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5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스물한 번째 강해) 제목: 증거가 있습니까? (3) 본문: 요한일서 5:5〜13 서론)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에 오신 지체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고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절절한 사랑을 만끽하고 돌아가는 명절 연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2주에 걸쳐서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은 제하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인데 그렇게 신분의 변화를 경험한 자들은 삶의 현장에서 몇 가지의 증거를 갖고 살아간다고 역설했습니다. 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5:3)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대표적 증거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진 나의 자아를 내려놓은 자라고 공부했습니다. ② 적어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기에 세상을 이가는 자라면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믿고 사는 자임을 나누었습니다. (5:6) 이런 증거들이 우리 세인 공동체 교우들에게 여실히 나타나는 삶을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증거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론) 본문 11〜12절을 읽겠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본문 구절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들의 세 번째 증거가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는 생명을 우리도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갖고 사는 자임을 알려줍니다. 이 사실은 분명히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는 교훈이기는 하지만, 그냥 구렁이가 담을 넘는 것같이 본문을 스리쓸쩍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설교의 은혜에 접근하자면 예수께서 갖고 계신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먼저 어원적인 해석을 나누겠습니다. 요한복음 14:6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익히 잘 알려진 고전 같은 유명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자신이 갖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가 ‘생명’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헬라어 ‘조에’(ζωή)의 번역이 ‘생명’입니다. 이 단어가 오늘 본문 요일 5:11, 12절에 연이어 등장하는 ‘생명’과 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 사전에서 풀이된 ‘조에’에 대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본질적으로 말씀인 그리스도를 통해 부여받은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생명”(『신,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헬라어 사전』, 로고스, 830쪽) 해제하자면 ‘조에’는 예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완벽한 생명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요한 공동체와 연관된 글인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저자가 말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요한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생명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답하기 위해 요한복음 5:24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구절은 분명 종말론적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임을 고백한 자에게 주시는 영적 은혜는 사망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주셨기에 취득된 영적인 영원한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아마도 종교적 의미에 있어서 이것을 무시한다면 종교의 핵심적 기초를 부인하는 일이기에 이 은혜에 대해 천착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말할 때 이 지점에서 분명히 질문하고 성찰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생명(조에)’에 대한 의미가 이것뿐일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인 구원 내용에 속한 것이지만, 그러나 믿음에 있어서는 이미 현재적인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 『국제성서주석-요한/목회서신』, 130쪽) 저는 불트만 교수가 갈파한 이 촌철살인이 매우 귀하다고 여겨 제 자료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께서 갖고 계신 생명이기에 주님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생명’ 즉 ‘조에’는 과거에만 경험했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늘과 앞으로 미래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일이라는 신학자의 강변입니다. 불트만의 해제에 의거하여 생명을 가진 자의 증거를 이제 에두르지 않고 교우들에게 선포하겠습니다. ※ 예수께서 살아내셨던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예스’이면 그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노’이면 그대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들춰보면 오늘도 흔히 경험하는 기독교의 민낯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 때문에 화들짝하곤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은 소위 실로암 못 가 근처에 살던 소경을 주께서 고쳐 주신 기사가 실려 있는 담지 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그 시각장애인을 부르시고 침을 뱉은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신 뒤에 실로암 못 가로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윽고 소경이 순종하자 보게 되었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하지만 사달은 이제부터였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예수께서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예수의 행보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바리새인들이 이 일을 책잡아 시각장애인은 물론, 그의 부모들까지 소환하여 예수의 행위에 대한 책잡기 위해 심문합니다. 당사자에게는 너의 눈을 뜨게 한 자가 누구인지를 힐문하였고, 그의 부모들에게는 출교를 압박하면서 예수께서 아들의 눈을 고친 사건이 불법임을 인정하라고 압박합니다. 종교적인 출교를 걱정한 시각장애인의 부모들은 아들을 낳게 한 이가 예수임을 발언하면 유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염려하여 다시 보게 된 아들에게 면책 조건을 떠넘기는 비겁한 짓을 합니다. 집요했던 유대 지도 계층의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된 시각장애인을 불러 예수가 죄를 지은 자라고 말하라는 명을 내리며 물리적 압박을 가합니다. 예수가 너의 눈을 어떻게 뜨게 했는지 고발하라고 윽박 지릅니다. 눈을 다시 뜨게 된 이에게 너는 예수의 제자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발언하며 다시 보게 된 이에게 예수를 버리고 모세의 제자로 돌아설 것을 강하게 협박합니다. 이런 심대한 공격과 압박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지만, 다시 보게 된 자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던집니다. 요한복음 9:30〜33절입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조명해 봅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하지만,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죄인들의 말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면서 그분 뜻대로 행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누군가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시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못하셨을 것입니다.그들이 말했다. 먼지만도 못한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그런 투로 말하느냐!.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을 거리로 내쫓았다.” 