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11:1-2
제목: 이런 사람이 보고 싶다.
서론)
11월 마지막 주일에 교회에 예배하러 나온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냥 주일이니까 예배에 나왔다고 가볍게 생각하는 교우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나오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그 사랑으로 인해 은혜받기를 허락한 자들만 나올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을 우연의 일치나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움직였기에 그 은혜에 반응하여 아멘 한 자들이 나온 자리임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 8-10장을 다루면서 만난 에스라 개혁의 내용들을 접했기에 잠시 접어 두었던 느헤미야 7장 이후의 메시지를 다시 이어 나누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 7장에서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3차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포로 귀환공동체 명단들을 살폈습니다.
불과 52일 만에 거의 예루살렌 귀환 이후 약 140년간 방치되었던 성벽 재건을 이루었던 기적의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느헤미야 12:27절 이하에서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성벽 봉헌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 봉헌식을 앞둔 이스라엘 포로 귀환공동체 안에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이 구절은 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본문 이해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백성 가운데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은 예루살렘에 와서 살게 하며 그 나머지 백성은 각자 자기 성에 머물러 있게 했는데 백성들은 자진해서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칭찬하였다.”
이번에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미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으므로, 나머지 백성이 제비를 뽑아 열 명 중 하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이사하고 나머지 아홉은 자기 성읍에 자리를 잡았다. 예루살렘에 살기로 자진하여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백성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마지막으로 공동 번역 버전으로 읽겠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 가운데 확률이 열의 하나인 제비에 뽑힌 사람들이 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다. 나머지 아홉은 지방 성읍들에서 살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은 모두 칭찬을 받았다.”
번역 성경을 종합해 보면 대체로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1-2절의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뒤에 봉헌식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읍은 안정시키기 위해 그 현장에서 살아야 할 주민들을 설정하는 사역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 7:4절의 기록을 통해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분포도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느 7:4)
왜 예루살렘 성읍에 기거하는 주민의 수가 적었을까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허물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의 치안은 불안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기피하고 주변 다른 곳에 거주하였다. (중략)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원수들이 끊임없이 침략 위협을 가해온 상황이었기에 공사가 끝난 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를 꺼려 했다. 게다가 귀향민들은 이미 각자 성읍에 정착해 지난 수십 년을 살아온 터라 친지와 가족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느헤미야”, 349-351쪽)
송 교수의 주석이 설득력이 있게 다가옵니다.
목사안수 동기 친구와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 아들이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을 하고, 지금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교제하는 자매가 생겼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할 계획인데 서울 쪽에서 교육 파트를 하고 있는 한, 결혼 이후 살림할 집도 없고, 생활도 안 될 것이 뻔하기에 졸업 이후, 사택을 주는 지방으로 내려가 전담 사역을 하겠다고 친구에게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일언지하로 아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유인즉, 지방으로 내려가면 거의 평생 지방에서 사역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기에 반대를 한 것입니다.
더불어 어려워도 서울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독려하겠다는 대화로 아들과의 일전을 마무리했다는 후담을 들려주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찬송을 앞으로 부르면 안 되는 목사라고 여러분이 친구 목사를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식에 관한 일을 가타부타하는 것은 대단히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일이기에 부연하는 것을 차치하겠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과 연관하여 드리고 싶은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태어났고 자랐고,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터전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를 개진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1989년에 인천을 떠났으니까 금년을 기점으로 계산하면 저는 고향을 떠난 지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모님도 다 소천하셨기에 이제 고향에는 누님과 형님 가족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제나 지금이나 저는 한 번도 제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더불어 그때의 경제적 상황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은퇴하게 되면 인천으로 반드시 갈 예정입니다.
그만큼 태어났던 곳, 자라났던 고향 및 삶의 흔적을 지우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지상정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텍스트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평상적인 일련의 일과는 정반대되는 삶의 터전을 떠나 타향으로 이주해야 하는 시나리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일련의 무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 만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누구도 거주하기를 꺼리는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세워가는 느헤미야 프로젝트가 소개됩니다.
