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2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7) 본문: 느헤미야 3:1-6 제목: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1) 서론) 지난 목요일,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에서 한국 대표 팀이 호주 대표 팀에게 7:8로 패배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언론들이 이 패배를 가리켜 충격적인 이변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보도했습니다. 당연히 대한민국 사람이기에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특히 이 날 패배에 대하여 모 기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교만함과 불성실함이 초래한 당연한 패배” 그도 그럴 것이 성실하지 않은 경기 태도로 인한 주루사, 상대 타자들을 얕보는 교만함 등등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이변이 아닌 당연한 패배였기 때문입니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된 호주와의 일전에서 쓰디쓴 패배를 자초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야구 선수단을 향하여 한 논객이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오늘 설교를 따오게 한 문장이었습니다. “우연한 승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역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필연적인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어야 승리한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승리는 우연의 일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걸 맞는 필요충분조건이 구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본론) 신앙생활의 영역은 더 더욱 이 문장이 적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영역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이 점을 증명해 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1-6절까지로 제한했지만, 3장은 전체 32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3장을 몇 주에 걸쳐 살피려고 하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아십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했다고 느헤미야 저자는 기록합니다. 3장 전체를 아우르면 성벽을 건축하면서 10개의 문이 언급됩니다. ⓵ 羊門 (1,32절) ⓶ 魚門 (3절) ⓷ 옛 문 (6절) ⓸ 골짜기 문 (13절) ⓹ 糞門 (13-14절) ⓺ 샘 문 (15절) ⓻ 水門 (26절) ⓼ 馬門 (28절) ⓽ 東門 (29절) ⓾ 함밉갓문-점호 문(31절) 성벽 재건 프로젝트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앞에서 열거한 10개의 문중에서 무너진 6개의 성벽 문을 다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다음 설교를 통해 다시 한 번 살피겠지만 3:1-32절 전체에는 75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75명의 직업은 15가지 정도로 분석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벽 재건 공사에 투입된 인원들의 자화상은 상당히 다양한 인물군(人物群)이라는 사실을 피력한 셈입니다. 그런데 특히 성벽 재건 시작을 알리는 본문 첫 구절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가 서술되었습니다. 제사장 그룹이 제일 먼저 건축 사역을 했는데 그들이 수축하고 재건한 문짝이 양문이라는 사실입니다. 1절은 이런 제 일의 사역을 담당한 자를 대제사장 엘리아십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12:10절을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스룹바벨과 함께 바사에서 귀환했던 제 1차 포로귀환자 중 성직자였던 예수아의 손자였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12:10절입니다.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고” 이 성경적 내증을 전제할 때 이런 추론이 가능합니다. 스룹바벨 제 2성전을 재건하는데 수훈갑은 제 1차 포로귀환의 지도자였던 예수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괄목할만했던 성직자인 예수아조차도 이루지 못한 성벽 재건을 손자가 이루었다는 사실을 느헤미야 기자는 의도적으로 삽입시킨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이 제일의 순서로 건축한 양문이 과연 어떤 문이었습니까? 캠브리지 대학교의 H.G.M 윌리암슨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양문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에 있었다. 요한복음 5:2절을 보면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양문(羊門)이라는 이름은 성전 근처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을 그곳을 통해 데리고 드나들던 곳이었기에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윌리암슨, “WBC-에스라, 느헤미야 주석”, 400) 윌리암슨 박사의 주석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시사점을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제사장 그룹에 있었던 성직의 임무를 맡은 자들은 10개의 문 가운데에서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드리던 장소인 양문 (sheep gate) 수리를 제일의 순서로 감당했고, 또 하나 이 양문 수리는 중수가 아니라 완전 건축으로 진행되었다는 보고는 결코 잊으면 안 되는 신학적 함의가 담겨 있는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승리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예배가 온전히 회복될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교훈에 대해 다시 부침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포로귀환의 사이클 도표를 통해 점검해 보십시다. 표 1: 포로 귀환 사이클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250-251)
