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6번째 강해) 제목: 좋은 떡 만들기 본문: 고린도전서 5:6-8 서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은 찌개류의 반찬들입니다. 된장찌개, 청국장찌개, 매운탕, 두부찌개 등등. 지난 주간에 아내가 끓여준 김치찌개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근래에 보기 힘든 정도로 맛있는 찌개를 끓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가 끓이는 김치찌개보다는 약 2% 부족합니다. 김치찌개가 맛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물의 양이 적당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것으로 국물은 내느냐? 도 맛 차이를 냅니다. 멸치로 국물을 하는 경우, 고추참치로 하는 경우,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국물을 내는 것 등등을 비교해 볼 때 각 자의 맛이 다릅니다. 또 하나 레시피를 드린다면 어떤 불 세기로 끓여야 하는가도 중요합니다. 맨 처음부터 센 불로 할 것인가? 아니면 약한 불로 하나가 강한 불로 끓일 것인가도 김치찌개의 맛을 감칠맛 나게 하는 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요리법으로 김치찌개를 맛 잇게 하는 소프트웨어라고 한다면 김치찌개의 맛을 가장 결정적으로 맛있게 하는 것은 하드웨어인 김치가 맛있어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김치가 맛이 없다면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의 소프트웨어적인 요리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너무 상식적인 말 같지만 김치찌개가 맛이 있으려면 당연히 김치가 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부천의 모 식당은 김치를 2년, 5년, 10년을 숙성시킨 뒤에 만드는 김치찌개 전골집이 있다는 데 한 해 평균적인 매출이 6억 정도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리된 음식이 맛이 있으려면 재료가 좋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이 법칙은 영적 생활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설교들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의 치명적 범죄가 음행이었다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심각한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은 그 음행을 범한 사람이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납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서 해야 하는 치리 즉 징계를 하지 않았다는 공동의 범죄였습니다. 이것은 직시한 바울은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바울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혜안을 오늘 본문에서 여지없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예리한 선언을 누룩의 비유를 통해 신랄하게 통타하고 있습니다. 6-7절 본문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대체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누룩’(쥐메)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사용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단어로 사용되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단어로 쓰입니다. 먼저 긍정의 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구절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13:33절일 것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상징 표현으로 이 구절에서 누룩을 인용하신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누룩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정적인 의미로 누룩이 사용된 구절은 출애굽기 12:15절일 것입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유월절 관례를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으로 누룩 넣은 빵을 언급한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누룩의 의미는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견고한 유지를 위하여 일체의 누룩을 제거하여야 함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유월절 절기 7일 동안은 반드시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 전통은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울에게도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에게 편지하던 바울은 할례주의자들의 악한 소위를 경계하면서 이렇게 역설한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서 5:9)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 중에 음행을 한 자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자들을 누룩으로 비유한 듯합니다. 음행한 사람이 아니면 음행을 용인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암묵적인 묵과라는 일체의 것들을 싸잡아 누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이 관점에서 7절을 읽으면 분명한 관점이 보입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고린도교회는 원래 죄와는 거리가 먼 ‘누룩’이 없었던 공동체였다는 선언을 담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스며들었습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태의 중대함을 인식한 바울은 이미 온 몸에 독이 퍼져 죽게 된 몸이 되기 전에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이 선포와 더불어 바울은 누룩 없는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유월절의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누룩으로 덧입을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행을 저지른 것이나 그것을 용인한 것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도찐개찐입니다.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는 본문에 기록된 고린도교회에서 횡행하던 음행과도 같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을 기막힌 표현으로 정의했습니다. “적극적인 묵과 그리고 기쁨과 끈질김으로 행하는 죄악” 바울은 음행이라는 죄악이 고린도교회를 병들게 하는 누룩임을 인지하였기에 이렇게 누룩을 경계할 것을 선언한 뒤, 본문 마지막 절에서 또 다시 선포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기막힌 표현입니다. 저는 마지막 8절에 표현된 ‘명절’이라는 이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는 존 캘빈의 해석을 지지합니다.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를 통한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흘리심으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을 믿는 구원 받은 공동체 즉 바울이 본문에서 표현한 그대로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7절 전반절에 기록된 ‘너희는 원래 누룩이 없는 자’라는 구원 받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출애굽의 유월절이 아니라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영적인 유월절입니다. 해서 캘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옛날의 유월절은 과거의 축복의 기념일뿐 아니라,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수단으로서 오신 예수님의 성례인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선함을 얻을 수 없으니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매일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께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은 단 한 번만으로 유효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영적인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캘빈 고린도전서 주석,p,164) 이제는 우리는 이런 해석을 기초로 하여 영적인 유월절에 먹어야 하는 누룩 없는 떡이 무엇인지를 설교의 교훈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다시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바울의 독특한 수사적인 표현으로 누룩 없는 떡이 어떤 떡인지를 알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천명한 누룩을 대신하여 첨가할 떡의 재료를 볼 수 있습니다.
