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6:1-6
제목: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라
오늘 본문 배경을 먼저 살피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걸린 10년이라는 세월을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75세에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은 10년이 지났지만 용도 폐기처분이 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었습니다.
85세가 되는 해에 다시 한 번 오셔서 10년 전의 약속을 재확인까지 하셨음을 지난 15장 강해를 통해 상세히 살폈습니다.
본문 16장은 그렇게 후사를 주실 것을 아브람에게 재 확인까지 해 주신 언약 체결뒤에 이어지는 기사라서 조금은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 구절을 접하면서 먼저 우리 교우들이 주목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갖고 있었던 선입견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접할때마다 이렇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사에 대한 믿음이 없어 조급하게 하갈을 이용하여 아들을 낳으려고 했던 불신앙이 아브람과 사라 둘 모두에게 있었다고 이미 결론을 맺어버리는 해석 말입니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묵과해 버리는 아쉬움이 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남신학대학원 오택현 교수의 주석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브람의 실수는 무엇일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신앙의 합리화다. 그는 앞서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다메섹 엘리에셀 대신 아브람을 통해 낳은 자식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셨지 사래를 통해 낳을 자식이 반드시 후사가 될 것이라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 불임이 빈번한 고대 사회의 규율대로 아내의 몸종을 통해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오택현,”창세기-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 대한기독교서회”,pp,131-132.)
오택현 교수의 주석을 제가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인 이유는 아브람과 사라의 실수가 분명히 정의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 두 사람의 평가는 신앙부족이라기보다는 신앙의 합리화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적확합니다.
신앙의 합리화가 무서운 이유는 그 결과가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선 인간적인 생각이 신앙의 합리화입니다.
예언서 학개 1:2절을 소개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시대적 정황을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학개는 주전 520년경에 예언을 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전 520년경이라는 시대적 연표는 독자인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가늠하게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처럼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 시기가 주전 587-586년입니다.
주전 605년에 발생한 첫 번째 바벨론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전쟁 때문에 많은 귀족과 인재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597년의 전쟁으로 인해 80% 이상이 점령을 당하고 결국 10년 뒤인 587년에 솔로몬 성전은 초토화되고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아 있었던 수많은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상태로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라도 없고 성전도 없었던 바벨론으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은 다만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이토록 처절한 상태에 있었던 남 유다를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전 538년 바사의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바벨론을 정복한 뒤에 바벨론에 있었던 유다 백성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자원하는 자 42,360명을 제 1차로 귀국하게 합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귀국을 통해 약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자들은 귀국을 하자마자 그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성전 재건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렇게 약 2년 동안 그들의 마음은 비록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기는 하지만 제 2 성전을 재건하는 꿈에 부풀어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뒤에 그곳에 들어와 살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바사의 고레스에게 성전 건축의 부당성과 유익하지 않음을 상소합니다.
에스라 4:5-6절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이었던 예루살렘에 들어와 고군분투하는 데 또 다른 복병이 생긴 것입니다.
고레스는 성전 재건 중단을 명령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심신이 많이 지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536년부터 성전 재건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무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짚고 넘어 가야 합니다.
성전 재건 중단은 타의적인 요소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제 2성전 재건을 위해 귀환한 백성들이 노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성전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하여 은밀하고 암묵적인 동의를 하였다는 점입니다.
무척이나 힘들고 부담되는 사역이었던 제 2 성전 건축, 타의의 강요와 압박에 의해 중단된 사태를 보면서 내면적인 쾌재를 불렀다는 점입니다.
대놓고 지지를 말할 수 없었던 포로 공동체는 이렇게 그럴 듯 하게 포장했습니다.
읽어드린 학개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이 소위가 나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의 자기 합리화라는 아주 질 나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학개 예언자가 이렇게 경종한 것을 학개 1:4-6절에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5절에 기록되어 있는 너희 ‘행위를 살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르케헴’은 원래의 의미가 ‘길’(way)을 의미합니다.
예언자 학개가 ‘다르케헴’이라는 단어를 동원한 이유는 아마도 지금 성전 건축 중단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그들의 소위가 너무 악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학개는 그들에게 신앙의 길을 깊이 성찰하고 깨달으라는 권면과 더불어 경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합리화는 신앙의 부족함보다 더 질이 좋지 않은 행태입니다.
고의성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사래는 남편에게 여종을 주면서 후사를 이을 것을 종용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사래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라고 합리화한 셈입니다.
아브람도 도진개진입니다.
하갈에게 들어가 후사를 얻는 일이 꼭 사래의 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탄생의 방법일 수 있다고 미리 앞서 나간 합리화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신앙의 합리화가 무서운 점은 자기 편리주의와 자기 주관주의의 합성품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이 관철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인정하심에도 우리는 내 방식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 것이라고 임의의 주관적 판단으로 합리화하는 불신앙을 자행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길르앗 라못을 아람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고자 아합과 연합군 결성를 제의합니다.
아합 역시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여호사밧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연합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인 여호사밧이 이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아합에게 제의를 했는데 북쪽은 이미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예언자가 거의 전무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북쪽의 궁정 예언자였던 가짜 예언자 시드기야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습니다.
그러자 시드기야가 대답한 내용이 열왕기상 22:11-12절에 있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영적으로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었던 시드기야의 진면모가 보이는 구절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철뿔은 종교적인 부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치명타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 만들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은 자기 중심적인 모드를 하나님 중심의 모드로 전환하는 작업입니다.
신앙의 과정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자기를 위한 모드를 버리지 않는 자들은 자기합리화라는 그릇된 종교성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포도가 신포도일 것이라고 합리화했던 여우와 같은 신앙이 바로 자기 합리화신앙 모드입니다.
아브람과 사라의 결정은 지극히 자기들을 위한 자기합리화의 결정체였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기 합리화로 포장된 신앙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옵니다.
본문 5-6절을 읽겠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이 구절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벌이는 죄의 전가가 생각납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 넘기며 전가하는 그 장면이 오롯이 떠오릅니다.
적반하장이 보입니다.
사래는 본인이 허락한 것에 대한 결과가 나타나자 그 결과의 책임을 남편에게 돌렸습니다.
남편인 아브람은 사래, 하갈 등의 공동의 연합으로 이스마엘이 탄생했음에도 자신의 책임을 하갈에게 돌리려는 듯한 인상으로 사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갈 역시 득남을 기회로 삼아 교만해졌습니다.
자기 합리화라는 최악의 신앙적 추락의 결과는 이처럼 모두가 불행해 지는 결과물을 낳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자기합리화는 민족 분열의 원인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오늘 21세기에도 양극단의 종교가 어르렁거리게 만든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해를 통해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시 한 번 각인해야 하는 은혜는 자기 합리화라는 무기가 신앙의 차원에서 이용될 때 가공할만한 파괴와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제 멋대로 사는 것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막 나갈 수는 없고 교묘하게 포장하여 손해보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신자들의 자기 합리화의 함정은 어떤 의미로 접근하면 더 하나님 앞에서 질이 안 좋은 영적 행위임을 절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김기석 목사의 갈파는 많은 울림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조율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치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김기석,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 비아토르,p,31.)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자기 합리화는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는 월권임을 명심하고 겸손하게 나를 성찰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실천하기 위해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