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9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3:15-22 제목: 병행이 정답입니다. 서론)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과 성품이 있습니다. 조금 다른 각도로 표현한다면 기질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질은 좀처럼 고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가리켜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의 급한 성격을 빗댄 말일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안드레는 어땠습니까? 상당히 진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님이 베푸실 때 빌립은 예수께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원한다고 지적한 반면, 안드레는 벳세다에 진치고 있는 수많은 군중들에게로 들어가 일일이 기적을 이루실 재료들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다혈직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와 신중했던 안드레가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같은 배 안에서 태어난 형제인데도 이렇게 성향과 기질은 다를 수 있으니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다른 성향의 두 사람 모두를 다 당신의 제자로 인(引)쳤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도 쓰셨고, 저 사람도 쓰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단어 중에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면 ‘어떤 일이나 현상이 끝까지 진행되어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를 주는 단어가 아닙니다. 항상 이 단어의 의미는 부정적입니다. 정치인들에게 흔히 좋은 예를 보이는 단어가 극단입니다. ‘수구 꼴통’이라는 아주 나쁜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뜻입니까? 극단적인 보수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자들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대화 불가능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와 맞상대를 할 정도로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을 통칭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강남 좌빨’들입니다. 이번에 경질된 청와대 관계자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위선적인 극단적 진보주의자들 역시 대화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이 두 단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에는 공존하고 아픕니다. 교회 안의 용어로 들어가 보십시다. 어느 시사 토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패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 십일조를 반대하는 단체에 속한 자였습니다. “교회가 성경에도 없는 십일조를 가르쳐서 도둑질을 하고 있다.”가 그의 열변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일 정도의 강경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경우를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떼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도적놈입니다. 말라기 3:10절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아주 보수적인 교단의 한 목회자의 설교였습니다. 여기도 타협점은 0%로 보였습니다. 재미있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교롭게 두 사람의 의견을 한 데 뭉쳐놓으면 십일조를 해도 도둑놈이고, 안 해도 도둑놈이 된다는 결론 말입니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극단은 신앙인이 경계해야 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23절에서 주님도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혹시 오늘 설교 제목처럼 들리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병행이 정답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제목을 증명해 내는 설교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해서 존 스토트목사도 19-20절은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정평이 난 구절(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강해”, p,109)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오늘 본문 해석은 설교자인 저에게도 적지 않게 곤혹스러운 텍스트였습니다. 강해 설교의 단점 중에 하나가 본문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 해석은 저에게도 정말로 힘이 들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헬라어로 기록된 본문을 거의 직역한 수준이기에 우리의 언어적, 문화적 토대로 해석할 때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기에 본문 이해를 위해 성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나를 고민하다고 주석을 빌리기 전에 그나마 우리말로 소통하기가 쉽게 번역한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을 그대로 먼저 읽어주는 것이 좋을 듯해서 고스란히 인용해 보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사람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언약된 유언을 작성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파기하거나 거기에 다른 것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 자,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그의 가족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켜 ‘너의 가족에게’라고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메시야를 뜻합니다. 내 말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된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 약속을 훼손하거나 무효화하여 폐기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유업이 율법이 통해 왔다면, 그것은 더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율법이 약속을 받은 그 가족이 올 때까지, 범죄 때문에 붙여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한 중재자의 손에, 천사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중재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었다면, 언약의 신분은 실로 율법에 의해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의 권능 아래 가두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해 오는 약속을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갈라디아서 강해”,pp,62-63)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으로 글을 읽다가 본문이 개역개정판보다는 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해서 조그만 더 부연해서 본문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땅에 살다가 때가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유언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유족을 불러서 고인의 유언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사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고인의 유언을 유족들 개개인의 뜻에 맞지 않는 유언이라고 해서 뜯어 고치거나 무언가의 내용을 삽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인의 뜻을 저버리는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율법 교사들에게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면서 본문을 전개한 것입니다. 율법 교사들인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유언과도 같은 것을 너희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뜯어고치려고 한다는 질타를 말입니다. 본문 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에서 이해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약속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입니다.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2:1-2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를 이끌어내면 이 복이 아브라함에 임한 것임을 말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임한 복이 단순히 하나님이 명령하신 장소로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어진 복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창세기 15:6절을 소개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렇습니다. 분명히 창세기기자도 밝힙니다. 아브라함 여호와를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복의 근거는 율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근거한 것임을. 해서 바울은 지난 설교에서 살핀 것처럼 갈라디아서 3:14절에서 지금 유언을 변질시키려는 예루살렘에 내려오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쐐기를 박는 듯한 선포를 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게 하는 것인데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 복이라는 약속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아브라함의 복을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확대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약속은 앞에서 말한 변질되게 하면 안 되는 유언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던 이방인들에게까지 아브라함의 복이 언급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대인들이 유언장을 조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울은 본문에서 강한 표현으로 그 다음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언급한 뒤에 16절에서 아주 특별한 단어를 인용합니다. ‘그 자손’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 설교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단서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이어지는 대상을 ‘그 자손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그 자손’이라고 단수로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 기록된 ‘그 자손’이라는 단어는 메시아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복은 후대에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편입된 자에게 임하는 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속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핀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에 기록된 대로 바울은 그런 망언을 입에 담지 말라고 율법주의자들을 몰아 세웠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임한 복은 아브라함에 속한 자가 받는 복이 아니라 그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편입된 자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편입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가능한 것이기에 이방인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도 율법이 없었던 시기에 존재했기에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논리가 바울의 주장이자 논리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유대인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궤변으로 도저히 바울의 말을 수용할 수 없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소리로 들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있는 율법 무용론처럼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미리 짐작한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논리를 한층 강화합니다. 