1) 순전함이라는 재료입니다.
‘순전함’으로 번역한 ‘에일리크리네이아스’는 직역하면 ‘순결’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입니다. 이 시대에 순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여학교에서 순결 서약식을 한다든지, 근래에는 동성애에 대한 부분까지 영역이 확산되어 이성애에 대한 서약을 한다든지 등등의 육적인 순결과 연관하여 설명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로만 국한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순전함이라는 단어도 음행이 만연되어 있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전제하여 본다면 순결함과 순전함은 아마도 일맥상통하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언급한 ‘에일리크리네이아스’를 성경 전반으로 확대할 때 저는 도리어 영적 순결함의 개념이 더 적확하다고 봅니다. 영적 순결함을 말할 때 아주 적절한 예가 바로 다니엘의 예일 것입니다. 다니엘 1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의 포로 신세로 볼모가 되어 잡혀 와 있었지만 이방신에게 드려진 산해진미를 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채식만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의 주제절과 같은 중요한 구절이 바로 1: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여기에 기록된 ‘뜻을 정하여’라는 이 문구를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됩니다. “마음을 곧추 세웠다.” 저는 다니엘의 이 고백을 접할 때 항상 느끼는 감흥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독했을까? 의 감회입니다. 예레미야 5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온 소년들이 상당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52:28-30절을 소개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간 자가 팔백삼십이 명이요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 상당히 많은 숫자입니다. 이 무리 중에 포함되었을 귀족과 왕족들의 수는 역시 상당했을 것이고 이들 중에는 유다의 미래들이 포진되어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함수관계로 접근해 보십시다. 느부갓네살은 유다라는 점령한 나라의 민족적, 정신적인 탯줄을 끊어버리는 일로 최상의 카드를 선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귀족과 왕족들의 일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와 바벨론의 문화, 정치, 사회, 종교까지 두루 섭렵하게 함으로서 소위 말하는 유다 정신과 종교를 잊게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 중에 특히 느부갓네살이 주목한 대상은 젊은이 그룹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다의 잠재적 미래였고, 그들은 그래서 바벨론의 미래적 정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바벨론화 시키면 유다라는 자그마한 나라는 물리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 자연 도태될 것을 느부갓네살은 확신한 것입니다. 해서 다니엘은 강제적으로 바벨론 왕궁에서 바벨론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는 다니엘이 바벨론 문화 주입에 대하여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니엘 1장을 보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 의해 통제되던 다니엘은 왕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를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다니엘이 이것을 거절한 것이 1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니온 신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한 시블러 타우너 교수는 다니엘이 이 음식에 대하여 거부한 이유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우선적 의무를 수행할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왕에 대한 의존적 상징을 거절한 듯하다. 다니엘이 피하려 했던 부정함은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 부정이었으며, 비록 왕의 정책이 장래에 어떻게 결정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왕에 대한 충성을 암암리에 요구하는 교묘한 칭찬과 선물을 거부한 것이다.” (현대성서주석, 다니엘,pp,54-55) 무슨 말입니까? 단순하게 다니엘이 거부한 것은 왕이 하사한 진미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이방 문화의 정신을 거부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시블러 박사의 해석에 집중하는 이유는 ‘순전함’이라는 단어 해석에 시의적절 했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사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다니엘의 이 뜻 정함은 바벨론의 정신을 거절한 것입니다. 왕이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바벨론식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였기에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그래서 두려운 일이기도 했고 철저하게 고독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유월절을 섬기며 먹어야 하는 음식은 누룩을 제거한 음식입니다. 누룩을 제거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세속적 정신의 혼합을 거절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신 느부갓네살의 산해진미라는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베벨론에서의 성공과 안락함과 편안함이라는 MSG를 넣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 찌개의 맛을 고도로 높여주는 유혹은 MSG를 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MSG를 넣는 순간, 김치찌개의 본연의 맛과 담백함은 상실됩니다. 우리들이 신 유월절의 누룩 없는 떡 대신에 추구해야 하는 떡은 순전함이라는 재료가 들어간 떡입니다. 순전함을 재료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떡 만들기에 성공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진실함이라는 재료입니다.
