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5일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절(2) 본문: 마가복음 8:14-21 서론) 불교에서는 하안거와 동안거를 통해 불교적 영성을 도모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사순절 피정을 통해 그들만의 종교적 영성을 진보시켜 나갑니다. 티베트 불교 신자들은 라싸에 있는 조캉 사원까지 순례하는데 특히 오체투지 순례는 티베트 불교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고행의 영성 훈련을 통해 테베트 불교인들은 그들의 영성을 키워갑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영성 훈련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타 종교에 비해 뾰족하게 무언가를 제시할 만한 큰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본인들의 영성을 더 아름답게 회복시키고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기간이 사순절이라고 여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부활절을 예비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현장에서 체휼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시기가 사순절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두 번째 주일입니다. 저는 지난 첫 번째 주일을 통해 사순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라고 압박하는 오늘의 시대에 그 은혜를 도리어 사수하고 곱씹는 절기가 사순절이라고 복기했습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으로의 진입이 무엇인가를 살피려고 합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갈릴리 전 지역에서 참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나름의 종교적 혜택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던 자들에 의해 상대적으로 고통당하던 민초들을 돌보시고 위로하셨습니다. 두로를 거쳐, 시돈을 통과하셨고, 데가볼리에 이르기까지 기득권주의자들이 기피하고 외면하던 장소를 방문하셔서 그들을 질병을 고치시고 안아주셨습니다. 이게 고울 리 없었던 기득권주의자들은 예수가 눈엣 가시거리가 되어 호심탐탐 예수를 공격할 빌미를 찾거나, 유대 종교적 교리를 갖고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럴 때마다 조금도 뒤로 물러서거나 본말을 전도하는 타협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공격을 이겨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많은 민초들이 주님을 따르고 제자들 역시 그들을 가이딩해야 하는 영적 부담감을 짊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앞서 주님이 행하셨던 사역은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도 여지없이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열광하며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곧바로 달마누다 즉 막달라로 이동하십니다. 하지만 그곳에까지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찾아와 하늘이 주는 표적을 보이라고 압박하자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으로 비유된 십자가의 은혜 말고는 너희들에게 보일 표적이 없다고 에두르시고 그들의 면전에서 등을 돌려 배를 타시고 벳세다를 향하여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공간적 배경은 제자들과 함께 벳세다로 향하시던 배 안입니다. 하지만 어떤 시간에 이동했는지는 본문이 밝히고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었음을 14절이 알려줍니다. 14절을 봅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제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는 중에 허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뒤늦게 먹을거리를 찾았는데 배 안이라는 공간에서 찾아낸 것은 떡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떡 한 개를 발견한 제자들의 반응이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해서 시장기 때문에 고통을 예수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돌아온 반응은 제자들에게 생뚱맞은 반응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지금 떡이 없다고 조르는 제자들에게 떡을 준 게 아니라 경고하는 메시지를 주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반응을 보이자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름 없이 제자들 역시 불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본문 16절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모를 리 없으셨던 주님께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17-18절에서 남기십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미국 풀러 신학대학교에서 신약 교수로 재직했던 로버트 귤리히 교수는 자신의 주석서에서 16-18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제자들은 벳세다로 항해하는 배 안에서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찾았더니 기막히게도 떡이 한 개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먹을거리가 없었다는 사실은 못내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먹을거리가 없다는 제자들의 걱정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어 함께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먹을거리가 없어 염려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엉뚱하게도 생뚱맞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시급한 먹을거리에 대한 답이 아닌 누룩을 주의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성 발언에 대하여 실망한 채로 도리어 계속하여 빵이 없는 것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서로 의논을 하며 수군거리며 불평하고 있었습니다.”(로버트 귤리히, 『WBC-마가복음 주석 1-8:26』, 솔로몬, 631.) 왜 제자들은 주님께서 경종해 주신 말씀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요? 떡이 아니라 ‘헤롯의 누룩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왜 제자들은 냉랭했을까요? 생각보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자기들의 뜻과 주님의 뜻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초점이 달랐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떡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관심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투덜대는 제자들을 향하여 본문 끝부분에서 주님이 직격(直擊)한 메시지가 이렇습니다. 18-21절을 마무리하면서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주님의 복기였습니까? 나는 떡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떡 자체라는 역설하신 것입니다. 단지 먹고 사는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의 해답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강력하게 다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상 본문 해제를 근거로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세인 공동체 지체들이 다시 경성 해야 할 메시지를 레마로 정하겠습니다. ※ 사순절은 내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주님의 뜻 아래 내려놓는 절기입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대단히 냉정하게 보이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절정에 이르러 참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자들이 많이 그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윽고 세 명의 사람을 무대 위에 올리면서 제자들의 삶에 대해 교훈하는 장면이 9:57-62절에 기록합니다. ① 첫 번째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짜고짜로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에두르셨습니다. 누가복음 9:5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께서 잘라 말씀하셨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묵는 곳은 일류 호텔이 아니다.” ② 두 번째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는 주님이 먼저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누가복음 9:59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전제 조건을 건 것입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고 와서 따르겠다고 조건부 수용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반응한 두 번째 사람에게 보이신 주의 반응도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절하셨다. 중요한 일이 먼저다. 네 본분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다. 삶은 긴박하다. 하나님 나라를 알려라.” ③ 세 번째 사람에 대하여 두 번째 사람에게 반응하셨던 주님의 말을 들었던 이 사람은 지레 짐작을 하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누가복음 9:61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역시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머뭇거리지 마라. 뒤돌아보지도 마라. 하나님 나라를 내일로 미룰 수는 없다. 오늘 기회를 잡아라.” 