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1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11) 제목: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본문: 요한복음 2:1-11 서론) 오늘 본문을 설교할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고전적인 촌철살인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사학인 케임브릿지 대학교 종교학 시험시간에 담당 교수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에 대해서 논술하라. 그러자 기독교 신앙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거의 대부분은 학점을 받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답을 썼는데 한 학생은 아예 답을 쓸 기미가 보이지를 않아 유급될 것을 경고하며 무언가를 쓸 것을 압박했습니다. 시험시간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답을 쓰지 않던 그 학생이 몇 자를 적는 모습이 들어 왔습니다. 시험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의 답지를 거두었고, 끝까지 답을 쓰지 않은 학생의 답지를 보았더니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물이 자기의 주인을 만났다. 그러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최고의 답을 쓴 이 학생의 이름은 훗날 셸리, 키츠와 함께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 한 사람이었던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었습니다. 물이 자기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빨개졌다는 답안에 오늘 본문 기적의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본론)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복음 저자가 삽입한 예수께서 행하신 7개 기적 즉 ‘세메이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입니다. (요 2:1-11) ②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기적입니다. (요 4:46-54) ③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기적입니다. (요 5:1-9) ④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입니다. (요 6:1-14) ⑤ 물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요 6:16-21) ⑥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치유하신 기적입니다. (요 9;1-12)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요 11:1-46) 예수께서 일으키신 이 7가지 기적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서울신학대학교 은사셨던 故 이상훈 박사가 저술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요한복음』을 보면 대단히 적절하게 주석했습니다. “물을 술로 변화시킨 것은 질적인 기적이고, 왕의 신하를 고친 일은 100리나 떨어진 거리의 기적인 공간의 기적이며, 베데스다 병자의 치유는 시간의 기적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양(量)의 기적이며, 물 위를 걸으신 것은 자연 법칙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의 선언이고,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소경을 고치신 기적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기적이고,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인간의 절망적 극치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기적이다.” (이상훈,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요한복음』, 대한기독교서회, 2014년, 55〜56쪽) 이 박사의 주석적인 견해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분명히 질(質)에 대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줄곧 사용하는 상투적 용어 중에 ‘사람이 바뀌었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상용어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 자체의 성비가 바뀌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연령이 바뀌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의 분량이 바뀌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의 의미는 인격의 변화 즉 그 사람의 삶이 질이 바뀌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정형외과 원장의 아내를 얼마 전에 제 허리 치료 때문에 아내가 병원에 갔다가 만났습니다. 그날, 아내가 자매를 만나 잠시 교제하고 난 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옛날에 보았던 자매의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변화된 질적인 태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내게 제게 말했습니다. “말하는 태도에서 삶이 변화된 흔적이 보였어요.” 아마도 질에 대한 변화는 신학적으로 이처럼 엄청난 변화임을 알려주기 위한 첫 번째 ‘세메이온’이 가나의 기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성분으로 질이 변화된 물이 포도주로 바뀐 가나의 기적에서 베푸신 주님의 기적 담론이 오늘 우리 독자들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말씀을 이해타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순종의 대상으로 여길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특히 두 가지의 말씀이 참 은혜가 됩니다. ① 2:5절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 구절을 잘 상고하면 은혜가 됩니다. 3절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주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식놈이 버르장머리 없게 이 어미의 말을 거역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겐 생소한 호칭이지만, 2,000년 전 헬라어 ‘귀나이’(γύναι)는 여인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일반인보다 훨씬 더 극진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 홍성사, 163쪽) 또 하나의 해석은 이재철 목사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견해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예수와 마리아 사이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본적인 문제 즉 예수가 드러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거라드, S. 슬로얀, 『현대성서주석-요한복음』, 한국장로교출판사, 79쪽)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어머니가 요청한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적 선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신중했다는 주석입니다. 어떤 주석의 의미를 선택할지는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한 의미에 대한 견해와는 상관이 없이 두 번째 주목할 구절이 주는 은혜입니다. ② 5~7절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이렇게 지시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문제의 해결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하인들에게 당부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입니다. 이 마리아의 당부가 끝나자,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6~7절에서 말씀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한 것처럼 보이는 앞 절의 정황이지만 주님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가나는 유대 지역에 있습니다. 통상 유대에 주거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에는 마당에 항아리가 있습니다. 샌들이 그들의 신발이었기에 먼지가 많은 유대 지역에서 외부 활동을 하면 언제나 발을 씻어야 하는 물이 마당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혼인 잔치가 열린 가나의 집에도 항아리가 있었는데 무려 6개가 있었습니다. 