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6:15-19
제목: 이걸 바라는 오늘이기에 서론) 20-21세기를 아울러 최고의 종교학자라고 지칭되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하비 콕스’가 그의 걸작 중의 걸작인 ‘세속 도시’에서 본회퍼 목사의 글을 하나 인용합니다. “우리는 종교가 전혀 없는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종교 없이 신에 대하여 말해야 하는가? 어떻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신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하비 콕스, “세속도시”, 문예출판사, p,357.) 본회퍼 목사가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1944년 4월 30일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어언 80년이 지난 글입니다. 하지만 80년 전에 양심 있게 행동하는 목사의 사고에 담긴 말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본회퍼의 이 독백은 오늘 2023년에 적확하게 맞아 떨어져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KBS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본 편에서 이탈리아 바티칸을 소개하는 시간에 제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청동으로 조각되어 있는 베드로 상을 카메라가 잡아주었습니다. 이유는 대단히 단순한데 예로부터 베드로의 발을 만지면서 기도하면 기도가 응답된다는 설(說)로 인해 그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이구동성으로 베드로의 발을 만지며 지나간 탓에 베드로의 발톱이 청동임에도 불구하고 닳아 없어진 희귀한 장면을 잡아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다가 저는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가장 기독교적인 모습을 그림, 조각, 예술적인 작품들로 표현한 로마 바티칸에서 가장 비 기독적인 행태들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본회퍼의 예언적인 일갈이 대단히 불행하게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감정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정의하자면 가장 종교적인 것 같지만 가장 비 기독교적인 시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픈 것은 이런 시대에 하나님을 말해야 하며, 더 아픈 것은 이런 하나님을 표현할 때, 세속에 속해 있는 사람은 물론,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가 오늘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험악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본문은 대단히 큰 위로와 격려를 줌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신앙의 옷깃을 다잡이할 수 있는 정말 좋은 텍스트이기에 본문 연구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6:15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 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느헤미야가 주도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역사가 52일 만에 종료되었음을 느헤미야 기자가 보고합니다. 엘룰 월 이십 오 일을 오늘의 달력으로 환산하면 주전 445년 10월 27일을 지칭합니다. 주전 959년에 탄생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시기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였습니다. 이후 우리가 학개 예언서를 통해 보았던 것처럼 솔로몬 성전에 비해 참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제 2 성전 스룹바벨 성전이 주전 516년에 재건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초토화된 예루살렘 성벽은 약 140년 동안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었고 누구도 이 성벽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목도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고, 드디어 140년 동안 방치되다시피 버려진 성벽 재건을 완공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성벽을 재건하는데 걸린 시일이 불과 52일이라고 못 박은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한 요세푸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스라엘 성벽 재건에 걸린 시일이 2년 4개월이라고 저술했지만,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성경 내증의 보고인 52일에 오히려 손을 들어줍니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전체가 완전히 복구되는 시기로 산정한 것이지만,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가 부분 파괴라고 해석하기에 학자들은 52일 만에 성벽 재건이 가능하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의 의견에 저 또한 동의하며 이 동의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받아들인다는 점도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불과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될 수 있었단 말일까요? 의 의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 16절이 줍니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느헤미야의 작품도 아니요, 예루살렘 거민들의 작품도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 작품이라는 것을 대적,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까지 명백히 알 정도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일하신 일이었기에 52일의 역사는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52일 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자 제일 먼저 당황한 이들이 있습니다. 잠시 전에 언급했던 모든 대적들이었습니다. 더불어 이방 족속들도 그랬습니다. 16절에 ‘크게 낙담하였으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팔’은 직역하면 ‘떨어뜨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KJV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재미있게 번역했습니다. “they were much cast down in their own eyes.”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대단히 크게 밑으로 떨어뜨렸다.) 한글 성경 중에는 ‘현대인의 성경’과 ‘새 번역 성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가 많이 꺾였다.” 