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5번째 강해) 제목: 획일화와 다양화 본문: 고린도전서 12:12-20 서론) 종편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PD계의 천재라고 말하는 나영석 피디의 작품인데 공중파가 아닌 종편에서 시청률이 7%를 상회한다는 것은 엄청난 성공작이라는 말인데 이 프로그램이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에 출연하는 출연진들은 대체적으로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지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을 겨냥하여 포진된 사람들인데 저는 특히 이 사람들 중에 주목해서 보는 사람이 노무현대통령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함 작기 유시민씨입니다. 제가 유 작가를 주목해서 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행할 때 거꾸로 보려는 그 신선함 때문입니다. 지난 방송분에서 제가 아주 신선하게 본 대목이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과학자였던 장영실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장영실은 기생의 아들로 천민 출신이었지만 세종에게 발탁되어 벼슬까지 하게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 상당한 과학기구들을 만들어 세종 시대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가 세종 말년에 왕이 타고 다니는 가마를 만들었다가 그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벼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곤장 80대를 맞는 그래서 혹자는 이 일로 인해 장영실이 사망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는 데 어찌했든 비극까지 맞게 됩니다. 역사학자들은 장영실에 탄생연도와 사망연도를 모르는 이유를 성공한 자가 쓰는 일인 역사가가 세종의 입장에서 그에 관한 일체의 보고를 고의로 삭제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이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최고의 역적이 되는 것을 우리 모두는 심정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날 유시민 작가가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장영실에 대한 일체의 기록을 말살한 장본인은 역사가가 아니라 바로 세종이라고 말입니다. 세종은 우리 민족에게 말 그대로 완벽한 왕입니다. 그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을 깨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인데 유 작가는 세종을 그날 통렬히 질타했습니다. 장영실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개인에게 임했던 약간의 불편함 때문에 말살하고자 했던 치졸한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에 하나 공상 과학 만화에서 나오는 타임머신이 만약에 있다면 세종 시대에 가서 세종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세종대왕님, 왜 치졸하게 장영실을 그렇게 팽했습니까?” 그의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듣다가 아이러니하게 이런 생각에 젖으며 행복했습니다. ‘역발상의 도발은 언제나 아름답다.’ 역발상이라는 단어를 풀면 거꾸로 본다는 것입니다. 헌데 거꾸로 본다는 것은 두 가지의 위험성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① 획일성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② 상투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획일성과 상투성을 지지하는 자들과 부류는 상당수 주류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가는 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궤적이 아주 편안한 길을 갑니다. 정치적으로도 언제나 있는 자의 편에 섭니다. 그게 신상에 좋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꾸로 보려는 사람들은 삶이 고달픕니다. 모드가 가는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도 항상 마이너리티 쪽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도전적이라 비주류에 서 있습니다. 비주류는 왕따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페이스북에 지난 번 우리 교회에 와서 2세대 교육의 대안을 제시하고 간 후배 목사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의 주목과 인정을 받게 되면 어느덧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 쓰게 된다. 그리고 비주류에서 주류로 부상한다.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당연한 결과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언제나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그늘 속에 있을 때 더 많은 열매를 맺었다.” 후배가 쓴 이 글은 너무나 정확한 통찰이고 상식의 선과 같은 글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후배가 이런 글을 올릴 때마다 대견하고 감사합니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는 목사가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문제는 이런 글을 공개하면 주류에 있는 사람들에게 폭력에 가까운 폭격을 당한다는 점입니다. 가장 상식의 선과 같이 보이는 이런 글이 왜 공격을 당합니까? 그것은 주류에 서 있는 자들의 라인에서 벗어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획일화’ 라는 단어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단어입니다. 저와 같은 베이비부머들의 세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부모들에게 교육을 받았던 교복 세대입니다. 해서 일제의 잔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의 만행이 무엇이었습니까? 황국 식민화라는 가장 비인간적인 획일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그 지리 했던 시절을 몸으로 부대끼며 투쟁했던 세대들입니다. 군사 독재 정권의 만행이 무엇이었습니까? 획일화였습니다. 조지오웰의 걸작인 ‘1984’년을 대학 때 만났습니다. 당시가 신군부 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시기였기에 이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숨죽이며 읽었던 이 책에서 가슴을 저몄던 것이 ‘자유’, ‘사랑’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금지어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빅 브라더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워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획일화된 인간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사랑과 자유를 박탈당하는 비극이 나에게 임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당시 20대 초반, 부르르 떨며 이 책과 여행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획일화는 사회과학적인 통념에서는 긍정의 단어가 아닙니다.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단어의 부정적 의미의 외연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어떻게요? ‘획일화’는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결코 수용해서는 안 되는 부정의 단어라는 면에서입니다. 전술했듯이 획일화라는 단어는 전제주의나 공산주의에서 통용되는 단어입니다. 철저한 통제사회에서나 오고갈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 획일화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아주 교묘하게 악용된다는 점에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에서 은사를 받은 자들 사이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그것은 은사 우월주의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본론) 우리는 지난 강해들을 통해서 각 종 은사들을 살폈습니다. 이미 살폈던 12:4-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강력하게 역설했음을 나누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외쳤던 것은 이미 각종 은사를 받은 자들이 그 은사에 대한 다양성과 동등함을 인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받은 은사의 우월함을 자랑하려는 바르지 못한 영적 태도들로 인하여 교회공동체가 무질서한 공동체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난 강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오용되고 잘못 인식된 은사 우월주의자들을 향하여 몸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 우월주의 혹은 은사 독점주의를 보란 듯이 경고하고 질타하려는 바울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기는 하지만 모두가 한 몸이듯 메시야도 그렇습니다.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이번에는 유진 피터슨 박사의 메시지 번역으로 한 번 더 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몸을 보면 이런 성령의 선물들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지체-팔과 다리, 여러 기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체가 있지만ㅡ여러분의 몸은 여전히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성경 본문과 두 학자들의 현대적인 번역으로 본문 12-13절을 이해한 뒤에 오는 선명한 교훈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 성령의 선물로 주신 은사의 다양성을 은사 우월주의로 획일화시켜 옥죄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를 바울은 우리 인간의 몸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요점이 무엇입니까?