본문에는 세 그룹이 열거됩니다.
⓵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게 될 첫 번째 그룹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절 전반절이 보고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백성의 지도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싸레 하암’은 백성들의 군 지휘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지도자들이라기보다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으로 대변해 왔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신경질적으로 반대하고 훼방했던 무리들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던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지도자들 그룹이 예루살렘 성읍에 우선으로 거주해야 했던 것은 너무 필수적이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큰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지도자가 솔선수범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⓶ 두 번째 그룹은 제비뽑기를 통해 선택된 그룹입니다.
다시 1절 후반절을 살핍니다.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공동체의 인구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많아 쉽게 단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추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설교자의 설명으로 두 번째 그룹을 이해해 보겠습니다.
예수아, 스룹바벨, 세스바살 등의 인도하에 1차로 예루살렘에 귀환한 수가 약 50,000명 정도입니다.
2차로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귀환자가 약 2,000명이고, 3차에 느헤미야의 인솔에 따라 돌아온 자들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추측건대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자들의 수는 1,2차 만으로 어림잡아도 60,000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덧붙일 것은 나라가 멸망은 했지만,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인원들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다윗 왕 시대에 예루살렘 성읍 인구가 약 2,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를 60,000명 정도로 이해하는데 학자들이 큰 이견이 없고 느헤미야 시대가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짐작한다면 어림잡아 약 50,000명 정도라고 계산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여 이 정도의 인구로 추산하고 오늘 본문 이해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전역에 살고 있었던 전 인구를 대상으로 예루살렘 성읍에 이주하도록 강제된 그룹의 총인구수를 50,000여 명으로 가정할 때 제비뽑기를 통해 선발된 십일조 인구인 5,000명 정도가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선발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선조로부터 이어온 제비뽑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되던 방식입니다. (민 26:55, 수 7:14-18)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의무적으로 이주해야 그룹은 여타 다른 성읍에 거주하던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인구였습니다.
한동구 박사는 제비 뽑힌 자들의 현실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항상 어려운 일이며, 이주해야 하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한동구, “에스라, 느헤미야 11-12장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아카데미, 290쪽)
이것을 전제하면서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게 되는 또 다른 제 3의 그룹을 만나게 되는데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명 이스라엘 전역에 살고 있었던 각 성읍의 1/10 인구가 제비 뽑힘을 당해 예루살렘에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주하게 된 이주민 중에는 아주 분명하게 제비 뽑힘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했음을 본문이 시사합니다.
하나는 대단히 불편하게 여기는 그룹이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입니다.
대단히 불편하고 낯설고 부담스러운 일이 예루살렘 강제 이주라고 해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⓷ 세 번째 그룹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일까요?
제일 확실한 답은 제비 뽑힘에 대해 만세를 부른 자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 같은 자를 불러주셔서 예루살렘을 지키며 섬기도록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류보다 더 주목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또 하나의 부류들이 있습니다.
제비 뽑힘에서 선택되지 않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지체 중에서 비록 뽑히지는 않았지만,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겠다고 요청한 부류일 것입니다.
이 부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루살렘의 피폐한 성읍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나머지 스스로 자원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겠다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느헤미야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스스로가 그렇게 하겠다고 요청하고 자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회하는 저는 이 두 부류(뽑혀 만세를 부른 자와 자원한 자)는 둘 다 아름다운 그룹이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제비뽑기에 뽑히지 않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해달라고 자원한 후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원함이라는 단어가 나와 생각이 난 성서적 내증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피 생활하던 때, 아둘람 굴에서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에게 충성하던 세 명의 용사들이 아둘람을 찾았습니다.
이때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인 적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은 물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사울의 치세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울은 블레셋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적이라고 여겼던 다윗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차라 다윗은 안팎이 가하는 이중고를 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바로 이때 아둘람에 있었던 다윗이 자기를 찾아온 세 용사들에게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 가지 푸념을 내놓았습니다.
