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7번째 강해) 제목: 나부터 본문: 고린도전서 5:9-13 서론) 지금 우리 교회에는 주중에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두 개의 소그룹 모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요일 낮에 모이는 구원 그 이후 낮 반이고, 또 하나는 화요일 저녁 시간에 모이는 저녁 반입니다. 소그룹 모임이기 때문에 공 예배를 통한 설교에서 할 수 없는 심도 있는 나눔과 주제에 대한 담론들을 인격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서 참여자들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진행하면서 담임목사는 일반 예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감동들을 받습니다. 그것은 지체들의 말씀에 대한 객관화 작업입니다. 이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면 영적 팩트의 1인칭 적용입니다. 지난 주간에 있었던 저녁 반 나눔 중에 김기석 목사의 ‘삶이 메시지다.’에 나오는 한 구절에 소그룹 인원들이 천착했습니다. “‘너’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듯이 슬픔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기쁨은 기쁨일 수 없다.” 물론 김 목사의 이 토로는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여덟 가지의 복 중에 둘째 복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테제를 근거로 갈파한 글이지만 저는 지체들과 이 글을 나누면서 조금 그 범위를 승화시켰습니다. 마틴 부버라는 유대인 출신의 종교 철학자가 쓴 유명한 저서 ‘나와 너’(ICH UND DU)의 이야기로 연관시키는 것이었지요. ‘나’와 ‘너’는 태생적으로 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너’가 ‘그것’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가 이해타산의 대상으로 보일 때입니다. ‘너’가 나에게 유리한가? ‘너’가 ‘나’에게 플러스알파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존재인가? 로 ‘너’를 보는 순간 ‘너’는 비인격적 존재인 ‘그것’으로 전락되어 인격적인 관계가 단절됩니다. 그렇게 된 ‘나’ 와 ‘그것’ 이후의 그 사이에는 아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해석을 부버는 진행했는데 그날 지체들에게 이것을 전제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 의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럴 때 ‘너’의 아픔을 보면 ‘나’는 ‘너’를 위해 울게 된다는 주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의 복은 정답이라는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격적 관계를 갖고 ‘너’를 위해 우는 ‘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로해 주시는 진정한 복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 나눔이 있자마자 지체들이 공감하며 ‘너’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는 ‘나’가 되겠다는 소박한 다짐들을 했습니다. 낮 반 소그룹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을 나누었습니다. 그 날 지체들과 함께 나누었던 주제는 ‘원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는 다윗과 골리앗에 관한 사무엘상 17:31절 이하의 담론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이긴 것은 골리앗이라는 상대방의 크기에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행하셨던 원리의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설교자의 보충주석 포함) 지체들과 그날 함께 나누었던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원리는 어제는 ‘건져내셨고’, 오늘은 ‘건지시며’ 내일은 ‘건지실 것’이라는 원리였음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용했습니다. 이 원리가 나에게 있는가?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말씀, 언약, 율례 등등)를 나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주전 1,440년경(학자들 마다 조금씩 다름- 근래 구약학자들은 1,290-1,280년으로 보기도 함)에 있었던 출애굽사건이라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역사적인 팩트는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전거하는 과정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3500여 년 전의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 주는 1인칭 적용의 교훈이 무엇인가? 입니다. 그래서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출애굽의 교훈을 제 2의 출애굽 즉 죄라는 신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탈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이동하는 전거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 이 해석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저 역시 이러한 적용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대의 갭을 좁히는 간극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한다는 전제의 객관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함의를 도출하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아닌 듯 싶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적절한 성경 해석의 도출이 ‘나에게로의 적용’이라는 점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목가적인 가수인 정경화씨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나에게로의 초대’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는데 바로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나에게로 초대하여 가장 안전한 본문 해석을 해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자행된 음행의 죄(한 사람이 자행한 계모와의 공개적인 간음과 그 행위를 박수쳐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남성들)에 대하여 날 선 비판을 행한 것을 두고 적지 않은 부정적 반응들을 엿보게 해주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사실, 이 구절을 상세히 해석하려면 아주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더럼 대학의 바레트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에 보낸 편지는 전후서 두 개이지만 실은 그 외에도 2개의 편지가 더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소위 말해 서신A와 A-1 그리고 서신 B와 B-1로 규정되는 것들이라고 주석적인 해석을 내놓지만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이렇게만 이해하는 쪽으로 ‘너희에게 쓴 편지’라는 9절 전반절의 이해를 하고자 합니다. ‘너희에게 쓴 편지’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보냈던 A라는 편지에 앞서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편지가 오늘날에는 분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만 A 편지 이전에 보냈던 분실된 그 편지 안에는 간음에 대한 바울의 혹독한 비판의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아마도 그 편지 안에는 