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31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9:32-38 제목: 자기직시(自己直視) 서론) 시편 137: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본 시편은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 시편은 바벨론 이국땅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포로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바벨론과 에돔 연합군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돌아보고 있다. 예루살렘 귀환포로들이 아직은 재건되지 않은 폐허 예루살렘에서 부르는 노래처럼 보인다. 바벨론에게 당한 수치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고, 에돔 족속의 배반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노래의 주제는 세부분이 중심이다. 시편 137편의 찬양대원들은 바벨론에 있었을 때 시온을 기억했다. (1절: 과거 시제)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로 맹세한다. (5-6절: 현재시제) 그들은 주께서 예루살렘을 기억하시기를 호소한다.(7절: 미래시제) 결국 포로귀환공동체는 이제 잊지 않고 기억하기로 결심하며, 주께서 기억하실 것을 간구한다.” (제임스 L. 메이스, 『현대성서주석-시편』, 540쪽)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포로귀환공동체 사람들은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 재건 전에 시편 137편을 불렀습니다. 폐허 상태인 예루살렘을 보면서 이들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했고, 지금의 비참한 상태가 된 것에 대해 망각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고, 기대하기는 이스라엘이 다시는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주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시편 137편의 시인보다 조금 후대의 보고일 것입니다. 주지했다시피 오늘 본문은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가 끝난 뒤였으니까 시기적으로 제 2 성전을 완공한 주전 515년 이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137편에서 노래했던 자들보다 조금은 후대의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137편의 시인이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룹바벨 성전 재건 이후의 포로공동체가 공히 동일하게 각오하고 있는 내용이 보입니다. 본문 32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느헤미야 저자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이유를 이어지는 본문 33절이 보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이 선조들에게 행하셨던 일체의 일들은 악을 행한 선조들의 죄 때문이었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행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34-35절은 보고합니다.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죄는 배은망덕의 죄였습니다. 선조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주신 말씀을 거부했고, 가나안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주를 떠나 유리되려고 했던 죄악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느헤미야 저자는 수문 앞 광장에서 부흥을 경험한 자들의 회상을 여지없이 소개하며 대단히 명징하게 열조의 죄를 드러냅니다. 36-37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좋은 곡식을 먹으며 살라고 우리 선조들에게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우리는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는 풍성한 소출은 우리 죄를 벌하려고 세우신 임금들의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몸뚱아리도 마음대로 부리고 우리 가축도 멋대로 처치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무서운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무섭도록 냉정한 자기 평가를 하고 있는 포로공동체를 우리는 본문에서 만납니다. 대단히 나이브하게 34-37절을 오늘의 언어를 대입하여 적용해 본다면 세간에서 흔히 쓰는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맞고 당해도 싸다. 이렇게 무섭도록 자기(열조와 지금의 나)를 평가하고 있는 수문 앞 광장 부흥회를 마친 공동체는 단지 말로 회개하고 평가한 것이 행동으로 이어졌음을 마지막 38절이 보고합니다. 역시 공동번역으로 38절을 소개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맹약을 맺게 되었다. 우리가 그것을 기록하여 봉하고 지도자들과 레위인들과 사제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원래 38절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습니다. 원문은 9:37절이 끝입니다. 9:38절은 10:1절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원문에 기록된 10: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그런데 왜 우리나라 성경에는 히브리어 원문 10:1절에 있는 구절을 9:38절로 별도 첨가했을까요? 아마도 느헤미야 저자는 포로귀환공동체가 고백하고 있는 명백한 자기 성찰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 38절이었기에 9장에 기록한 듯합니다. 이것보다 더 주목할 것은 열조의 죄를 정확하게 토로하고 시인함과 동시에 지금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을 서약한 서약서의 주체입니다. 9:38절에 주어는 1인칭 복수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주어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 2 성전을 완공한 후손 중에 서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예외자는 없습니다. 돌아온 자 모두가 주체이자 주어입니다. 단 한 사람의 열외 없이 이스라엘 포로귀환 공동체 모두가 다시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자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대로 살겠다고 서약했다는 보고에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물론 그 모든 공동체에서 솔선수범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천명한 선두 그룹은 방백들, 레위 사람들, 그리고 제사장과 같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 정확한 자기 직시가 나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본문에 주인공들인 ‘우리’들에게 보이는 각오가 아름답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은 자기 선조들의 죄악을 덮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은 자기 선조들의 만행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이들이 그랬기에 오늘의 회개가 터져 나올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한 올바른 방향성을 붙들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과거에 대한 냉정하고 분명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 자가 발전하고 성숙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지금 자기가 완벽한 데 무슨 진보가 더 필요하냐고 대드는 사람에게 무슨 희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작년에 읽었던 김훈의 소설 『하얼빈』의 끝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3월 29일에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수사와 재판, 그리고 사형에 집행 과정에서 애쓴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서 상여금을 내렸다. 미초붙이 검찰관 250엔, 마나베 재판장 150엔, 소노키 통역, 기시다 서기 80엔, 요시다 경시, 사이토 경부 30엔, 순사부장급 3명 20엔, 순사 5명 10엔” (안중근, “하얼빈”, 279쪽) 무력하기 그지없었기에 일본이라는 섬나라에게 국권을 빼앗긴 소위 말하는 한일합방의 국치(國恥)가 있던 해 1910년 3월 26일에 안중근 의사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죽인 일본이 불과 3일 만에 일본에서 취한 작태입니다. 