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5:1-5
제목: 엘리에셀입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에게 주님이 허락하신 복 중에 하나를 뽑는다면 그것은 부교역자의 복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부교역자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담임목사에게는 복입니다.
제게 이런 복이 있었습니다.
강지숙 목사입니다.
함께 동역하던 시간, 모든 사역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부교역자였습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동역하면서 얻어진 결과물이었습니다.
담임목사의 신용카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부교역자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이어진다는 것은 신뢰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관계가 파괴된다는 것은 신뢰가 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할 정도로 감탄하게 하는 관계를 발견합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출하는 대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가나안 땅에서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섰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환상이 임했습니다.
그 환상은 말씀으로 임했습니다.
환상의 내용이 본문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알-티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창세기 12장의 약속을 끌어올리는 듯한 격려를 하십니다.
“나는 너의 방패다. 나는 너의 상급이다.”
이 정도의 격려요 응원이라면 아브람은 대단히 기뻐해야 하는데 2절 본문은 예상 밖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전반절에 기록된 아브람의 답은 탄식이자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대한 불평으로 보이는 반항의 토로입니다.
공동번역은 2절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말씀 드렸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 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문맥을 읽기에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 대단히 불만이 있어 보이는 아브람의 탄식입니다.
저는 나름 아브람의 이런 자조 섞인 토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2:1-3절을 복기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에게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롯과 결별하고 헤브론의 척박한 땅에서 거하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오셔서 13:15-16절에서 재확인을 하시기까지 했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려면 뭔가 아브람에게 그 증표가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조금도 그 증표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반문한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읽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이 구절을 이번에는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브람은 정당하게 하나님께 항의한 것같이 보이는 토로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의 반문에 다시 한 번 반색하는 답변을 내놓으십니다.
4-5절 본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의 행동을 보면 여전히 단호하고 명확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초지일관이 4-5절에서 또 발견됩니다.
조금도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에 있는 뭇별들을 보여주십니다.
이후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쐐기를 박으십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를 너무 잘 알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이루어짐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에셀이 아니라 이삭이 아브람의 상속자가 됨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 더 확실하게 강화하시기 위해 그 유명한 일방계약을 맺으시는 기사인 6-11절의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수요 예배 설교는 본문 5절까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조금은 다른 스펙트럼의 메시지를 교훈으로 삼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상속자로 엘리에셀을 낙점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전 2000년 중반 즈음에 제작된 누지(Nuzi) 토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고대 근동의 법은 대체적으로 주인의 재산을 상속함에 있어서 자식이 아닌 자에게 상속하는 일련의 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법적인 조항을 전제할 때, 아브람의 몸종이었던 엘리에셀 역시 아브람의 후사 즉 상속자가 되는 것은 불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누지 문서에 보면 이런 예외 조항들이 들어 있습니다.
“누지 문서에서 발견된 내용들 중에 성서와 관련된 풍습들은 형사취수제도, 장자권 매매제도, 장자 상속권, 드라빔의 제도가 나와 있고 양자 제도도 그 중에 하나이다. 누지 문서에서는 아내가 후사를 낳을 수 없을 때, 아내의 몸종을 통해서 후사를 얻거나, 자신의 몸종에서 양자를 삼는 것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택현,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주석-창세기”,pp,120-121.)
누지 문서는 아브람의 시기가 맞물리는 주전 2000-1500년경에 티그리스 강 주변에 꽃피운 문명에서 만들어진 문서입니다.
그렇다면 고향 근처에서 만들어진 이 누지 문서는 아브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내 사라의 상황을 이해하고 몸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계획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16장을 강해할 때 살피게 될 사라의 몸종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 역시 누지 문서에 의거한다면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람의 몸종이었습니다.
후에 살피게 될 창세기 24:2절을 미리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나이 40세 되는 해에 결혼을 시키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때는 아내 사라도 사망한지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시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가 140세가 되어 노쇠하기 그지없었던 때였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은 아들에게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자기가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의 딸과는 혼례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해서 늙은 종을 부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늙은 종을 엘리에셀이라고 해석하는데 큰 이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불러 자기의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게 하고 그와 언약을 맺습니다.