8절을 다시 말합니다.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진실함은 헬라어 ‘알리데이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두 측면에 걸친 뜻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① 객관적인 진리와 사실 ② 주관적인 경험적 진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어떤 결론에 도착합니까? 상식입니다. 이 시대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상식의 실종입니다. 이 시대에 왜 리더십이 무너졌습니까? 상식의 실종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첫 번째 위기인 과부 구제의 실패가 왜 일어났습니까? 사도들이 집중해야 하는 말씀 전하기와 기도하기라는 상식을 제쳐두고 접대하는 일(구제하는 것까지 포함하여)에 정신줄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 분열의 위기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상식인 기도하기와 말씀 전하기라는 상식으로 제자들이 환원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진리와 사실은 상식이라는 테제입니다.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의 사실은 상식이라는 테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음행에서 떠나라고 권함은 물론 음행을 용인하는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묵과나 기쁨과 끈질김으로 행하는 죄악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제가 섬기는 셀에서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지체 한 명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서울의 유명한 모 교회에서 세습을 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왜 그러려고 하지요?” 질문을 받고 그 지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인데 우리 밥 맛있게 먹어요.” 혹시 이번에 그 지체가 말하는 교회에서 말 그대로 변칙적인 세습(제가 표현하는 법으로는 아주 소위가 악한 세습)을 하게 되는 일이 공식적으로 진행되면 모르긴 몰라도 젊은 신자들 중에 또 엄청난 숫자가 가나안(안나가) 신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경남에 있는 아주 자그마한 미 자립 교회에서 평생을 목회한 선배께서 작년에 은퇴를 했습니다.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사례비를 받는 교회이기에 누구도 그 교회에 부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후임자를 물색하고 또 물색하다가 도무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아들 목사에게 타진했습니다. 이윽고 아들 목사가 고민 끝에 수락을 했고, 그 힘든 교회를 물려받았습니다. 지방회에서 그 힘든 교회를 맡아 대를 이어 가난을 이어받고 목회를 하겠다고 나선 그 아들 목사에게 박수와 갈채가 이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세습이 완료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 목사는 이렇게 대를 이어 가난의 대물림 받은 교회에 대해서도 저는 긍정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서울의 모 대형교회가 법망을 피해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려고 하는 일의 9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여론이 너무 나빠 확정 발표만을 미루고 있지만 여론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으면 세습은 완료될 것입니다. 세습을 찬성하는 자들의 성경적 빌미는 제사장은 세습되었다는 것을 토대로 삼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오늘날 목사라고 해석하는 성경 무지론자들 하고 토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교회의 세습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런 성경적 무지론자들과의 대화 불가가 아닙니다. 정말로 반대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상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공의가 담보된 공평한 일이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평하지 않은 게임을 하면 안 됩니다. 상식은 공평한 것입니다. 이미 지교회에서 승리한 목사가 아니라 성공한(?) 목사가 제반적인 제왕적 통치로 점령한 교회에서 아들과 다른 목회자들과의 경쟁을 시킨다는 자체는 어불성설입니다. 하물며 이런 경쟁 자체도 불공평한데 아예 경쟁 대상자를 없애고 배제한 뒤에 단독으로 아들을 후임 목사로 앉히는 것은 패착 중에 패착입니다. 소위가 아주 나쁜 일입니다. 상식은 공정성을 담보합니다. 그래서 세습은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사라져야 할 제거 일순위의 악질 요소입니다. 진실함의 떡 재료는 상식이 통하는 삶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지체 여러분! 바울은 이렇게 본문 8절에서 선언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나는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가 새로운 재료를 집어넣은 영적인 유월절 떡 먹기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묵은 누룩이 들어간 떡,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을 넣은 떡 말고 세속적 가치가 요구하는 정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선포된 정신을 담보한 그런 순결함의 떡을 만들기를 원하고, 적어도 그러기 위해 상식이 통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왕 떡을 만들려면 좋은 떡을 만들어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