한개당, 6갤런 그러니까 23리터 정도가 들어가는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었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인의 정서상 주인과 관계되어 있는 이가 예수님의 명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비어 있는 항아리에 물을 갖다가 채우는 순종을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비어 있는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는 것은 하인들의 근성으로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인은 시키는 대로 하는 계급이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인도 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8절 전반절에 있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시매”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조금 찜찜합니다. 지금 하객들은 포도주가 떨어져서 아주 기분이 나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상해 있는 이들에게 물을 떠서 갖다주라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갖다주었더니” 대단히 위험한 일로 보인 물항아리에 담긴 물을 연회가 열리는 장소로 갖다주라는 명령은 상식의 선에서 볼 때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9-10절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기적에 대한 간증을 보고함으로 가나 혼인 잔치의 막을 내립니다. 이상의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께서 보이신 첫 번째 기적 메시지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 텍스트에서 주목하고 싶은 구절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5절로 돌아가 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영어 성경의 고전인 RSV 버전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His mother said to the servants, Do whatever he tells you.” “그가 말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행하라”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행동강령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 즉 ‘다바르’는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대상임을 본문이 분명히 제시합니다. 금요일, 북콘서트 자료에 삽입한 글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주최 측에서 이런 토론 내용이 있다고 보내 주었습니다. “이 시대에 왜 사사기를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사사기 속에서 이 시대를 읽고 있는가?” 미리 준비하라는 요청입니다. 자료를 준비하다가 1권을 쓸 때 에필로그에 담은 글로 대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겠습니다. “몇 년 전, 종교철학자인 박일준의 글을 만났다. 그는 유발 하라리가 말한 ‘신성(Divinity)’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제했다. “영원한 행복과 불멸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실상 자신들의 신들(gods)로 향상시키고자 한다. 이를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되는 일로 표현한다. (중략) 결국 우리의 기술공학이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re-engineer)하게 될 때, 지금까지 인간을 규정해 왔던 호모사피엔스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인류의 기획은 ’신성을 달성하는 것(attaining Divinity)’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을 달성하는 것’이 인류의 기획이자 마스터-플랜이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혼돈이다. 이 두려운 시대를 살면서 설교해야 하는 자들이 목사요 설교자다. 이 무시무시한 신흥 빅브라더와 맞서야 하는 설교자는 오금이 저린다. 매주, 매일 설교라는 명목을 갖고 신성을 달성하려는 능력자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고통은 형용 불가다. 이 시대에 목회자로 사는 한, 해야 하는 싸움이 설교인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필자는 나름 청중들에게 원칙을 갖고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말씀에 대한 정직성이다. 적어도 사사기는 이 도전의 시금석으로 작용했다. 성경 해석의 정직성, 캐리그마적인 선포의 정직성, 그리고 해석된 말씀을 적용하는 일련의 정직성까지 주일 예배 설교라는 도구를 통해 사사기에 접근했다. 그리고 얻은 뜻밖의 수확이 있다. ‘기술 공학’을 통하여 인간 마음을 ‘재-설계’하려는 신성 달성에 저항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다바르’(말씀)을 정직하게 피조물인 전체에게 선포하여 재-설계하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은 사사기 1』, 동연, 20-21쪽) 제가 밝힌 대로 작금에 일어나는 재앙은 인간이 개발해 낸 기술 공학이 하나님이 되어 버린 것을 용인하는 재앙입니다. 기술 공학이 곧 데우스가 되었다는 선언에 모두가 아멘 하는 신흥 종교의 시대가 되었다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의 시대에 나타나는 두렵고 떨리는 공격은 말씀 즉 ‘다바르’에 대한 무시와 거부입니다. 속절없이 당하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본문에서 증언한 대로 하나님이 선포하신 예수의 말씀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순종하라고 권한 무게는 기술 공학의 재앙을 압도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이 무엇이 되었든지 행해야 하는 순종의 대상이지, 기술공학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분석의 대상이 아님을 본문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재단하면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종이 이적보다 낫다.” 본문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강조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갖다가 주라고 명했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강조하는 본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기적을 만들었고 그 순종이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본문이 오늘 텍스트임을 명심하고 말씀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임을 잊지 않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제가 참 좋아했던 故 박완서 선생께서 쓰신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에서 소개했던 글말을 한 번 더 읽고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합니다. “숙명여고 2학년 시절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셨다.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무엇이 필요한지 아니?’ ‘포도, 설탕, 소주, 항아리요.’라고 대답을 하면 선생님께서는 '또?'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도주는 포도를 땅에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임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단다.’라고 하셨다.”(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67쪽) 제가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패러디하곤 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포도, 설탕, 소주, 항아리, 시간도 아니다.반드시 필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다바르’ 즉 말씀이라면 분석하지 마십시오. 그냥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의 여정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순종을 통해 ‘세메이온’ 즉 ‘기적’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라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 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기도 제목 ①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재단하지 않으며 계산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②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이 흥왕하여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게 하옵소서. ③ 9월 사역이 승리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