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배 없는 신앙은 없다.
서론)
신학교 4학년이 되면 어김없이 커리큘럼으로 이수해야 하는 전공 필수 과목 중의 하나가 예배학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예배학 교과서에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두 가지로 적시했습니다. (정장복, 『예배학 개론』, 종로서적, 1985년, 10-11쪽) ⓵ 기독교 예배란 신실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존엄성을 인식하고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굽어 엎드리는 행위이다. ⓶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해 인간들이 행하는 인격적 신앙 안에서의 정성 어린 응답이다. 대단히 교과서적이고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정의로 손색이 없는 설명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예배는 신앙이다.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예배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 제목은 대단히 적확합니다. “예배 없는 신앙은 없다.” 우리 교회는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에 창세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2021년 9월 22일 수요 저녁 기도회 시간에 나눈 창세기 서른일곱 번째 강해 본문은 창세기 8:20-22절이었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그날, 이 텍스트를 중심으로 설교했던 저는 설교 제목을 “나온 후에”라고 정했습니다. 설교 원고에 이재철 목사의 글 한 부분을 소개했는데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 즉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나올 때 방주 속에 있던 모든 생물도 함께 나왔다. 새들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날개 퍼덕여 창공으로 날아오르고, 짐승들은 괴성을 지르며 대지를 질주하고, 곤충들은 이리저리 뛰며 마음껏 재주를 뽐낸다. 그 가운데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렸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 가족이 어떤 행위든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를 먼저 하였더라면, 그 순간 그들은 짐승이나 새들과 구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철, “사명자반”, 홍성사,p,250.) 노아와 그의 식솔들이 거의 1년 만에 방주 안에서 나온 후에 행한 것은 ‘예배드리기’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빼닮게 창조된 인간이 역시 하나님의 지은 짐승과 구별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막힌 성찰입니다. 짐승들은 지긋지긋한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각자의 자유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노아는 식구들과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성도가 성도라는 이름을 갖고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제일의 우선순위로 삼지 않는 자가 어찌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적반하장이요, 본말전도입니다. 예배는 곧 신앙인의 삶이요 척도이자 수준입니다.
본론)
우리는 몇 주 전부터 지난 주일까지 포로 귀환자들이 그렇게도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와 천신만고 끝에 제2 성전을 재건했고, 이후 그 성전을 보호해 주는 보호막 역할을 해주는 성벽 재건을 했지만, 그 성읍 예루살렘이 워낙 황폐하고 척박한 땅이라 사람이 도무지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안 유다 백성들이 그곳에서 살기를 꺼려했기에, 지도자 느헤미야는 본인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예루살렘 거주민 모집 프로젝트를 벌였음을 나누었습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들 일부와 제비뽑기를 통해 선택된 1/10의 유다 백성들과 제비에 뽑히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성 거주에 자원했던 사람들까지를 포함하는 예루살렘 성 거주자 확정이라는 사역을 마무리했음을 나누었습니다. 더불어 지난 주일 설교는 그들의 이름과 신분들이었음도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미루고 밀었던 성벽 봉헌식이라는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참고로 8-11장까지가 에스라 시대의 부흥회를 삽입한 것임을 감안할 때 오늘 12:27절 이하는 느헤미야 7장에 이어지는 메시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헤미야 7장은 수많은 반대자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성벽을 52일 만에 수축한 뒤에 그 역사를 도모한 자들이 이름을 열거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12:27절 이하의 오늘 본문은 7장에 이어 펼쳐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적절해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제목을 이렇게 정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벽 봉헌의 기적 같은 드라마”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면면을 읽다 보면 장엄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본문을 교우들에게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이런 그림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림: 예루살렘 성벽 조감도
이 그림을 보면서 성벽 봉헌식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성벽 봉헌자들의 출발은 아마도 예루살렘 성의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문이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느 2:13,15, 3:13, 역대하 26:9) 여기에서 출발한 행렬은 동쪽과 서쪽 두 곳으로 나뉘어져서 성의 북쪽에 있는 성전 광장을 최종 집결지로 목표하고 행군했습니다. 먼저 동쪽으로 행군하는 유다 백성들은 남쪽을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돌아서 분문, 샘문, 수문을 거쳐 북쪽에 있는 마문과 동문, 그리고 양문 등등을 경유해서 성전 광장으로 모였을 것입니다. 반면 서쪽으로 행군하던 백성들은 북쪽에 있는 옛문, 어문을 지나 함메아 망대를 거쳐 성전 광장으로 모였을 것입니다. 결국 두 파트로 분류된 유다 백성들은 성벽 봉헌을 위해 수축된 전 성벽 땅 밟기를 진행하면서 그 의미를 새겼을 것입니다. 동쪽으로 행군했던 유다 백성들을 인도했던 지도자는 호세아가 선두에 섰고, 그 뒤를 따라 유대 지도자들이 섰고 그다음 줄에는 7명의 제사장들이 섰습니다. 제사장들의 뒤를 이어 레위 지파 9명이 줄곧 따라 붙었습니다. 서쪽에서 북으로 이동했던 대열도 상황은 엇비슷했습니다. 선두에 벡성들의 지도자, 그다음 줄에는 7명의 또 다른 제사장 그리고 9명의 레위인들이 선두 그룹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구도로 성벽 봉헌을 위해 성전 광장으로 행진하는 그룹 안에 오늘 설교를 통해 눈여겨보아야 하는 그룹이 등장합니다. 본문을 시작하는 27절을 먼저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느헤미야가 성벽 봉헌식을 위해 행진에 앞서 제일 먼저 조직한 것은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찾은 이유는 레위인들 중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음악을 담당하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고, 비파와 제금과 수금이라는 악기를 연주하게 한 것입니다. 성벽 봉헌 예배에 동원되는 모든 음악적인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또 주목해야 하는 다른 구절을 나눕니다. 