본문 17-20절에 연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공동번역 성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맺어주신 계약이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이 생겼다 해서 소멸되거나 그 약속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법을 근거로 해서 상속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벌써 약속된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상속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잘라 17-20절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받게 해 주는 기능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함을 알게 해 주는 기능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자문하고 이렇게 자답합니다.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기막히게 논리 정연했습니다. 조금도 유대인들에게 틈을 주지 않은 바울은 오늘 본문을 마무리하는 21-22절에서 언 해피엔딩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아량까지 보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저는 이 구절의 해석을 오늘 설교 제목을 만든 텍스트로 여겼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대 명제와 대치되는 것인가? 바울의 말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받게 하는 요소가 아니지만 나의 죗성을 깨닫게 함으로서 구원의 요소인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영적인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믿음은 배치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참 쉽지 않은 본문 이해를 교우들이 어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가 가지고 역량을 다해 해석했습니다.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부족한 부분은 성령께 그 이해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우리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오늘의 은혜를 접목하겠습니다. ※ 신앙의 극단주의는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23절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 기사는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과 관련하여 함께 나누신 담화를 기록한 글입니다.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누가복음 18:18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관리가 요구한 것은 영생을 얻는 법이었습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에 ‘영생’은 ‘zwh;n aijwvnion’ (조엔 아이오니온)의 번역입니다. 풀이하자면 말 그대로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에 기록된 ‘조에’라는 단어입니다. 이 ‘조에’를 얻으려면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제입니까? 이 ‘조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갈라디아서에 적용한다면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을 얻는 자의 필수적인 조건은 공부한 대로 믿음이요 은혜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 누가복음 18:20절에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유대 부자 청년이자 관리로 추측되는 이 사람에게 주님이 먼저 확인하신 것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수여하신 율법에 대하여 준수하고 있음에 확인이었습니다. 주님도 이 관리가 나름 율법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삐를 놓지 않으시고 이 관리에게 다그친 것이 보입니다. 누가복음 18: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계속해서 주님이 요구하신 메시지는 부족한 율법 준수,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주님은 영생의 조건으로 행함을 요구하셨는가? 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기사의 팩트가 무엇일까요? 율법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죄에 대한 연약성을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 주님은 나름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청년의 신앙을 정리하여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8:21절에 대한 경계를 새롭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주님은 이것도 물으셨고, 저것도 요구하셨습니다. 골탕을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이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님만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빈틈없는 공격을 가했지만 그렇다고 극단의 빠지지 않는 감동적인 멘트를 21절 전반절에서 남깁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이 무용하다는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힙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선포했던 것처럼 율법은 존재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율법이 있음으로 범법의 사실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율법의 조명으로 날마다 민감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는 율법을 지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면 된다는 행위 구원론의 유혹을 느낄 때마다 뼈저리게 그럴 수 없음을 또한 율법을 통해 깨달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값없이 받는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느 한쪽으로 나를 강제하면 경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는 이제 지난주간에 있었던 한 경험담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모 지인이 저에게 SNS에 청원 부탁을 하나 올렸습니다. 내용인 즉은 ‘낙태죄 폐지에 대한 반대 서명’지를 교우들에게 받아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세간에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낙태죄에 대한 기독교적인 주류의 색깔은 당연히 폐지반대입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교인들을 설득해서 서명지를 받아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정중하게 반대했습니다. ⓵ 무례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무언가를 요청하려면 그 요청에 대한 사안을 정중하게 찾아와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협조를 부탁하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헌데 당사자는 저에게 일언반구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SNS 상에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을 달랑 하나 남겨 놓고 서명지를 어느 장소로 갖다가 달라는 무례함이 저를 분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⓶ 낙태죄는 기존의 주류 교단에서 반대하니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의 인권도 존중하는 목사입니다.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을 무기삼아 낙태를 살인이라고 몰아붙여 여성들의 최소한의 인권을 짓밟는 행위에 대해서 충분한 사회적 협의와 의견 개진을 통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전형적인 교권주의라는 극단이기에 거절했습니다.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지체장애 1급에 해당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굴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에, 로스쿨을 졸업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서 뛰는 김원영 변호사는 본인의 저서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때 가능하다. 무엇이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인 형태로는 그와 같은 스타일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pp,124-125)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극단주의는 무엇이 아니야! 라고 강제하며 윽박지릅니다. 그것은 양극단 모두가 그렇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신앙의 양극단은 한쪽을 선택하라고 압박합니다. 소위 말해 줄 잘 서라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신앙입니까? 경계해야 합니다.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극단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로 삼아야 할 파트너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더 경계해야 합니다.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또 다른 극단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나는 율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교만함은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율법은 나를 은혜로 이끄는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믿음은 병행해야 관계이지 유리해야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과 믿음은 병행이 정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