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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10월 6일 주일 설교 (요한이서 첫 번째 강해) :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2024-10-05 13:45
작성자 Level 10

2024106일 주일 설교 (요한이서 첫 번째 강해)

 

제목: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본문: 요한이서 1:1-3

 

서론)

 

대구 성서 아카데미 원장으로 있는 정용섭 목사가 본인의 책에서 이런 갈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는 유효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이 보입니다.” (정용섭, 마가복음을 읽는다Ⅰ』, 홍성사, 99)

어제 새벽예배 시간에 호세아 4장을 묵상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던 여로보암 세 시기에 북쪽 왕국에 없었던 것을 호세아는 고발합니다.

호세아 4: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 구절에서 지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아트’ (דַּ֥עַת)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성, 지혜의 총체적 상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어제 아내와 밤을 깠습니다.

권사님이 사랑으로 가져다주신 자연산 밤송이를 삶은 아내가 제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좀처럼 제게 자기 일을 떠넘기지 않는 아내가 어떤 일을 제게 요청하면 그건 자기 힘이 달린다는 말이기에 더 센 카운터펀치를 맞기 전에 알아서 순종해야 합니다.

아내의 일을 돕다가 밤 껍데기를 벗겨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제게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삶기 전에 밤송이 위에 칼집을 냈으니까 그걸 결대로 벗겨내면 일을 쉬워요.”

아내의 말대로 작게 낸 칼집에 도구를 갖고 껍질을 벗기니 껍데기 제거가 한결 수월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정답입니다.

 

본론)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공생애 초기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있었고, 그가 예수님을 보고 발작을 합니다.

누가복음 4:34절을 소개합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의 영적 카운터파트인 귀신이 예수를 만나자, 겁에 질려 반응한 것입니다.

어떤 측면으로 해석하면 미리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주님은 귀신의 선제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축귀 사역을 행하십니다.

누가복음 4:35절입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주님이 완벽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이 승리를 본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자들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4:36)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축귀의 말씀을 듣도 보도 못했던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놀라운 일을 본 이들이 어떤 말씀, 어떤 권위, 어떤 능력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지적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버나움 백성들에게 일어난 인지적 확장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추론하겠습니다.

회당에서 일어난 축귀 사건임을 전제하면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합니다.

회당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즐비했을 것입니다.

15년 전,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성경적 내증으로 소개한 가버나움의 이 회당 터를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가이사랴 빌립보와 같은 대형 도시가 아닌 갈릴리 북쪽에 있는 소읍이라는 배경을 전제할 때, 남아 있는 가버나움의 회당 터는 대단히 큰 규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규모의 회당이 지방 소읍에 존재한 이유는 그 소읍이 대단히 유대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유대 종교에 흠뻑 빠져 있는 종교성이 가버나움의 특징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산헤드린 공회가 가버나움 회당에 거는 기대감이 얼마나 컸을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버나움 회당은 산헤드린 공회가 공을 들이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곳에 유력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포진시켰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유대 종교의 요새가 흔들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의 축귀 사건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반응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놀라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의 선포하심을 새로운 교훈으로 받아들였다는 전입니다.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27절을 소개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여기에 번역된 놀람을 의미하는 헬라어 헤쌈베쎄산’ (ἐθαμβήθησαν)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비될 정도로 경악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적절한 단어가 있습니다.

기절초풍하다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반응을 새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왜 가버나움에서 유대 신앙으로 무장한 자들이 예수님의 축귀 선언을 새 교훈이라고 지칭했을까요?

누가복음 4:32절입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22절입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말씀의 명령이 서기관들이 보여주었던 이론이나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동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경악할 만한 충격과 새로운 교훈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는 예수님의 레마가 유대인들에게 적용되자 그들은 드디어 예수에 대하여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에 함께 읽은 요한이서 1:13절에서 무려 세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찾아 보십시다.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어떤 단어입니까?

그렇습니다.

진리입니다.

요한이서 저자는 자신의 신분을 장로라고 자칭합니다.

흔히 우리는 장로라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나이가 많은 원로를 의미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요한이서의 저자로 자칭 된 저자의 직분인 장로’ (πρεσβύτερος)는 조금은 다른 존재입니다.