자국이 범한 동아시아와 태평양 국가 전체에게 자행한 만행이 뭐 잘못되었느냐고 묻는 수준인 나라이기에 안중근 사형 선고 이후, 자축 페스티벌을 벌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하면 하릴없는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목사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설교는 선포이니 이렇게 전하고 싶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자기직시라는 성찰을 하지 않는 한, 일본은 같이 걸어갈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기사 즉 베드로가 주의 제자로 부름 받고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사명을 부여 받은 장면에서 우리들이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팩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에 사족을 달고 순종합니다. 누기복음 5:4-5절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현직 어부가 전직 목수에게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타박한 셈입니다. 조건부 순종을 한 셈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 갈릴리 호수로 다시 나간 시간은 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보기는 하겠지만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보한 것입니다. 이어진 누가복음 5:6-8절을 읽겠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소위 말하는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5장을 펼 때마다 그물이 찢어지는 수확을 이루신 예수님, 말씀으로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 순종하면 나타나는 기적 등등의 교훈에 집중합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가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제자 선정 메시지에서 제일 먼저 담아내는 은혜는 베드로의 자기 직시라는 메시지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너는 누구니? 라고 물었다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보이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없습니다. 누구도 베드로에게 자기 성찰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고기를 잡고 육지에 올라온 뒤에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께 자기를 토로하며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한 것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니 나에게 떠나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명징한 평가를 내린 베드로를 보시고 주님이 이렇게 미션을 주신 점입니다. 누가복음 5:10절은 보고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님은 드디어 냉철하게 자기를 평가한 베드로에게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진보된 미션을 하명하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부흥을 경험한 자들이 이렇게 자기성찰에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말로만 고백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우리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에서 이탈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걷겠다고 결의하며 서약서에 서명하였다고 38절이 보고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레마를 경험하게 됩니다. 정확한 자기 직시라는 성찰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 영적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시분초마다 경험하는 것을 영적 부흥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서약서에 서명했습니다. 10장 이후에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포로귀환공동체는 부흥를 경험한 뒤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겠다는 선언서에 서명한 것입니다. 광야 공동체에서 40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왜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등 돌리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셨던 기적과 일하심에 대해 공동체는 나름 반응했지만 개인적 반응으로는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은혜를 개인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영적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뭅니다. 진보하거나 발전하지 못합니다. 영적 부흥은 때를 따라 공동체에게 주시는 은혜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경험해야 하는 은혜입니다. 지인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베드로전서 강해를 준비하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제게 베드로전서 강해 사역을 마친 것을 알고 있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원고를 보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요청했습니다. 지인 목사님의 요구를 받고 후한이 두려워 베드로전서뿐만이 아니라 베드로후서 강해 원고도 같이 보내주었습니다. 다만 출처를 분명히 밝히라는 전제를 조건으로 해서 보냈습니다. 출처를 밝히라고 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그 설교는 제 설교이지 친구의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후에 경우에 따라 출간 계획이 있는 원고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은혜, 내가 체휼한 감동은 내 것이지, 인용한다고 인용한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부흥도 똑같습니다. 은혜의 경험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지 공동체의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에게 은혜가 임했던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수문 앞 광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철저히 개인에게 임했습니다. 개인에게 임한 영적 부흥은 곧바로 자기를 직시하는 믿음의 진보를 나타냅니다. 더불어 그 결과 또 다른 부흥 즉 성전 재건 및 성벽 재건으로 그 믿음의 결과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이런 종합적인 레마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영적 부흥을 경험한 ‘나’만이 ‘나’를 철저하게 직시하는 믿음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은혜입니다. 나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는 자를 경계하십시오. 믿을만한 자가 아닙니다. 동시에 나 또한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마십시오. 왜? 정직하게 평가할 때 나는 후한 점수를 받을만한 존재가 아니기도 하고, 동시에 나에게 후한 나는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조명되는 말씀과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나’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가톨릭 시인으로 유명한 구상 시인이 쓴 ‘꽃자리’를 읊고 기도하겠습니다. (김응교, 『손모아』, 비아토르, 239-240쪽, 재인용)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어떤 의미로 볼 때 가장 인간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은 자기를 성찰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역설하자면 인간이 가장 추하게 보이는 때는 자기를 정확하게 성찰하지 못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내가 정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내가 정확하게 보이는 사람은 결코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D-KEY로 통일)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가진 것 모두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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