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9:23-29
제목: 당신은 누구입니까?
누군가에 의해서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보람 된 인생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형제가 있었습니다.
둘 다 폭력적이고, 타인들을 괴롭히며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이 사망했습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형이 생각해 낸 것은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성직자의 축복 속에서 보내야겠다는 갸륵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살고 있는 목사에게 장례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폭력배의 장례를 인도해 줄 목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어느 목사를 찾아가서 협박을 했습니다.
내 동생의 장례를 인도해 주지 않으면 신상에 해로울 것이라고.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장례식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매장을 하는 예배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기에 한 형제를 묻습니다. 이 형제는 살아 있는 동안 어떤 한 사람에 비하면 성자였습니다. 이 정도 인생이면 그 한 사람에 비하면 성자였습니다. 여기에 오늘 묻히는 이 사람은 그의 형에 비하면 성자 중의 성자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의미를 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그의 인생이 어떤 삶이었는가를 장례식장에서 판단 받을 것입니다.
정말로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장례식장에서 여러분을 조문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선한 기억과 추억으로 회상되는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은 길게는 주전 950 년경(J 문서)에 짧게는 450년(P 문서) 즈음에 편집된 문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전부터 멸망을 당한 이후의 시대적 상황을 배제하고는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정황이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에 소돔과 고모라 담론도 편집되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 담론에 대해 편집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주어진 민족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를 견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단호한 메시지를 이 담론에 포함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23-24절 본문은 중요합니다.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해가 돋을 때 롯은 소알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와 맞물려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소나기처럼 내리셨다고 편집자는 기록합니다.
고든 웬함이라는 신학자는 23-24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구절은 통사론(syntax)적인 기록이다. 다시 말해 롯이 소알에 들어가는 것과 해가 돋는 것, 그리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는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든 웬함, “WBC 주석-창세기”, 155.)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두 사건의 주체적인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이 롯의 소알 도착, 그리고 소돔의 멸망이라는 것을 부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일을 편집자가 강조했을까요?
이 두 가지의 일하심이 철저히 아브라함 때문이었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롯이 지지부진한 지체, 이로 인한 하나님의 강제적 이거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임을 다시 재확인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중보로 인해 동시에 일어난 구원 사건과 멸망 사건의 과정을 조금만 더 나누어 보십시다.
25-28절입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던 일들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등장합니다.
롯의 가족들에게 경고했던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롯의 처가 불순종함으로 일어난 심판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증언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엎으셨다’고 번역한 히브리어 ‘하파크’의 신학적 의미는 13;10절의 역전을 보여줍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세속적으로 창대하고 행복하게 보였던 소돔의 허무함과 신기루와 같은 찰나적 쾌락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갈아엎으심은 소돔 사건을 읽는 독자들에게 여지없는 경성함을 재촉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중에 가장 중요하고 귀히 여겨야 할 29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이미 27절에서 아브라함도 소돔의 멸망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을 읽었습니다.
더불어 창세기 기자는 본문을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선명한 교훈을 남겨놓았습니다.
롯의 구원 사건이 철저하게 아브라함 때문임을.
롯이 징글맞게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하는 것에 대해 미적거릴 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롯을 강제로 구원하신 이유가 롯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임을.
27절의 문구 중에 설교자인 저를 강하게 은혜로 이끈 단어가 있습니다.
‘생각하사’입니다.
히브리어 ‘자카르’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인용했던 창세기 구절은 8:1절이었습니다.
창세기 8: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지 150일이 되는 날을 창세기 기자가 이렇게 엽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어서 물이 줄어들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준비한 양식은 제한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와 식솔들이 방주 안에서 버틸 수 있는 시기 역시 제한적입니다.
이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150일이 되는 날부터 바람을 동원하여 물이 빠지게 하셨다고 창세기 8장은 보고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동원하신 단어가 바로 ‘자카르’ 즉 ‘기억하사’입니다.
노아를 기억한 것도, 아브라함을 생각한 것도 모두가 다 ‘자카르’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카르’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자카르’했기에 그 결과물이 롯의 구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송병현 교수는 이렇게 ‘자카르’에 대해 사족을 남겼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자카르는 곧 은총을 베푼다는 의미를 지녔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359.)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26절을 읽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우리는 롯의 아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 상당수는 롯의 아내가 소돔 출신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기에 소돔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커서 뒤를 돌아보았다고 연계해 해석합니다.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불순종한 여인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해석을 하는 학자들은 그녀의 이름을 창세기 기자가 밝히지 않은 이유를 불명예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00%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생각해 볼 여지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심의 현장에서 내 보내셨다는 29절 본문과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26절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오늘 설교의 레마를 정리하면서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 당신은 누구입니까?
29절의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26절의 익명의 여인입니까?
다시 한 번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장례식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억에 남고 싶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롯의 처처럼 이름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욥기 42:7-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기 42장의 반전은 정말로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욥에게 찾아와서 집요하게 욥을 인과응보의 교리적 해석으로 괴롭히던 그의 친구 세 사람, 엘리바스, 빌닷, 소발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두 번에 걸쳐 반복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답하겠습니다.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이 옳다고 판정승을 내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판정승을 내리셨습니까?
친구들과 욥의 지루한 변론을 듣고 계셨고 결국 그 변론의 승자로 욥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의 교훈으로 적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욥의 말에 대해 ‘자카르’하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승리는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다음의 수사어구로 표현된 사람이 누구일까요?
BC. 와 AD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
품위라고는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고귀한 삶을 산 사람
사랑 때문에 분노한, 이율배반적인 긍휼의 사람
여자의 마음을 안 완벽한 남자
세상의 교육을 바꾼 목수
스스로 노예의 수건을 두른 윗사람
황제의 세계를 허문 식민지인
원수를 이웃으로 삼은 용서의 사람
인간은 누구나 위선자임을 일깨워준 철학자
열두 명으로 세상을 영원히 바꿔 논 사람
결혼에 신성을 부여한 독신남
온 세상에 영감을 불어넣은 유대인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 유대인의 왕
무덤과 사망과 지옥 속에 누운 하나님의 아들
약속대로 죽음을 이기고 돌아온 그리스도
멘로파크 장로교회 담임목사인 존 오트버그는 이 사람을 이렇게 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 오트버그가 이렇게 답을 냈을까요?
그 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동의할 것을 확신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가장 하나님께 완벽하게 기억되신 분은 재론의 여지없이 예수님이십니다.
본문 29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곱씹고 곱씹어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해지는 구절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편집자는 이 아브라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주인공은 구원받은 롯이 아니라 그를 구원하는 데 일등공신인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을 기억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욕심을 내 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카르’하는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