표에서 보듯이 제 1차 포로귀환자 중에 레위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우여곡절 끝에 주전 516년에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8년 동안, 다시 말해 약 60년 동안 제사를 온전히 드릴 수 없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그룹이 귀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아와 같은 극히 소수의 인원만으로 제사를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성전은 존재했지만 제사의 회복은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제사가 회복되지 않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있으나마나 한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포로귀환 공동체의 제사 회복은 에스라가 약 40여 명의 레위인과 그들을 돕는 조력자 (세미-레위인)들 220명을 인솔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주전 458년 이후부터나 부분적으로 가능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무리가 아닙니다. 부분적이라는 단어를 제가 쓴 이유는 제사를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했다는 증거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귀환 이후 나름 제사 회복을 위해 분주했지만, 귀환공동체의 영적 회복의 가름대라고 할 수 있는 모세 시대에 드려졌던 제사 회복은 턱없이 부족한 제사장 그룹의 부족함과 훈련된 요원의 부재로 인한 어쩔 수 없이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성벽 재건은 꿈도 꾸지 못할 난관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숙원 사업이었던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대목이 양문의 건축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실체가 하나 있습니다. 무너져 있었던 6개의 예루살렘 성벽을 공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5개 성벽 문 공사 기사에서는 성벽 문을 ‘중수하였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하자크’입니다. 곧 말 그대로 수리한다는 단어입니다.. 반면 유독이 제일 첫 번째 수리한 ‘양문’은 ‘중수하였다’는 수리의 개념이 아니라 ‘건축하였다’는 단어 ‘바나’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느헤미야 기자가 그냥 의미 없이 기록한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양문을 수리할 때는 ‘바나’라는 단어로 사용한 것은 수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 만드는 건축했다는 것을 알림으로 양문 건축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양문 건축이 의미하는 21세기의 영적인 레마가 무엇일까요? 성도가 성도다워지는 것은 예배의 부분적인 회복이 아니라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때만 말할 수 있는 공식임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로나 3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밀어닥친 재앙의 절정은 예배 해석의 세속화입니다. 이렇게 정의할 때, 교우들이 혹시나 선입관을 갖고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미리 예단하는 누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한국 교회의 예배는 대면예배와 비대면 예배라는 이분화 현상이 벌어져 참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비대면 예배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 그룹들, 혹여나 목회자들이 대면예배에 나올 것을 권고하면 나는 지금 장소는 교회는 아니지만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따지듯이 항변하는 그룹이 약 30% 정도로 추측됩니다. 이들에게는 작금의 정황으로 비추어 볼 때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역자 그룹이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귀 닫은 치외법권 지역에 속해 있는 통계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근래,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사역하다 은퇴한 이재철 목사께서 개 교회를 담임할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진 신변 때문에 다양한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께서 택한 본문 구절은 다양하지만, 그분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는 가시적 교회인 예배당이 존재하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배당이 아닌 성도 개개인의 삶의 자리가 예배당인 교회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통하여 그동안 기형적인 교세 확장과 신자 수 불리기에 급급했던 한국교회를 정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기에, 하나님의 뜻과 진정성을 인지하고 비대면 예배도 인정하는 높은 수준으로 한국교회가 진보해야 합니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대면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고집하는 목회자들은 교회론을 잘못 이해하고 왜곡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목사께서 현직에서 사역하던 젊은 시절부터 그분의 목양 자세와 목회자로 사는 올바른 방향성을 제기할 때마다 음으로, 양으로 박수치며 응원했던 후배 중에 한 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사께서 평생 동안 사역해 왔던 목회관을 벤치마킹 해왔던 후배로서 그분이 무슨 의도로 현직 목사들에게 비난받기 십상인 메시지를 여전히 강단에서 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는 아니더라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라는 양분화 되어 있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첨예화된 갈등구조가 불러온 작금의 사태에 대해 많은 고민과 성찰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재철 목사께서 초청받은 교회에서 전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 가타부타를 평가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기에 극도로 발언을 절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재철 목사께서 전하고 있는 포스트 코로나로 접어든 2023년 교회 예배 담론에 대해 나름 비평적 성찰을 하나 던진다면 이것입니다.