느헤미야가 힘으로 이 역사를 52일 만에 이루었다면 대적들은 또 다른 방해 공작을 지속해서 폈을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룬 것은 언제나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셔서 성벽 재건을 성공하게 하셨다고 대적들도 믿었기에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감동적임 메시지를 15-16절이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과 더불어 오늘 본문에 숨어 있는 결코 쉽게 지나쳐 버리면 안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인 메시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7-19절 보고입니다.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저는 앞에서 크게 낙심했던 부류들을 언급했습니다. 대적들과 이방 족속들이라고 했습니다. 헌데 느헤미야 저자는 본문에서 대적의 주인공으로 산발랏을 배제하고 도비야를 우선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냥 하는 언급이 아니라 도비야가 맺고 있었던 인맥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귀족’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반대하던 부류들입니다. 느헤미야 3:5절에 나오는 귀족들을 지칭합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히브리어-호림)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들은 성벽 재건을 하고 있는 느헤미야에게 적지 않은 방해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도비야와 은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편지를 도비야에게 보내면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성벽 재건을 훼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18절은 느헤미야의 대적인 도비야의 인맥을 소개합니다. 먼저는 도비야의 출신 성분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었던 도비야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세스바살의 인도 하에 예루살렘으로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같이 돌아온 1차 포로귀환자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출신 성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유다 신앙이 기초가 된 자가 도비야였기에 그는 자기 아들의 이름도 그럴 듯하게 작명했습니다. 도비야의 아들의 이름을 ‘여호하난’이라고 지었습니다. 즉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고 작명한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도비야는 자신의 아들 여호하난을 제사장 므술람의 딸과 혼인시킬 정도로 대단히 열정적인 야훼 신앙을 갖고 있었던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도비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반대하는 느헤미야의 대적이 되었을까요? 소형근 박사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도비야는 야훼 신앙 숭배자이지만, 암몬 지역에서 총독 직을 수행하던 자였다. 암몬지역은 유다 사람들도 거주하지만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다 보니 이방인들을 위한 정책을 펴나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비야는 이방인들에 대해 관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런 점에서 느헤미야와 도비야는 동일한 야훼 신앙인들이었지만 서로 다른 성향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소형근, “연세신학 백주년 기념 성경주석-느헤미야”, pp,104.) 도비야는 어떤 의미로 보면 이방인들을 위한 대변자였기에 이방인들과 척결을 내세우고 그들과의 단절을 개혁의 모토로 삼은 느헤미야와는 물과 기름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대변자로 서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도비야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설교자입니다. 하지만 다음의 사실 때문에 도비야의 반응은 비난받아야 하며, 또 그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악한 행위였다고 진단하는 데에는 이견을 갖지 않습니다. 도비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역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불어 이 일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진행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 다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임을 도비야가 분명히 알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다시 말하면 암몬 지역에서 암몬 족속을 통치함으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유익과 헤게모니의 상실을 우려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대했던 도비야의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는 반 하나님적인 사고이자 불신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전 역사를 이루려고 하는 느헤미야를 살해하기 위해 스마야 제사장을 뇌물로 매수하여 살해교사까지 한 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절은 이런 반유대적이며 반 신앙적인 자였던 도비야가 주변의 유력한 자들과 더불어 성벽 재건 이후에도 끊임없이 느헤미야를 괴롭힌 자로 보고되고 있음은 적어도 느헤미야 역사서의 저자가 도비야를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본문 정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52일 만에 절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자 대적들이 낙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교회와 성도가 행하면 세상이 긴장한다는 교훈입니다. 목회자로 30년 반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 견디기 어려웠던 세상의 비아냥들이 있었습니다. 세속의 소리들이 있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교회가 그렇지 뭐!” “교회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언제나 그랬어!” “교회가 세상을 염려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기막힘과 난감함의 시대네.” 모두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부정적인 목소리로 공격하는 비수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비수가 날아들면 방어할 영적 방패가 있어야 하는데 뾰족이 이 비수를 막을 방패막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주보에 기록된 목양터 이야기마당에서 언급했지만 지난 주간, 저자와의 만남 북 나눔 시간에 책을 집필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 당위, 앞으로의 계획 등등을 질문자들이 물어 와서 성심껏 답변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체 한 명이 반색하며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조금은 당돌하다고 느낄 정도의 질문이었지만, 저는 그 지체의 질문이 대단히 용감하고 용기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해 진정성이 있게 답했습니다. 