하신 야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다그치십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요즈음 잘 사용되는 단어로 말하면 卽問卽答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즉문즉설의 내용들이 다음 주부터 살필 38:4-4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3절까지로 줄였습니다.

줄여도 교우들과 충분히 영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메시지가 본문에 담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교훈을 찾아보십시다.

 

1) 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주인공이 되십시다.

 

본문을 연구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는 이렇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겼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는 욥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모든 인간은 무지에서 나온 헛된 말로 이루어진 삶을 산다그리하여 세상의 도와 이치를 어지럽히며 산다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사람은 참 말을 잃어버렸다말이란 대면에서 나오는 것인데 에덴동산을 하나님과 걸었던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대면할 줄 모르고 등을 지게 되었다거기서 참 말을 잃어버렸다.”(양명수, “욥이 말하다.”, 분도출판사,p,228.)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기막힌 성찰입니다.

인간이 왜 사람들 스스로가 듣기를 싫어하는 말을 하는 가벼운 말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인간은 왜 뭔가를 말하면 들어주기를 설레발치며 기피하는 극혐(極嫌)의 장본인이 되었을까요?

저는 양명수 교수의 일갈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목사가 다름 목사의 설교를 진정성이 있게 수용한다는 것은 정말로 너무 힘든 일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더 설교를 잘한다고 믿는 교만과 착각 때문입니다.

저 역시이 공식에서 예외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국에 나와 설교하는 목사들의 방송 설교는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책에서 만난 목회자들 중에 저를 흥분시킨 목사들 중에 혹시 텔레비전에 나와 방송 설교를 하는 당사자가(거의 없음있으면 가끔 시청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단히 치열한 본문 연구와 분석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설교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 임영수 목사이재철 목사가 그랬고김기석 목사김영봉 목사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의 나비적인 선포가 그들의 설교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너무 행복해 집니다.

목사로서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동역의 사역자가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익숙하여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에는 인색한 목사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동역자들의 메시지가 있어서 눈물 나게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들을 수 있는 말은 들을 만한 건더기가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야훼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경청하고 귀담아 들을 때나에게 주어지는 복이 있습니다.

나 또한 다른 제 삼자에게 전하는 말을 그들이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3절 본문을 다시 성찰해 보십시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두 가지의 단어가 긴장을 하게 합니다.
허리를 묶어라묻는 말에 대답해라.”

내가 영적으로 신실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둘 다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기석 목사의 책 을 보면 이런 글리 수록되어 있습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해서라면 모를 것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작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김기석, “아 욥”, 꽃자리, p,376.)

머리가 숙여지는 통찰입니다.

목회를 30 여 년 한 목사에게 주어지는 분별력이 하나있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은 자와 절대로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자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은 자는 아는 것이 많은 데 말하지 않는 자입니다.

반면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자는 아는 것이 없는데 너무 말을 많이 하는 자입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나 제가 누군가가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듣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게 될 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인데그 때부터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줄이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말만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자의 말은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고듣고 싶어 하는 귀한 말이 됩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동영상으로 들은 제자 한 명에게서 의미 있는 답신이 SNS로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지난 주간 말씀해 주신 주일 설교 영상 메시지 중에 고넬료와 베드로 간에 있었던 사도행전 10:25-26절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너무 큰 은혜에 직면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이 구절에서 설교한 전인격적 관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말씀은 평생 잊지 못할 메시지가 될 것 같습니다저 또한 그런 관계를 맺어가는 동역자가 되겠습니다.

 

2) 야훼 하나님은 반드시 나와 소통하신다는 은혜입니다.

 

본문 1-3절을 다시 음미하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런 뉘앙스가 풍깁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욥에 질문과 항의에 말씀하시기 위해 얼마나 벼르고 벼르셨을까?

법륜이라는 승려는 대중 매체에서 즉문즉설이라는 포맷으로 많은 대중적 인기몰이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야훼 하나님도 욥에게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뉘앙스가 보이지만 야훼 하나님의 편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즉문즉설의 모습으로 욥에게 나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끝에 현현하신 것입니다.

많은 생각 끝에 욥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런 영적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외침과 기도 그리고 간구함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감동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자녀들과 소통하시는 분이십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제 이사야의 대언을 또 하나 소개합니다.

이사야 55:6-7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야훼 하나님은 나와 단절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소통하고 싶어 하십니다.

심지어는 내가 악한 생각을 하거나 불의한 길에 있으면 돌이켜서 당신과 소통하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단절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소통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말하면 대답할 준비를 갖추어라그러려면 허리띠를 동여야 할 것이다.

명심합시다.

하나님은 나와 교제하시기 위해 스탠바이하고 계십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오프라 윈프라라고 불리는 조니 램이 쓴 남김없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읽다가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조니 램에게 선한 신앙의 영향력을 끼친 그녀의 할아버지가 성경 말씀을 들려주실 때마다 하셨던 말씀이 이랬다고 그녀는 간증합니다.

조니야하나님을 떠나 도망치려면 네가 하나님의 손을 놓아야 할 게다왜냐하면 하나님은 네 손을 한 시도 놓지 않으실 테니 말이다.” (조니 램, “남김없이 내려놓음”, 바이탈북스, 2008)

그녀는 평생 이 말씀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누군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언제나 말씀하시는 주군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을 극도로 줄여 꼭 해야만 하는 말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임을 명심하고 그 분과 늘 소통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