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8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9:7-8 제목: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나! (1) 서론) 오늘은 온 맘 다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함께 전심을 다하여 찬양하십니다. 주를 찬양하며 나 이제 고백하는 말 주를 사랑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 손을 높이 들고 나 이제 고백하는 말 주를 사랑합니다. 오 거룩하신 주의 이름, 거룩하신 주의 이름, 주의 이름 높이 올리세. 이 찬양곡이 수록된 전하세 예수 1집이 1988년에 세상에 나왔으니까 벌써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980년대 후반, ‘경배와 찬양’이라는 테마로 매주 목요일마다 용산에 있는 온누리 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섬기던 교회가 파주였기에 청년, 학생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에 가서 뜨겁게 찬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현장 집회에 참석하면서 직접 경험했던 일 중에 하나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된 집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집회 내내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찬양하던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어언 30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이기에 지금도 그때 젊은이들처럼 그렇게 찬양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정신병자나 광신자로 취급 받기 십상이기에 그런 무리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아픔이 제게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약 25년 전 즈음에 연세대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본관 건물이 있는 언더우드 동상에서부터 정문까지 이르는 약 1km 정도의 백양로 거리에서 경배와 찬양 팀이 집회를 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집회 날짜가 마침 제가 수업을 받는 월요일이었기에 저 역시 아주 젊은 날을 추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그날 불렀던 찬양은 전하세 예수 7집에 수록되어 있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교우들이 함께 부르는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를 비롯하여 ‘내가 민민 중에’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등등의 명곡들이었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고 하스데반 선교사의 인도에 따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 옆에서 함께 집회에 참석한 형제들이 이렇게 떼창을 하며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학교인 연세대학교가 다시 복음으로 물들게 해 주십시오. 무신론적인 인본주의가 사라지게 하시고 이 캠퍼스에 자리 잡고 있는 이단 동아리들이 물러가게 하시고 음란의 물결이 떠나게 하시며, 신촌 지역에 호머들과 레즈비언들이 사라지게 하시고, 즐비한 술집들이 문을 닫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땅이 되게 하옵소서.” 대단히 도전적인 기도였는데 이런 기도를 하며 눈물로 절규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저 역시 이런 기도를 드렸던 추억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젊은이들을 통하여 이 땅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다시 저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부흥을 주옵소서. 하나님, 이곳이 평양의 장대현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뒤돌아보면 참 뜨겁고 아름다웠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불렀던 찬양은 적지 않은 무기였습니다. 찬양은 주님을 바라보도록 견인한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때 드렸던 찬양들은 모두가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온누리 교회 경배와 찬양 팀이 인도하는 찬양집회는 엄격히 말한다면 찬양집회가 아니라 기도집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한 설명일 수 있습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적으로 고국에 돌아와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받은 뒤에 모든 공동체의 지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음을 나누었습니다. 포로귀환공동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한 타당한 이유에 대해 지난 주일에 세 가지로 먼저 살폈습니다. ⓵ 영원부터 영원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했습니다. ⓶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하신 분이기에 찬양했습니다. ⓷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찬양했습니다. 이렇게 찬양의 타당한 이유를 제시한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는 오늘 본문부터 37절까지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찬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포로 귀환 공동체는 무엇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4)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어주심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귀환공동체가 아브라함을 시대의 현장으로 소환했습니다. 단지 소환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제시합니다.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을 택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해 주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느헤미야 역사가의 보고에 따라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유를 또 하나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에서 저자가 표현한 기술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람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갈대아우르에 살고 있었던 평범한 인물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았던 아브람 가족에게 어느 날 혁명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식솔들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창세기 11:31-12: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구절을 자세히 읽다보면 아브람이 야훼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곳이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하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명령을 받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이 어디인지를 몰랐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수천 년 후에 제시합니다. 히브리서 11:8절을 읽어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시할 땅이 가나안이었기에 믿음을 갖고 나아갔다는 일반적인 해석이 왜곡되었음을 알려준 본문이 히브리서입니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에 도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7:2-3절에 소개되고 있는 스데반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이 구절이 주는 상당한 은혜가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하란이 살고 있었던 아브람에게 오셔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미션은 아브람에게 주신 첫 번째 하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의 땅이었던 갈대아 우르라는 메소보다미아 지역에서 살고 있었을 때, 야훼 하나님이 오셔서 명령하신 미션이 떠나라고 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자행한 치명적 실수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땅이 아닌 아버지 데라가 이끄는 땅인 하란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아브람은 결코 믿음이 있었던 자가 아니라 아버지 데라와 같이 이방신을 믿는 자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의 미션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는 하등에 관계가 없는 통상적인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역을 이동하여 우상을 판매하며 또 다른 세속적 부를 추구하려는 것이 이주의 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주어진 도전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그랬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렇게 방치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박영선 목사의 글을 읽다가 대단히 탁월한 성찰이라고 동의했던 대목을 소개합니다. 박 목사는 자신의 글에서 창세기 12:5절을 소개합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이 구절을 소개한 뒤에 대단히 의미 있는 갈파를 남깁니다. “마침내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참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이 ‘마침내’는 하나님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입니까? 