정말로 귀가 번쩍이고, 눈을 크게 뜨게 하는 영적 통찰을 주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이 성경 내증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부류라고 인정받는 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다시 보게 된 자를 몰아붙이는 모양새를 보면 가장 비종교적이며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가장 평범했던 인물인 다시 보게 된 자는 가장 종교적인 팩트에서 단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9장 담론을 통해 얻어야 하는 영적 통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이지만 혹시 ‘나’는 그리스도라는 주군의 삶에는 조금의 관심이 없이 그분의 이름만 들춰내고 흉내 내는 카피 본 그리스도인은 아닌지를 묻습니다. 예수의 삶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아픔을 담지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안식일의 건재를 위해 안식일을 위해 존재했던 인위적 도그마에 함몰되어 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주군은 삶을 살아낸 자였지, 유대 종교의 틀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기에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을 갖고 있는 자의 증거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께서 살아내셨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어제 북-콘서트를 잘 마치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진보적 성향을 가진 후배 목사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자 마커스 보그(진보적 신학자,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문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다만 보그가 갖고 있는 역사성을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인용하는 것이 힘듭니다. 우리나라의 참 많은 교회들이 근본주의 성향에 서 있기 때문인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성경 읽기나 설교를 하실 때, 이런 진보성이 있는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있는지, 어떻게 성경 읽기와 해석을 이끌어가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매우 아쉽더라도 역사적 예수가 마음에 들어도 성경 읽기와 성경 해석은 신앙적 그리스도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 교단에서 목회하는 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어렵지요?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보이는 자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제가 후배의 질문에 답변한 답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셨던 삶의 흔적은 역사적 예수, 혹은 갈릴리 예수를 논하고 관심을 기울일 때 말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신앙적 그리스도를 역설하려면 삶이 아니라 도그마에 더 많이 관심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이렇게 매듭짓기가 쉽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조금 더 점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모험해 보겠습니다. 신앙적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군으로 진솔하게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역사적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살아내셨던 그 삶의 내용을 더 배나 잘 살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궤변이 아니라, 진솔한 선언입니다. 나는 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분 때문에 살았고, 그분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말론적인 것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어찌 그분이 걸으셨던 삶에 대한 족적을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이 남기셨던 흔적들을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남기셨던 삶의 흔적은 철저하게 이타적으로 사셨던 삶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지금 우리 집에 식모 일을 하는 나의 마트료나에게서 들은 거야. 이런 얘기예요. 옛날 옛적에 참 못되고 못된 아줌마가 한 사람 살았는데, 그만 죽고 말았어. 죽고 나서 보니 아줌마는 그동안 착한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악마들이 아줌마를 붙잡아서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자 아줌마의 수호천사가 가만히 서서 생각했지요. 하나님께 드릴만한 무슨 착한 일이 저 아줌마에게는 없을까 하고요. 마침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어서 하나님께 저 아줌마는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너는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에 그녀에게 내밀되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도록 해라. 만약에 그녀가 저기 불바다에서 나올 수 있다면 낙원으로 가도 좋지만, 만약 양파가 끊어진다면 그녀는 지금 그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천사는 아줌마에게 달려가서 양파를 내밀었습니다. 자, 아줌마 붙잡고 어서 올라오세요. 그러면서 천사는 아줌마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겨서 거의 다 끌어올렸는데, 그러자 호수에 있던 나머지 죄인들이 아줌마가 끌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 다들 그녀와 함께 올라가려고 그녀를 붙잡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줌마가 못 됐기 때문에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어요. 이건 내 양파지 너희들 것이 아니야. 그녀가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양파가 툭 끊어져 버렸답니다. 그러고 아줌마는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 오늘날까지 타고 있어요. 천사는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 2권』, 민음사, 154-155쪽)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예화를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구원이라는 팩트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역설한 게 분명합니다. 아마도 구원이라는 은혜는 이타적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싶었을 겁니다. ‘더불어’의 구원은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일 설교를 통해 주시는 레마의 교훈은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삶은 ‘홀로’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을 살아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만의 구원을 위해 살아가는 자는 그 안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이 없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삶은 ‘너’가 있는 ‘나’의 삶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인 I am beacause You are. 즉 ‘우분투’의 삶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금요일에 대외 구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진행하는 구제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영서동사무소에 가서 구제비를 전달하고 왔습니다. 북-콘서트를 마치고 다녀왔기에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동사무소 문을 닫을 시간이었습니다. 관내 소녀 생리대 지원금과 관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전달하자, 직원들이 당황해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기부금 확인서를 영수증으로 떼 주는 일, 동장을 만나서 담소하는 일, 기부자는 사진 찍어야 한다고 요청한 것 등등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을 요구했습니다. 손사래를 치고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낯설었나! 사랑하는 세인교회 교우 여러분! 교회가 이타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낯선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사랑하는 주군은 언제나 낯선 자들 옆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낯선 자들의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사셨던 삶을 따라 사는 삶이며 그런 삶을 살아내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닌 증거가 있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이타적 삶을 살고 있는 증거를 갖고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 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