요한이서 저자는 자신을 장로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당시 저자 장로라고 하면 그리스어로 프레스비테로스라고 하는데, 요한 공동체 내부에서 원로에 해당하는 나이 든 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권면할 만한 지위에 서 있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서형석,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요한일이삼서, 대한기독교서회, 157158)

이 해석을 전제할 때, 요한이서 저자는 요한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준수하며 영지주의라는 괴물 같은 이단과 맞서 싸우는 것은 물론,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는 영성으로 리딩해야 할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서 저자 장로는 이것을 본인의 사역 철학이자, 목양의 준칙을 여겼기에 이 일을 위해 절치부심하며 사수하고 싶었던 자기의 신학적 성찰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생각한 신학적 성찰은 앞서 설명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에도 부합하는 일임을 그는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진리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랑하는 회중 여러분, 여러분의 목회자인 나는 진리 안에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저자가 요한 공동체 지체들을 사랑하는 사랑은 자연 발생적 사랑이 아님을 밝힙니다.

저자가 요한 공동체 지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진리 안에 있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더불어 더 진솔하게 다가온 울림이 있는데 이것입니다.

장로인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자들 모두가 그렇다는 선언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진리 안에 있는 나와 너가 요한 공동체 지체들을 사랑한다고 역설한 뒤에 마무리까지도 이렇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역시 진리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란다고 축복합니다.

언젠가 소그룹 모임을 통해 함께 공유하며 인사를 나누었던 멘트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그때 이렇게 인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문안합니다.”

누가 이 멘트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곱씹을 때마다 은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교훈이며 레마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확실하게 인정하고 믿을 때 이 인사를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와 그대 안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물고 계신가는 신앙 노정에 있는 우리들에게 승리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마태복음 15:25-2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께서 계신 시돈까지 찾아와 귀신 들린 딸의 치유를 요청했지만, 치욕적으로 싸늘하게 거절당했을 때, 딸의 어머니가 반응한 내용을 같이 읽었습니다.

15:25-28절까지 내용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영적 교훈이 담겨 있어 열거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지만, 단지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나누는 것을 전제할 때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보이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딸의 치유자라는 오직 한 가지 사실 말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딸의 치유를 위해서 어떤 일을 당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딸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이기에 주님에게만 올인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분만이 보인다는 것은 내가 지금 그분 안에 있다는 말과 직결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장 아메리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나치 게스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지역의 수용소에 구금되어 그 지옥 같은 수감생활을 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아 벨기에로 망명하여 작가로 독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는 수용소에 구금되었을 때 당했던 지옥 같았던 고문을 털어 놓았습니다.

롤러 쳇바퀴에 달린 쇠갈고리가 있는 그 안으로 몸이 끌려 들어가게 만든 고문에 대해 고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문의 경험은 단순한 악몽을 넘어 놀라운 인식으로 남아 있다. (중략) 그 고문으로 인해 남아 있는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100101)

엄청난 기억입니다.

저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임했던 영적 고문 역시 절멸의 수치심이라고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어떻게 이 무시무시한 영적 고문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정답은 마태복음 15:2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인지했듯이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의 수로보니게 출신입니다.

수로보니게는 영어 발음으로 시로-페니키아(Syro-Phenicia)입니다.

시로는 시리아 지역이고, 보니게는 고대 왕국이었던 페니키아의 지역을 지칭합니다.

결국, 조금도 유대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이방 지역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유대적 피가 흐르지 않는 지역 출신의 여인, 더불어 당시 신흥 종교적인 성격의 리더인 예수에게 ’(큐리오스)라는 호칭을 붙였다면 그녀는 이미,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수를 알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다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21세기는 이런저런 귀신 들림 현상에 함몰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앞서 소개한 정용섭 목사는 그래서 이 시대를 이렇게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정신은 곧 귀신 들린 이의 발작이 작동하는 시대다.” (정용섭, 앞의 책, 104)

이제 우리는 한 가지에 천착해야 합니다.

신 사사시대이자 발작 시대인, 이 시대를 뛰어넘는 유일한 방법에 천착하는 것 말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께서 요한복음 14:6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26)

또한 15:4절에서도 권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실시한 담임목사 셀 사역 텍스트는 사도신경이었습니다.

나눔 중에 김지안 집사께서 책 내용 중에 인용문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덴마크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인 가브리엘 악셀이 남긴 말이었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포기한 것이다.” (이재철, 성숙자반, 홍성사, 321)

이런저런 육체의 나약함으로 투병하면서 악셀의 말이 절절하게 들려왔다는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은혜가 된 이 문장이 어찌 김 집사만의 촌철살인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내가 이 땅에서 내 욕심으로 남긴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가지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수보보니게 여인이 갖고 있었던 자기 포기요, 오늘 요한이서 저자가 직설한 진리이신 예수 안에 거하며 살았던 나만 보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보여드릴 삶의 흔적이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