토론에 참여한 지체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호칭한 뒤에 그녀가 여운을 갖고 제게 물었습니다. … 그래서 목사님은 행복하십니까?” 아마도 지체는 제게 목사로서의 현 상태가 이론이 아니라 진짜로 삶으로 행복한지를 알고 싶었기에 질문으로 직격한 것이었습니다. “… 그래서 목사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지체의 질문에 뭔가 상투적인 답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저도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목사가 행복하다는 것은 외형적인 목양의 크기와 내용이 아닙니다. 목사가 진짜로 행복하다는 증거는 주군과의 치열한 관계입니다. 마틴 부버가 말한 대로 ‘태초에 관계가 있었느니라’는 일침처럼 주군이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이고도 치열한 관계가 지금 나의 신앙적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건 목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말씀드린다면 저는 지금 참 행복한 목사입니다,” 인위적인 답변처럼 보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답변은 이 내용을 담지(擔持)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제 목회의 현장에서 세속이 업신여길 수 있는 일체의 것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하나님께 치열하게 질문하고 투쟁하며 살아왔다는 강변이었습니다. 왜 세속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기고 깔보고 비아냥거립니까? 누가 말해서 유명해진 것처럼 ‘같잖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정치인이 정치적인 의도를 담아 지극히 정치역학적인 의도로 말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같잖음’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게 살고 있음으로 인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수치는 당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도리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15-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순종하는 삶을 성실하게 감당하자 하나님 사람들의 대적들이 눈을 밑을 떨어뜨리는 낙심을 선물로 주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기 12:31-32절을 읽다보면 영적 쾌감이 극에 달하는 신앙의 오르가즘을 경험합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430년 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당신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로 마음먹고 일하셨습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어둠, 그리고 애굽 産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이시는 재앙까지 10번의 재앙을 내리심으로 출애굽 역사의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읽어드린 출애굽기 12:31-32절은 아홉 번의 재앙을 만났음에도 마음이 강퍅해서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던 바로가 자신의 장남을 포함하여 애굽에서 난 첫 소산물들이 다 죽는 것을 보고 최후의 진술을 한 보고입니다. 바로는 항복합니다. 너희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가도 좋다는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너희들이 기르던 일체의 가축까지 다 포함하여 가지고 나가도 좋다는 허락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지막 선언은 압권입니다. 그렇게 하되 그곳에서 ‘나를 위해 축복해 달라’는 애원의 소리 말입니다. 기억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세상이 항복하며 움직입니다. 이 교훈인 중요한 반면교사의 교훈을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일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일하시지 않고 그 결과 세상도 꿈쩍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다는 명제 앞에 우리는 통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면 세상이 움직이며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요구에 우리들이 항복하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제게 질문했던 지체에게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답했습니다. 토론이 끝난 다음 날, 토론을 계획했던 지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어제 목사님께 행복에 대해 질문하신 지체의 피드백은 다시 세례를 받는 것 같았다는 소회였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역자들 중에는 교회의 교회다움, 목사의 목사다움, 성도의 성도다움을 보지 못해 선한 영적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기에 나를 영적으로 파괴하는 제일 원인이 산발랏보다는 도비야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은 귀담아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6월 셋째 주일 예배 설교 제목을 ‘이걸 바라는 오늘이기에’라고 정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의 순종과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되면 대적들이 낙심하게 된다는 명징한 명제입니다. 나는 이걸 바라며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세인교회는 이걸 바라며 달려가는 교회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교회와 성도가 행하면 세상이 긴장한다는 교훈을 우리 교회 주차장 게시대(揭示臺)에 걸려 있는 6월 현수막 글귀를 읽어보셨습니까? “세인교회는 대한민국이 속도가 빠른 나라가 아니라 방향이 바른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생색내기 플랜카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는 우리 교회가 정말로 이 표어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인 교회가 먼저 방향이 바른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에서 물러서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에서 물러서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일에서 타협하지 마십시다. 이렇게 사역할 때 우리 세인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을 긴장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종교를 무시하는) 세대로 진입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흑암의 세대에 우리는 하나님을 말해야하는 운명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무기는 하나님의 식(式)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식에서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행복한 그리고 용기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