아니면, 아브람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입니까? 하나님이 쓰셔야 하는 ‘마침내’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믿음으로 본토 친척 집을 떠나 여행한 것이었다면, 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따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곳까지 간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신앙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면 ‘마침내’는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르쳐 줘도 모르니까 억지로 밀고 끌고 해서 드디어 가나안까지 끌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박영선, “신앙클리닉”,규장, 63쪽) 이렇게 자격도 없고 믿음도 없는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여기까지도 은혜인데 야훼 하나님은 은혜의 끝장을 보십시다. 오늘 느헤미야 저자의 표현이 이것을 증언해 줍니다. 다시 본문 7절을 만납시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개명해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본문 저자는 소개합니다. 이름 개명이 주는 신학적 함의를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인 송병현 교수는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귀족 신분,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이름이었다. 그가 새로이 받은 아브라함의 어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이름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애서 비롯된 언어유희일 가능성이 있다. 이름을 단순히 한 개인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과 인격의 표현으로 간주되던 고대 근동의 정서에 의하면 아브람의 이름 변화는 인격과 운명의 변화를 의미한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주석”, 321쪽) 송 교수의 해석을 동의한다면 우리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개명해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나름 발견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인격을 만드셔서 그를 통하여 그의 운명을 바꾸시겠다는 의지 표명이 야훼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신 의도였다는 송 교수의 해석은 적지 않은 위로와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 사실이 왜 감동입니까? 아브람을 이렇게 만들어 가신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감동 때문입니다. 8년 전에 첫 번째 안식년 기간, 소아시아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뒤라, 육체적으로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바울이 세운 소아시아 7교회 탐방은 이동 거리나, 순례 거리가 거의 살인적인 스케줄이기에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시도하는 게 옳다는 유경험자인 선후배들의 조언에 용기를 내 그리스, 튀르키에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먼저 방문한 튀르키에에 대한 소회는 제게 적지 않은 체력적인 소모를 가져 오게 했습니다. 엄청난 이동 거리를 오고가는 과정이었기에 체력 소모는 가히 가공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에 음식은 정말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튀르키에만이 갖고 있는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은 도저히 제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라면하고 김치가 없었으면 12박 동안 굶주리다 올 정도로 음식이 힘들었습니다. 마침 성지순례 팀에 서울의 모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감당하는 노인 권사님과 상대적으로 젊은 여 집사님이 페어를 이루어 함께 동참했는데, 그 중에 젊은 여 집사님 한 분이 제가 음식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당신이 가지고 온 김과 밑반찬들을 아내에게 주는 친절함을 베풀어주어 저는 여행 내내 정말로 요긴한 일용양식으로 삼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여행 중에 만난 그 여 집사님은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준재였지만 순수하게 신앙의 도움을 위해서 공부를 한 것이었기에 사역을 하지 않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였는데 소아시아 7개 교회를 탐방하면서 제 옆에 붙어 당신이 궁금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7교회에 대한 질문공세를 계속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치열함이 너무 아름다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친절하게 답변하며 소아시아 투어는 마쳤습니다. 그렇게 성지순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각자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은 소아시아 7개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질문으로 저를 찾아주셨습니다. 마침 저는 그 때 소아시아 7개 교회와 데살로니가 지역의 교회 탐방에 대한 성지순례 후기를 기록하고 있던 터라 질문에 대한 답도 들어 있는 글을 집사님께 넘겨드렸습니다. 그렇게 다시 영적인 교제를 하게 된 권사님(이후 권사 취임을 함)은 성경적 질문과 기도 제목을 공유하는 기도의 동역자가 되었고, 송구스럽게 종의 네 번째 책을 감수해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제 예천으로 새신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 동역자로 함께 힘쓰기로 결단한 예천에 거주하는 집사님 두 분 중에 한 분은 서울에서 거주하시다 예천으로 장막을 이주한 집사님입니다. 서울에서 예천으로 이주한 이후, 이곳저곳의 교회를 방문했지만, 영적인 갈급함과 사모함을 충족할 수 있는 교회를 만나지 못해 상당히 영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간, 우리 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집사님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한 지체는 앞에서 언급한 성지순례 때 만난 권사님입니다. 두 분은 서울에서 같은 교회를 섬겼기에 예천으로 이사한 집사님에게 영적인 부분의 만족함과 승리를 위해 조금은 거리적인 부담은 있지만 제천세인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것을 독려했고, 예천에서 함께 만난 또 한 분의 집사님 연계해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스토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조금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동역자로 함께 서 준 신옥균 집사와 문은혜 집사가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 우연일까요? 세속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세속적 관점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8년 전, 튀르키에에서 이강덕 목사와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잘 감당하고 있는 박명자 권사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은 8년 뒤에는 그녀를 통하여 계획하신 또 다른 하나님의 딸들을 세인 교회를 위해 동역자도 붙여주실 것을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이렇게 일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은 신옥균, 문은혜 집사를 통하여 또 다른 위대한 일을 앞으로 만들어갈 하나님이심을.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자격 전무했던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심으로 그를 만들어 구속사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으로 만드신 바로 그것처럼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 중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며 또 만들고 계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 기자가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 포로귀환 공동체 지체들의 찬양이 담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이유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열조와 자신의 후손들을 만들어 가실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이신 신탁은 이렇습니다. 예레미야 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결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설교의 서두에서도 함께 마음을 모아 찬양했지만 오늘은 말씀을 들은 후에도 찬양으로 마무리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만들어 가시는 분은 존귀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그분 앞에 영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모쪼록 나를 위해 일을 향하시며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기 위해 나를 조각하시며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만세를 외치며 또 한 주간을 은혜와 감사로 넉넉히 살아내는 우리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우리 고대하네 주님 오실 그날/다시 사신 왕의 영광 이 땅을 비추네 사단의 권세는 주 앞에 무너져/생명과 진리의 주 권세 가장 높도다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