삼중 형식으로 되어 있는 예수님과 제자가 되겠다는 후보군과의 대화를 누가가 소개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려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상식적으로 보이는 네 뜻을 주님의 뜻 아래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임을 교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1세기의 우상이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 많아서 이것이라고 꼭 집어서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회 현장에서 뼈저리게 체감하는 현대판 우상 중에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극단적 가족주의와 같은 현대판 님비주의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인텔리 여성이 교회에 등록하기에 앞서 담임목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담임목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 여성이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를 등록하려고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한 이력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성도들을 목회자가 좋아하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제가 교회에 등록하면 목사님께 분명히 약속하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적절한 물질적인 봉사와 몸으로 하는 헌신도 할 수 있고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도 제 요구를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 교회에 등록하는 조건입니다. 목사님, 제 가정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 남편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한다든지, 제 아들딸에게 교회학교를 나오도록 한다든지 하는 것은 사절합니다. 제 가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제 등록 조건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맺어진 은총의 공동체라는 사실과 그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로 형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의 기초에 대해 1도 모르는 교만한 자의 언급한 포효였던 셈입니다. 저는 이 글만 책에서 보았기에 그 교회 담임목사께서 그 여성 교인의 요구를 어떻게 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었던 것은 극단적 가족주의라는 최악의 님비주의자가 교회에 적을 두려는 아이러니가 얼마나 치명적인 이기적 우상숭배이며 재앙적인 독소인가를 알게 해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도외시하며 자신은 한낱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함으로 스스로 지성적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려는 그녀의 행동이야말로 무당들이 푸닥거리의 도구로 사용하는 부적과 과연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번 금요일에 1/4분기 독서반 모임이 있습니다. 나눌 교재인 『천국의 열쇠』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 프란시스 치셤 신부가 성 도미니카 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했을 때, 그 성당이 관할하고 있는 타이니캐슬의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는 마리아 샘에 얽힌 웃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마리아 샘이라고 소문난 샘이 있는데 그곳에서 흘러넘치는 물은 한 소녀가 경험한 영적 현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톨릭 당국은 홍보했습니다. 이후 그 소녀의 기적은 마리아 성모가 행한 기적이었기에 그 샘물은 신비한 신유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고착화시킨 것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 샘물은 원래 말라 있었는데 병약했던 샤알로트 닐리라라는 소녀가 우연히 그 샘 곁을 지나다가 마리아의 현현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마리아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앞으로 너는 건강해질 것이고 또한 선택한 여성을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조명을 받는 순간, 그 말라 있었던 샘에서 신비의 물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는 류의 스토리였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 일이 있은 후, 샤알로트는 손에 성흔까지 생겨 그 소녀는 성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생겼다는 지극히 은혜로운 에피소드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샤일로트 닐리라의 정신질병적인 것이 원인이었음이 밝혀집니다. 혈흔도 히스테리성 내출혈의 결과물이라는 의사의 소견이었습니다. 성 도미니카 성당은 충격의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가톨릭 지도부는 샤알로트라는 소녀의 일이 실제인 것으로 포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성도미니카 성당의 영적 권위가 올라갈 것이고, 그 지역을 포함한 땅값의 상승도 기대되고, 더불어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방문하여 그 명성으로 인해 성당에 들어오는 직간접적인 순수입의 시너지 효과가 어마어마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인위적인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치셤 신부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숨기고 동참할 수 없어 지도부의 의견과는 반대로 조작된 사실을 정직하게 알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결국, 치셤 신부의 고지식함으로 인해 성 도미니카 성당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치셤은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평생을 오지인 중국으로 좌천되어 어려운 신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설교에서 소설에 기록된 이 예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지도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고 닥친 부담감을 제거하기 위해 눈감고 덮기에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프랜시스 치셤 신부만은 이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입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은 내리막 신부의 길로 하향세를 탔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계속 질문하는 신부의 삶을 지속합니다. A.J 크로닌은 이 책에서 종교가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색깔로 둔갑할 때, 이미 그 종교는 종교의 역할을 상실했음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생명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조명해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기독교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스리슬쩍 내 뜻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올 줄을 모릅니다. 양보의 기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악다구니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어줄 테니 내 자유를 간섭하지 마시오. 내 땅에 들어오지 마세요.” 사순절이 어떤 절기일까요? 위협의 존재를 넘어 위험한 존재로 변질된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은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떡에 목숨 걸고 있는 내 뜻을 겸손히 내려놓고 생명의 떡인 주님께 내 생각을 맞추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내 뜻을 포기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종교인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사순절은 종교인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바꿔타는 절기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삶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대단히 바쁜 삶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랴 무리에게 설교하랴 병자들을 고쳐주랴 귀신들을 쫓아내랴 적들과 벗들의 질문에 답하랴 여기저기를 옮겨다니시랴 그분은 정말로 바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에 대하여 복음서에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분은 바쁘셨지만 놓치지 않고 붙든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오직 한 가지의 관심에 집중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웬, 『모든 것을 새롭게』, 두란노, 40-41.)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헨리 니우웬의 갈파가 은혜롭게 다가와서 그런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읽는 누가복음 22:42절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영어 성경의 고전인 NIV 누가복음 22:42절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Father, if you are willing,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그렇습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우리 세인 지체들이 정말로 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God's will)이요, 하나님의 의지(God's will)에 대한 순명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