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럿이라는 말은 너무 상식적인 우리들의 육체를 보더라도 확연합니다. 지난 11월 초에 남창규 집사께서 수고해 주신 건강 강좌에서 수차례 강조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느 한 부분이 아프다고 해서 그곳이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 몸 각종 여러 부분의 문제가 발생하여 아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해서 심지어는 어느 한 곳이 아플 때 몸의 한 부분을 가격해도 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용하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남 집사께서 그렇게 말한 것은 우리들의 몸은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조금 더 살펴보십시다. 본문 14-20절입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자 신약학자인 김판임 교수는 이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바울은 상이한 은사를 가진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여러 지체를 가진 몸’에 유비하여, 각 지체들마다 우위를 다룰 수 없는 모두 중요한 것처럼 은사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은사를 높이 평가하는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바울과 고린도교회’,p,224.)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울이 은사에 대한 이야기 끝에 몸의 비유를 한 것은 다분히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본인이 받은 은사 우월주의로 무장한 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는 것이 저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바울의 목회 신학으로 다가왔음을 여러 교우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14장에서 다루겠지만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은사우월주의에 빠져 교회를 어렵게 했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는데 바로 그래서 바울은 9가지의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8번째로, 방언 통역의 은사를 9번째 순위에 놓음으로 그들의 교만과 은사우월주의를 경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거꾸로’의 은혜에 접근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유기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자 다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팔이 팔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지혜의 말씀이라는 은사는 교회 공동체에서 지혜의 말씀이라는 은사를 받은 자로 하여금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손이 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어떤 이가 받은 신유는 은사를 받은 자가 그 은사의 유익을 교회 공동체에 펼침으로 아프고 고통 받고 있는 교회 안의 다른 지체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시는 기대 때문에 그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공통점은 모두가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의 다양성 때문에 발생한 특별한 은혜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갖고 장난질치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를 가지고 서열화 시키는 천박한 종교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은사는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에 네 은사는 나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영적 건방짐을 떨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주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깜짝 놀라게 하는 단어를 찾았습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제가 왜 이 구절을 보고 놀랐는지 아십니까? 바울은 그의 다른 편지에서 교회의 머리를 정의할 때 반드시 썼던 단어가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의입니다. 에베소서 1:22-23, 에베소서 1:17, 골로새서 1:18-19절을 보면 모두가 그렇습니다. 바울의 문체와 표현은 교회의 머리는 예수라는 것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은사에 대한 교훈을 주는 고린도전서 본문에는 예수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고린도라는 이방 공동체 교회의 지체들을 위한 배려 때문에 예수라는 단어를 절제하고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보편적인 예수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다양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고정화되고 거의 획일화되어 버린 단어인 ‘예수’ 보다는 보편타당한 예수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단어로 교회의 머리를 설명함으로 다양성이 있는 교회 공동체를 배려한 것이며 결국 바로 이런 다양함에 대한 인정은 은사에 대해서도 동일하다는 것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1절을 읽어드립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롤 모델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정보 제공입니다. 5명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① 바나바입니다. 키프로스 출신의 레위 족속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적인 출신 성분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의 이름이 요셉인데 워낙 온유한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어 만나는 사람마다 주의 감동으로 권면을 잘 하는 은사가 눈에 띠어 사람들로 하여금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Peacemaker 이었습니다. ②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원래 ‘니게르’라는 이름은 ‘검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히브리식의 별명을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한 열매인 듯합니다. ③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식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로마의 문화권에서 공부를 했거나 아니면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사람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④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마나엔은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과 함께 유모에게서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권력이라는 것을 맛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최고의 권력 상부에 있었던 그가 당시의 소외받던 소수자들이었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⑤ 사울입니다. 사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파라는 당시의 지성인 출신입니다. 그는 율법의 달인이었고 잘 나가던 인텔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담이 없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누구나의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문턱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권력이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지식층도, 비 지식층도, 흑인도, 백인도 함께 하는 문턱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교회 구성의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성령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도 그러므로 다양한 것입니다. 특정 은사의 획일화와 서열 매김은 전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다양한 것이 정답이고 모든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다시 한 번 재 각인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 10개월 동안 보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담을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처절하게 파헤쳤습니다. 그는 당시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비인간적인 명제들을 고스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 미래를 상상하지 말라, 모든 것이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말라,” (이것이 인간인가?,p.179) 그러나 이것은 인간 말살의 지옥이었던 수용소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인간을 획일화시키거나 고착화시키는 장소가 아닙니다. 만에 하나 성령이 주신 선물인 은사를 서열화 시키고 내가 받은 은사만이 최고의 은사라고 주장하는 교회와 그런 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선언은 다시 한 번 곱씹을 만한 적절한 가르침이자 교훈입니다. 고린도전서 12:1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주를 예배 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