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의 예배 해석에 대한 제 문제가 걱정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가를 질문할 때 제 스스로의 평가는 자신 없다는 데에 그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조금 더 세밀하게 성찰하겠습니다. 대면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교회 예배를 하나의 취미 활동으로, 아니면 하나의 레저 활동으로 취사선택하여 고르는 21세기 형 인간의 트렌디 한 자유라고 선언한다면 유감스럽지만 괜찮습니다. 그건 신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고가 이런 것으로 굳어진다면 그건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건대, 비대면 예배를 통해 나는 영적인 부분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예배 정수를 맛보고 있다고 자위한다면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건 예배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 신학의 ‘예’자도 모르는 자가 자기만족의 일환으로 예배를 즐긴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의 만족을 충분히 느끼기에 그것에 대한 감사로 교회에서 요구하는 물질생활도 정직하게 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항변한다면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런 비대면 예배주의자들과는 투쟁하려고 합니다. 예배당은 거룩한 자들이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예배당은 죄인들의 굴혈과도 같은 곳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세속 공동체에서 나름 갑각의 두꺼운 껍데기로 포장하여 폼 나게 죄 짓던 자들이 버젓이 나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세속 공동체에서 만신창이가 된 자아를 질질 끌고 나와 천부여 의지할 것이 주님 밖에는 없다고 손들고 나오는 자들의 집합체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나만 거룩한 사람이 되어 주님께 자랑하기 위해 나오는 장소가 교회가 아니라,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죄인들이 서로를 부대껴 안으며 전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나는 장소가 교회 예배당입니다. 하나님께 때 묻은 손으로 내가 드릴 것이 없어 이 적은 물질을 드리지만, 물질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함께 드린다고 눈물을 봉헌하는 곳이 교회 예배당입니다. 클릭 한 번으로 깔끔하게 송금이 완료되었다는 자막으로 헌금 드리기 성공을 자축하는 자기만족의 예배 비즈니스를 즐기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엔카운터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난 금요일 새벽에 참석한 교우들에게 안수하라는 하나님의 조명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날 예배에 참석한 15 여명 정도의 지체들의 머리에 정말로 오랜만에 손을 얹어 안수했습니다. 안수남발에 대해 대단히 비평적 관점을 갖고 있는 저이기에 좀처럼 안수 사역을 하지 않지만 그날은 교우들에게 안수하라는 성령의 민감함이 저를 압도해서 교우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안수했습니다. 한 교우 머리에 손을 얹었는데 진동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성령의 민감한 교감이었습니다. 순간 숨을 가쁘게 쉬고 그 지체에게 제 말이 아닌, 성령의 언어로 강복하였습니다. 이 영적 교감은 하나님의 공동체 예배를 통해 소통할 때만 가능한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예배의 만지심과 체휼하시는 감동이 이런데 예배를 엔조이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아니면 예배 때우기의 모양새를 갖고 예배드리기를 포장하려는 시도를 어찌 묵과할 수 있겠습니까? 이재철 목사의 이야기도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비대면 예배를 통해 충분히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진정성이 있게 고백하는 교우들이라면 비대면 예배를 통해 21세기 형 예배자로 서십시오. 하지만 예배 즐기기를 위하여 비대면 예배를 드리려는 자가 있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종교인의 길을 가기로 양심선언을 하든지,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와 온전한 여러분의 양문을 새롭게 건축하든지 하십시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신 사사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신앙생활은 마하나임(하나님의 군대)들이 올라탄 군함에서 벌이는 영적 전쟁이지, 청풍호 유람선에 올라타 단양 팔경과 제천 10경을 유유자적하며 유람하는 관광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양문의 온전한 건축이 없이 우연한 영적 승리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신앙의 일신우일신을 사순절 세 번째 주간에 경험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여러분의 양문은 괜찮습니까? 건재하십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A-KEY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