음행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담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기에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지체들 중에 음행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그리고 별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던 상당수의 남성 신자들이 바울의 편지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전 단락의 강해를 통해 살핀 대로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남성들은 계모와의 결혼을 과부를 돌보는 차원으로 해석하고 용인하려 했는데, 바울은 분실된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용인해 준 모든 사람들과 간부(姦夫)를 싸잡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바울이 보낸 첫 번째 편지(분실된 편지)에 대한 부정적인 반론들이 제기되는 반응을 보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음행에 따른 심판과 정죄에 대한 나름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교회의 치리에 대해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9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한 음행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제한폭의 부연 설명입니다. 이어지는 10-11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바울이 이 언변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10-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음란한 사람들과 탐욕이 많은 사람들과 사기꾼과 우상 숭배자와 같은 불신자들을 전혀 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음란한 짓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욕설을 일삼고 술 취하고 사기 치는 사람들과 사귀지 말고 그런 사람들과는 음식도 같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교통정리를 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할 분명한 대상의 설정입니다. 믿지 않는 저들이 아니라 나와 같이 믿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저들을 12-13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고, 나와 같이 믿는 자들을 ‘교회 안에 있는 자들, 그리고 이 악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인 12-13절을 확인해 보십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 쫓으라” 본문 해석을 통해서 선명하게 보이는 바울의 갈파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지극히 평범하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전언한 것은 세상의 음란한 사람들, 탐욕이 많은 사람들, 사기꾼들, 우상 숭배자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소개하고 저들의 죄를 회개시켜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할 전도 대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거부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세상에 있는 즉 밖에 있는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말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관계를 끊고 공동체의 회중에서 출교를 시키고 단절시켜야할 대상자가 누구라고 지적합니까?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이미 믿는 자들 중에 음행한 자들입니다. 그것을 덮어 준 자들입니다. 다시 현대어 성경 11절을 의미 있게 읽어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음란한 짓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욕설을 일삼고 술 취하고 사기 치는 사람들과 사귀지 말고 그런 사람들과는 음식도 같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선긋기가 보이십니까? 바울이 분리한 교통정리가 보이십니까? 출교 대상자, 교제 금지 대상자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음행자와 그 음행을 묵인해 준 공범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진중한 교훈을 우리들의 육비에 새겨야 할 시간입니다. ● 말씀의 적용은 언제나 나부터라는 교훈입니다. 11절을 오늘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여기에 기록된 ‘형제’라는 헬라어 ‘아델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공동체 안에서 묶어진 형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번역으로는 형제라는 단어를 ‘믿는다고 하면서’라는 공격적인 문구를 동원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형제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친구’ 기가 막힌 번역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도입한 것은 은 이 점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에는 나도 포함된다는 전제 말입니다. 바울은 음행, 탐욕, 우상 숭배, 모욕, 술 취함, 탈취함이라는 죄악에서 나는 예외라고 선언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언제든지 포함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단호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만일 이런 악을 행한다면 나를 비롯한 일체의 무리들은 공동체에서 축출시켜야 함을. 그렇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나에게 철저하게 냉정해야 합니다. 불편한 말씀은 나에게 더 철저하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어제 월삭 새벽예배 설교에서 잠시 언급한 요나의 이야기를 전 교우들에게 다시 한 번 전하고 싶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하교(下敎)에 복종하기 싫었던 요나는 여호와 얼굴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그 뜻을 꺾기 위하여 풍랑을 내셨고 배는 파선 직전에 이르게 됩니다. 배에 타고 있었던 사공들은 두려워하며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들을 배 밖으로 던지며 그들이 섬기는 신을 부르며 기도하는데 배 밑층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발견한 선장이 그를 깨우면서 네가 믿는 하나님께 간구해 보라고 다그칩니다. 세상의 소리가 잠자고 있는 하나님 백성을 깨운 것이라고 새벽에 선포했습니다. 이윽고 이 풍랑이 누구로 인함인가를 뽑는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당첨이 되자 배 안에 있던 선원은 물론 승객들이 요나를 압박하며 왜 이 배를 탔느냐고 공격합니다. 