본문 30절을 읽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성벽 봉헌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인도자들인 제사장 그룹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이 먼저 성결한 영육을 유지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예배자들이 영적 마음가짐을 다진 것입니다. 31절을 봅니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동쪽과 서쪽 행렬 모두 명실공히 성벽 봉헌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무리들을 세워 앞서게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마지막 절인 43절을 연속해서 낭독하겠습니다.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날이 어떤 날입니까? 성벽 봉헌 예배가 포로 귀환공동체 전체에 의해 드려지던 날이었습니다. 예배가 드려지던 날의 영적 기상도를 느헤미야 역사서 기자가 뭐라 적시했습니까? 무리들이 큰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43절의 주어는 무리입니다. 무리는 말할 것도 없이 성벽 봉헌 예배를 드리던 전 포로 귀환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들의 반응은 심히 즐거웠음을 보고합니다. 예배 공동체가 성벽 봉헌 예배드리기에 즐거워하자 이를 보고 계셨던 하나님의 반응도 곧바로 느헤미야 편집자를 통해 소개됩니다.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셨다.” 예배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시는 일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이 행하는 일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크게 기뻐하는 것은 그들이 예배하는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니 오늘 설교 제목은 다시 강조하거니와 정답입니다. 예배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지금은 참석하지 않지만, 제천시 기독교연합회에서 매년 하는 연례행사 중의 하나가 부활절 연합예배입니다. 이전에 이 예배는 필수 코스였기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한 해, 부활절 교회 오후 예배를 별도로 드렸기에 마치자마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장소에 10 여분 지각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연합예배가 드려지는 집회 장소의 본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예배당 밖 로비에서 약 3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일련의 남녀들이 서로 간에 잡담하며 로비를 분주하고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띠를 매고 있었는데 부활절 연합예배 헌금위원들이었습니다. 추측하기로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부활절 연합예배 순서 중에 본인들이 순서를 맡은 헌금 시간에 예배당 안에 들어와 헌금위원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위원이라는 명함을 갖고 있었지만, 그날 연합예배와는 1도 관계없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이 예배 헌금위원으로 사역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기막힌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 보인 수치가 그날 제게 임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本이고, 무엇이 末인지조차를 모르는 참담함을 순간 느꼈습니다. 교회 사역을 이유로 예배를 무시하거나 등한시 여기는 자들은 사역에서 손을 떼는 게 맞습니다. 우리 교회 양육 프로그램의 마지막 단계인 ‘구원 그 이후 반’에서 교재로 나누고 있는 남포 교회의 원로 목사인 박영선 목사의 걸작 ‘구원 그 이후’라는 기독교계의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했지만, 현역에 있을 때 박 목사는 거침없는 복음의 독설가로 이름을 떨쳤던 목회자였습니다. ‘구원 그 이후’에서 그가 남긴 글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배는 봐 드리겠습니다. 물론 십일조도 바쳐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제게 말도 안 되는 요구는 하지 마십시오. 저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는다든가, 영광 존귀로 관을 씌워 준다든가 하는 것으로 저를 골치 아프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내가 죽으면 천국이나 보내주시고 그걸로 그냥 때웁시다. 그 대신 제가 이 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 (박영선, 『구원 그 이후』, 29쪽)
예배를 봐 드린다는 자의 수준이니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리 없습니다. 예배는 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봐 드린다고 생각하는 자는 대단히 건방진 사람입니다. 성도가 왜 예배를 무시합니까? 예배를 통해 주어지는 영적 감동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내 먹고사는 문제에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없이도 충분히 이 땅에서 만족하며 사는 데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예배를 교양 선택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인간과 교제하며 말씀하시는 통로인 예배를 교양선택 과목으로 이수하려는 자들에게 선언합니다. 예배를 무시하지 마십시다. 예배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면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자들이 요구하는 일색 맞추기 예배를 건강한 한국교회 만들기에 최선을 다했던 구약학자 류호준 박사는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17쪽) ⓐ 예배가 공연되기를 바란다. ⓑ 무거운 예배가 아닌 가벼운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 예배를 통해 값싼 은혜가 마구 쏟아지기를 고대한다. ⓓ 예배를 통해 구원의 개인화와 믿음의 공로 사상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한다. ⓔ 예배를 통해 시대적 정신에 야합하는 것에 눈감아 주기를 바란다. ⓕ 예배에서 사라진 제자도를 다그치지 말고, 편의주의를 말해 주기 바란다. 류호준 박사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단언하여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다.”라고.
결론)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종말은 예배가 신앙이 아니라는 자들에 의해 앞당겨질 것입니다. 반대로 유감스럽게 지금은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어서 위태롭지만 한국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생기를 얻어 살아나기 것은 교회 부흥 프로젝트의 가동, 교회 성장 연구소가 발표한 목회 트렌드에 따라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는 구걸 목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배 살리기에 목을 걸 때 살아납니다.
나의 하나님이신 주군께 내 맘과 정성을 다해 노아처럼, 성벽 봉헌자들처럼 신령과 진정이 담보된 예배를 드릴 때 다시 한국교회는 다시 살 것이며 일어날 것입니다. 예배 없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를 무시하는 신앙인은 교회 안에 있는 실천적 무신론자입니다. 이들의 소위는 무신론자들보다 더 악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43절을 다시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다시 선포합니다. 예배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 하늘로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 곳을 덮으소서 이 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 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