사무엘하 23:15절입니다.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말이 안 되는 요청이었습니다.
살벌하게 배치되어 있는 적진 한 가운데에 있는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먹고 싶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요청입니까?
부하들에게 부담 백배의 토로를 한 셈입니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주군의 말을 들은 세 명의 용사인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용사 한 명 등 이 세 사람은 다윗 모르게 용감하게 블레셋의 진영을 뚫고 위험한 모험을 감행했고, 그토록 다윗이 먹고 싶어 하는 베들레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음을 사무엘하 23:16절이 증언해 줍니다.
감동입니다.
이것도 감동이지만 또 다른 감동은 이렇게 부하들이 생명을 걸고 떠온 물을 다윗은 마시지 않고 너무 귀한 것이어서 하나님께 전제로 부어 드린 일입니다.
하나님께 베들레헴 우물물을 전제로 부어 드리며 다윗의 고백했던 갈파가 참 의미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3:17절을 마지막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은 부하들이 떠 온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이렇게 재해석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
자원함이라는 헌신을 다윗은 이렇게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으로 이주하려는 자 중에는 당연하게 거주해야 했던 지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더불어 제비 뽑힘으로 인해 대단히 부담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주해야 했던 자들도 본문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마치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우물물을 떠 온 세 용사들처럼 스스로 자원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겠다고 이주한 그룹이 소개됩니다.
기도처에서 묵상한 말씀 중에 베드로전서 5:1-2절이 있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베드로의 말과 신학을 따르는 주후 60년대 로마를 근교에서 사역하던 ‘프로스뷔테로스’ 즉 ‘장로’입니다.
‘프로스뷔테로스’는 오늘날 직분으로 말한다면 목사와 결이 맞는 성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자신을 ‘장로’라고 호칭하면서 이 편지를 읽는 수신자인 또 다른 ‘장로’들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즉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목사가 목사에게 당부한 말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저자가 뭐라 당부합니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
기도처에서 이 구절을 접할 때, 내년도 목회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엄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교육 전도사 시절에 모셨던 담임목사님께서 한 번은 교역자 회의를 인도하시면서 부교역자들에게 이렇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삯을 받는 사람들이다. 충성은 고사하고 삯값이라도 하는 교역자가 되라”
당시 담임목사님이 호통치셨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양보해도 당시 담임목사님이 들고나오셨던 화두는 틀렸습니다.
목회자의 사고에 삯 받는 만큼 일하는 것이 고정화되어 있다면 차라리 목회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게 하나님께 정직하다는 생각을 아직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매일반입니다.
근래,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봅니다.
더불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섬기는 세인교회를 봅니다.
교회의 재앙은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일체 사역 때문에 발생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책에서 이 글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남 유다의 지도층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궁정에서 녹을 먹으며 정권에 빌붙어 살면서 절대권력에게 아부하고 듣기 좋은 소리나 하는 길 예언자가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이지만 거침없이 하나님의 올곧은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던 예레미야를 대단히 불편했고 부담스러워 했던 일련의 무리들이 예언자 예레미야를 겁박하기에 이릅니다.
일련의 기득권주의자들이 예언자에게 압박하고, 겁박했던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야훼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그 말씀이 부담스러우니 전하지 말라”
그러자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런 겁박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이렇게 반응합니다.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나는 너희가 부담스럽다.(You are my burden.)”
“너희들이 네 짐이다.”
비수요 죽비였습니다.
주님의 일을 억지로 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다.
왜?
주님의 일을 자원하는 기쁨이 아닌 억지로 하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반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을 하지 말라. 그렇게 일하는 네가 나에게 부담이요 짐이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세인교회에 필요한 자는 예루살렘 거주에 필요한 인원 보충을 위해 행했던 제비뽑기에서는 탈락되었지만, 굴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자원하여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겠다고 나선 자원하는 이들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억지로 사역하는 교인입니까?
아니면 자원하는 성도입니까?
정말로 이런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자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린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린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