그러자 요나가 그들의 공격에 반응한 내용을 요나 1:8-12절은 이렇게 공개합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의 고백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는 선원들에게 이렇게 시인합니다. ‘나 때문이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원인의 제공자는 1인칭 단수인 ‘나’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적어도 지금 배가 이 지경이 된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음이라고 1인칭화 시키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 왕국 유다에 살고 있었던 평범한 농부인 아모스를 급히 부르셔서 그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북 왕국으로 이사하여 그들의 종교적인 중심지였던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라는 흉 예언의 소명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모스에게 하나님의 이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북 왕국 여로보암 2세 즉 가장 북쪽이 잘 나아가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북쪽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궁정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궁정 예언자들이라면 정치권력과 타협하여 무소불휘의 종교적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남쪽에 허접한 농부 출신의 아모스로서는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막강 파워 그룹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그들과 맞설 것을 종용하셨기에 아모스는 적지 않은 부담감과 압박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모스 전반을 읽다보면 이 예언서의 클라이맥스는 7장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벧엘에서 자행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과 범죄에 대한 맹공을 퍼붓는 아모스가 달갑지 않은 것을 인지한 북쪽 궁정 예언자의 대부인 아마샤가 아모스와 한 판 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모스 7: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아마샤 쪽으로 보면 아주 기분 나쁜 메시지입니다. 지금 북 왕국은 너무 잘 나가고 있는데 왕은 칼에 죽을 것이고, 북은 사로잡혀 이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메시지이니 얼마나 황당한 메시지처럼 보이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다. 아모스는 이번에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아마샤 개인의 가문에 저주를 내립니다. 아모스 7:17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아모스의 예언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적중하여 이스라엘은 주전 722-723년에 완전히 멸망하여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비극의 땅이 되었음을 압니다. 이 아모스의 예언을 아마샤는 가지고 있는 기득권적인 물리력으로 깔아뭉갭니다. 도리어 힘을 가지고 있었던 아마샤는 두 가지를 아모스에게 경고합니다. ① 북 왕국 이스라엘은 건재한데 자꾸만 멸망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왕을 모반하여 반역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② 아모스 너는 유다 사람이니까 이 곳 벧엘의 내 영역에서 떠나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언을 하면서 먹고 살라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참 예언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 예언을 본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아모스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곱씹습니다. 만에 하나 아마샤가 아모스의 예언의 말씀을 자기에게 겸손하게 적용하였다면 자기의 나라도 멸망이라는 화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 가문의 굴욕도 모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말입니다. 구약 성경의 두 가지 내증을 통하여 저는 오늘 아침에 우리 세인 지체들과 함께 강한 어조로 나누고 싶은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의 적용을 나에게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나라는 개인의 스펙트럼 안에서 나에게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은 자신의 걸작인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 답을 아주 간단하지만 그러나 아주 선명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p,13) 엘륄의 이 갈파를 떠올릴 때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를 새삼 느낍니다. 세상 속에 살아야 하지만 그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되는 존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 정체성대로 살기가 21세기 오늘,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제 질문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지 않은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이기에 이 길을 가는 구도자로서 그리 큰 실수를 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한 가지 길일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철저하게 적용시켜 사는 삶 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대의 어른이자 지성이었던 신영복 선생의 걸작인 ‘담론’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의 자기 개조란 두 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의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계속 물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변화의 대상이 제도가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pp,243-244) 제가 이 글을 읽은 것이 2년 전이었습니다. 이때는 우리 교회에서 양육 반이 활성적으로 진행될 때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양육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변화되었습니까? 를 묻는다면 솔직히 예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집중하고 투자하여 양육했는데 도대체 왜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를 저에게 누군가가 다그친다면 뾰족이 답변할 만한 내용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영복 선생이 제기한 담론이 저에게는 참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누가 압니까? 그렇게 물주고 키워내다 보면 결국은 다른 사람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구나, 바로 내가 문제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삶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 자리에서 탄생할지. 누가 압니까? 오늘 이 자리에 앉아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말씀의 적용은 나부터’이구나 하는 감동에 사로잡혀 결국은 변화의 삶을 살아내는 자가 지금 이 순간부터 탄생할지. 누가 압니까? 지난 화요일, 저녁 소그룹 모임에 참석한 지체 중의 한 명이 ‘나’를 위한 눈물은 수없이 흘렸지만 ‘너’를 위한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수치감이 팽배했는데 이제부터라도 정말로 ‘너’를 위한 울음을 울어보겠다고 결심하고 그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또 다른 자가 여기에서 탄생할지. 누가 압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리를 붙들어야 하는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임을 깨닫고 오늘 예배당에서 그 붙듦을 실행하기로 결의한 자가 여기에서 탄생할지.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