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4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느헤미야 16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6:10-14 제목: 영성이 있습니까? 서론) 지난주에 지수일 목사 1주기 추도예배가 파주에 있는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에서 진행되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많은 동기들이 1주기라는 의미 때문에 동참해 주어 친구의 1주기가 그렇게 외롭지 않았겠구나 싶어 감사했습니다. 추모식 후에 동기들과 식사를 하고 교제하는 어간, 친구 목사 한 명이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 하나를 화두로 던졌습니다. 이제 제 동기들이 현역에서 은퇴를 할 시기가 7년 여 남짓 남았기에 은퇴를 어떻게 준비할까도 대화의 의제가 되었는데 중형 교회에서 사역하는 친구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교회에서 서서히 후임 목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데 당회에서 회자하는 이야기가 들린다는 후담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학위가 있고, 목회 경력은 어느 정도의 스펙이 있고, 연령은 몇 살 정도이고 등등의 객관적인 자료들과 더불어 꼭 한 가지를 덧붙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참 슬픈 이야기이며 한국교회의 수준이라고 밖에는 볼 수 있는 웃픈 이야기였습니다. “말 잘 듣는 담임목사” 이것이 제일 중요한 후임 담임목사의 청빙 조건이라는 말을 친구는 아프듯이 내뱉었습니다. 작금 한국교회의 영적 자화상은 저기압을 깊게 드리운 기상도를 보여줍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불길한 기상도를 앞으로 헤쳐 나가는 것은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의 교회를 짊어져야 하는 목사들의 절체절명의 미션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교회를 짊어져야 하는 목사들의 영성은 온 데 간 데 없고 리모트 콘트롤러를 갖고 당회나 중추 기관의 직원들의 입맛에 맞게 흔들 수 있는 담임 목회자를 청빙하려고 하는 교회에 앞으로 무슨 희망과 소망을 걸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동체 중에 유일하게 교회 공동체는 세상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영성입니다. 담임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박사 수준에 걸 맞는 신학적 지식이 아닙니다. 담임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상담능력도 아닙니다. 담임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하기 위해 말씀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사역하려는 탁월한 목회 기술도 아닙니다. 담임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마케팅의 숙련된 방법론도 아닙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를 짊어져야 할 담임목회자는 성도들을 세속적 가치로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십자가의 케리그마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오순절적인 능력으로 가르치는 목회자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삶을 성령의 능력으로 견인할 수 있는 영성으로 무장한 목회자입니다. 이것이 배제된 목회자, 생존을 위해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기회주의적인 목회자가 교회를 맡게 되면 그 교회는 차라리 문을 닫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며 합당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영성으로 이끄는 성령 받은 평신도들이 세워가는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해 영성이 있는 목회자가 우선순위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살피다보면 느헤미야가 얼마나 엄청난 영성의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지난 15번째 강해를 통해 느헤미야가 대적들의 빈발하는 음모와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 위험스러운 공격들을 이겨 나아갔음을 살폈습니다. 하지만 대적들의 공격은 갈수록 지능화되었고, 심지어는 영적으로 진보되어 갔습니다. 무시무시한 사탄의 공세들입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이 구절은 주석적인 도움이 필요한 구절이기에 잠시 설명을 드립니다. 역대상 24:18절을 소개합니다. “스물셋째는 들라야요 스물넷째는 마아시야라” 들라야라는 인물이 소개된 성경적 자료입니다. 역대상 24장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 족보를 소개하는 구절인데 23대에 등장하는 인물이 들라야입니다. 본문은 들라야의 아들로 스마야를 소개합니다. 만에 하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들라야가 역대상에 등장하는 들라야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그의 아들 스마야도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을 것은 자명합니다. 또 하나 스마야가 제사장 직을 갖고 있었던 자라는 증거는 오늘 본문이 제공합니다.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권한 내용이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무르자고 종용한 대목입니다.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함께 가서 숨자고 제의한 은신처가 ‘외소’였습니다. ‘외소’로 번역한 히브리어 ‘해칼’은 성전 안에 에 있는 장소를 의미하고, ‘전’(殿)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바이트’는 면적이 ‘대단히 큰 집’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통상적으로 느헤미야 시대에 제 2성전을 가리키는 스룹바벨 성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제의한 것은 대적들이 너를 살해하기 위하야 자객을 보낼 터이니 피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성전이 안전하니 성전에 있는 성소로 피신하자는 제의였습니다. 이 제의를 받은 느헤미야는 본문 11절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느헤미야의 명분은 나는 제사장이 아닌 내가 어떻게 성전을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는 율법 사수의 차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의 금기 조항 중에 일반 평민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수기 18:7절을 소개합니다. “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 제사장 직분을 갖지 않은 자가 성소에 들어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단호한 경고가 담겨 있는 율법서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에 대해 직시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취사선택의 문제이지만 또 하나, 주석적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루터교 신학교의 야곱 마이어스 교수의 주장입니다. “느헤미야는 또한 환관이었기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면 이중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야곱 M, 마이어스, “국제성서주석-에스라, 느헤미야”, 217-218.) 느헤미야 1:11절에 보고된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는 구절을 마이어스가 바사 시대에 왕에게 술을 따르는 자들이 내시였다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주장한 학설인데, 만에 하나 그렇다면 고자 된 자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신명기 23:1절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율법을 범하게 되는 것이 바로 외소를 피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3:1절입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외소로 들어가서 신변을 보호하자는 스마야의 청을 거절한 표면적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스마야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이면적인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본문 12-13절을 읽겠습니다.