가나안의 딸이 아니라 아브람의 고향 땅인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는 여성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엘리에셀이 주인에게 약조하는 장면이 창세기 24: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만날 때마다 무언가 언어만으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한 뜨거움이 용솟음칩니다.
고대 근동에서 종의 무게는 없습니다.
어찌 보면 재산의 일부입니다.
종에게 인권을 말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종은 그냥 상품이요, 물건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본문에 적용해 보십시다.
이렇게 무게감이라고는 없었던 종이 바로 엘리에셀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늙은 종 엘리에셀은 아브람과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삶을 걸었다고 보기에 그에게 며느릿감을 구해오라는 아브람의 명령은 백번 천번을 양보하면 동의할 수 있습니다.
헌데 문제는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나이, 당시의 수명으로 볼 때 그리 늙은 나이가 아닙니다.
당연한 추론이겠지만 엘리에셀의 나이도 젊었을 때였습니다.
젊은 나이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어설플 수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범한다고 지적 받을 수 있습니다.
실수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았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관계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 흔들리지 않는 신뢰입니다.
아브람은 엘리에셀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엘리에셀도 아브람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쌍방 간의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두 사람을 결속시켰습니다.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되는 몸종을 상속자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람이 그만큼 엘리에셀을 신뢰했다는 말이 됩니다.
본문도 감동이지만 앞서 소개했던 창세기 24장의 장면은 압권입니다.
창세기 24장은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찾아오라는 주인 아브람의 하명입니다.
이 명령을 받은 엘리에셀의 주변 정황을 반추해 보십시다.
아브람의 모든 물질을 차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삭 때문에 날아갔습니다.
이삭은 어떤 의미로 보면 엘리에셀에게는 아주 기분 나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4장의 성서적 정황을 두루 살피면 그런 분위기는 1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두 사람의 더 진한 신뢰의 감동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어떻게 이 감동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강조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세밀한 은혜 때문에 큰 감동에 젖을 때가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메시지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자 매국노로 몰렸고, 궁정 대신이나 예언자들에게 밉상이 되었습니다.
기득권자들에게 미운털이 된 예레미야는 아니나 다를까 왕의 아들인 말기야가 정적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이 구덩이는 정치적인 범죄자들을 익사하게 만드는 형법의 장소였습니다.
우기 때에 비가 내리면 물이 차서 그 웅덩이에 빠진 자는 영락없이 수장되어 죽는 장소였는데 바로 그곳에 예레미야를 정적들이 던져 넣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밀하신 일하심이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누구도 예레미야를 거들 떠 보지 않던 그 절박한 상황에 구스 출신의 내시였던 비주류 에벳멜렉을 사용하십니다.
에벳멜렉을 왕 시드기야에게 보내 지금 구덩이에 예레미야를 던져 넣은 것은 아주 사악한 행위임을 지적합니다.
목을 건 행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드기야의 마음을 움직여서 에벳멜렉에게 30명의 동역자를 붙여줍니다.
그에게 예레미야를 구출하라고 하명합니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은혜이며 일하심입니다.
왕의 하명을 받은 에벳멜렉은 왕궁의 한 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헝겊과 헤어지고 찢어진 낡은 옷들을 모두 챙겨 말기야의 구덩이로 갑니다.
그곳에서 헝겊과 옷가지를 찢어 잇습니다.
그런 뒤에 그 줄을 예레미야에게 달아 내립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소리를 칩니다.
예레미야 38:12-13절을 읽겠습니다.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정말로 큰 감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헝겊과 찢어진 옷가지로 만든 줄을 예레미야에게 자신의 몸에 묶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희철 목사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밧줄로 구원선(救援線)을 만들면 이미 기력이 다 빠져 나간 예레미야가 밧줄을 놓치게 되어 구원 과정에서 사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아예 예레미야가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묶음의 방법을 동원하셨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p,271.)
이게 어디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세밀한 일하심이겠습니까?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나를 위해 동일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묻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수도 없이 떠났고, 버렸고, 등을 돌렸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이어짐은 신뢰로 가능합니다.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엘리에셀이 아브람을 향하여 서로 견고하게 신뢰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을 맡기실만한 신실한 존재입니까?
이 찬양의 가사가 여러분의 신앙고백입니까?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이 가사도 동일한 신앙고백이십니까?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