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 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이것이 느헤미야가 스마야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이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마야의 변질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도비야와 산발랏 일당에게 뇌물로 매수된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뇌물로 매수되어 이스라엘을 저주할 뻔했던 것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민수기 22:17,37) 가롯 유다의 선택도 별 다르지 않은 맥입니다. (마태복음 26:15) 출애굽기의 보고에 의하면 뇌물은 대단히 부정적인 죄악을 지적합니다. 출애굽기 23:8절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뇌물을 받은 스마야는 느헤미야와는 막역한 친구지간이었지만 결국 스마야의 행태는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악을 말로 지어내 비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목할 단어가 12절에 등장합니다. ‘나카르’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 ‘깨달은 즉’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나카르’의 문자적인 의미는 ‘골똘히 쳐다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골똘히 쳐다보다’라는 ‘나카르’를 마크 트론 베이트 교수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 재해석하고 있는 데 주목할 만합니다. “다시 한 번 느헤미야가 스마야의 ‘예언’의 참 된 성격을 그처럼 쉽사리 분별해 낸 것은 그의 영적 통찰력의 깊이를 시사해 주며, 요한일서 4:11절 말씀 그대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지킬 것을 촉구한다.”(트론 베이트, “에스라-느헤미야, 현대성서주석”, 133-134)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바로 이 단어 때문입니다. “영적 통찰력” 트론 베이트 교수는 ‘영적 통찰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저는 오늘 이 단어를 설교 제목으로 바꿉니다. 느헤미야는 영성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영적 통찰력을 갖고 스마야의 저의를 파악할 수 있었던 능력은 바로 ‘골똘히 쳐다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 영성이란 영적인 민감함입니다. ‘풀’이라는 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수영 시인이 읊조린 ‘절망’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김수영, “김수영전집”, 민음사, 323.)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시인들은 사람들의 내면이나, 영혼을 다루는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발언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김수영의 시어 하나에서 영적 민감함을 발견한다고 말입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명답입니다, 절망이 왜 절망입니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인정하지 않으니 반성할 리 없습니다. 반대급부로 희망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왜곡과 뒤틀려 있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수긍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니 반성하고 반성하니 희망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 큐티 텍스트였던 사무엘하 22장을 보면 은혜가 됩니다. 1-51절에 기록된 신앙고백은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거의 완벽한 다윗의 고백입니다. 특히 그 중에 제게 대단히 민감하게 다가온 구절을 하나 발췌하라면 14-16절을 들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통상,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말년 작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다윗이 특히 이 구절을 노래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꾸지람, 콧김이라는 무소불휘의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다윗이 하나님을 이런 분이라고 믿고 의지했다는 점에서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가에 말입니다. 다만 대단히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이 정도의 영적 민감함을 왜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는 발휘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찰하다보니 숙연해졌습니다. 어찌 영적인 둔감함과 민감함이라는 갈림길에서 갈 지(之)자로 걷는 자가 다윗뿐이겠습니까?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죗성을 갖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언제나 우리는 우리에게 특별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골똘히 집중하는 것 말고 영적인 민감함으로 무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기억하고 영적 민감성을 말씀으로 키워나가고, 훈련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김기석 목사께서 저술한 책인 ‘말씀 등불을 밝히며’에 대한 북 콘서트가 청파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마침 감사하게도 유트브로 실시간 방송을 해 주어 행복하게 시청했습니다. 북 콘서트의 패널로 참여한 나희덕 시인이 책에 대한 소회를 나름 밝히고 청파 교회 교인이기도 한 그녀는 이렇게 짓궂은 질문을 김기석 목사께 질문했습니다. “목사님도 설교를 정말로 하기 싫을 때 있으실 텐데 그런 때는 어떻게 하시지요?” 질문을 받은 김 목사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책을 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보는 풍광들, 들에 핀 꽃들을 감상하다보면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설교하는 것은 팔자려니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산책을 할 때 많은 것을 얻습니다.” 방송을 시청하다가 나름 김기석 목사에 대한 애정이 있는 저로서 이런 감회에 젖어 보았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들에 핀 꽃들, 거리의 광경들, 그리고 새들이 짖어대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설교를 할 수 있는 거리를 찾아내는 것을 아무나 할 수 있나! 단언하건대 없습니다. 영혼의 촉수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닿아 있지 않은 자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영혼의 감동적인 엔카운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영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힘입니다. 영성은 작위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유일한 힘입니다. 영성은 우리들의 영혼의 촉수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닿아 있을 때만 자라나는 힘입니다.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던 ‘나카르’ 즉 ‘깨달음’의 영성이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