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1:4-11
제목: 출발이 좋았습니다.
서론)
일이 있어 충주에 가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일부러 가는 식당이 있습니다.
보쌈 정식을 하는 식당인데 가성비 대비 정말 괜찮은 곳으로 애용하곤 합니다.
얼마 전에 들렸을 때는 점심시간 1시간 전이었는데, 벌써 단체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고, 식사시간 내내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면서 이 식당은 왜 이렇게 잘 되는 거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성비가 좋다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식당에 가면 이런 조그마한 알림 글이 있습니다.
“우리 가게의 명예를 걸고 고객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우리 식당은 결코 남은 음식을 재활용하거나 재고 음식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00M 달리기보다 1,000M 달리기를 더 잘 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식당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철학을 알려줌으로 인해 고객들에게 안심하고 다시 찾아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고, 또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소프트웨어적인 서비스를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고객이 이 식당을 충주라는 낯선 도시에 가면 꼭 다시 들리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 이유는 식당을 다시 찾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음식이 맛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외적인 서비스가 만점이라고 하더라도 음식 맛이 없으면 손님들은 다시는 가지 않습니다.
식당 경영의 가장 결정적인 하드웨어는 맛입니다.
맛이 없는 식당을 간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식당의 본질적인 승부수는 맛입니다.
저는 이 테제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오는지를 이렇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맛을 내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르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주전 586년에 유다는 멸망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멸망은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충격이었습니다.
다윗 왕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견고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토록 아름다웠던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다는 것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솔로몬 성전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에 짓이겨졌고, 돌 위에 돌 하나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때의 비참함을 예레미야 애가는 이렇게 울며 피력합니다.
애가 1:1-3절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이렇게 절망적인 멸망을 당한 유대는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통하여 회복의 빛을 전하셨습니다.
주전 538년에 솔로몬 성전을 초토화시켰던 영원할 것 같았던 바벨론이 바사의 고레스에게 정복됨으로 그 국운을 다하고 패망합니다.
바벨론을 접수한 바사는 본인이 바사를 세운 해였던 주전 538년에 칙령을 발표했는데 48년 전이었던 568년과 그 보다 10년 이전이었던 578년부터 바벨론으로 끌려왔던 유대인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을 누구나 고국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유화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로 인해 포로로 끌려왔던 1세대는 물론, 바벨론에서 탄생한 2세대까지 자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토록 바라고 그리던 예루살렘 귀환이라는 꿈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왔던 약 50,000여명의 제 1차 포로귀환자들은 고레스의 도움으로 무너져 버린 솔로몬 성전 터에 초라하기 그지없기는 했지만 제 2 성전으로 지칭되는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여 주전 516년에 봉헌하는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예언자 학개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 거민들의 집요한 반대로 인해 16년 간 재건이 중단 되었던 제 2 성전을 재건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성전 건축에 참여한 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독려합니다.
이런 독려로 인해 다시 성전 건축을 재건하여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학개의 예언처럼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재건은 요원했고, 그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극단적인 표현으로 묘사한다면 학개는 거짓 예언을 한 셈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예루살렘은 그냥 예전처럼 성전만 재건된 상태였지, 무슨 극적인 승리가 일어나지 않은 답보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예루살렘 성읍의 영적 상태는 더 피폐해졌고,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 2성전을 재건하기까지 했던 귀환 세대들이 영적으로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고, 유다가 무너지기 직전의 남 유다의 상태로 추락하기까지 합니다.
혼합주의가 판을 치고 고리대금업자들이 서민들을 농락하는 등등 다시 멸망 직전의 영적 상태로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기막힌 일을 목도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어 바사에 살고 있었던 율법학자이자 제사장출신이었던 에스라를 부르셔서 예루살렘으로 급파하시기에 이릅니다.
소위 말하는 제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영적 상태가 악화 일로에 있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다시 율법을 가르치고 교육하며 잘못된 혼합주의적인 내용들을 일소하며 예루살렘의 영적 갱신에 나름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스라가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주전 5세기 중반 그러니까 주전 446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온 느헤미야가 친척 중에 한 명이었던 하나니와 일행 두 세 명의 보고를 받습니다.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기는 느헤미야를 염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 것처럼 그들의 보고는 참담하기까지 했습니다.
느헤미야 1:3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이 구절에서 문자적인 추론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런 추측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남 유다 멸망 이후에 탄생한 2,3세대들이었거나,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백성들의 2,3세대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들이 보고 느끼고 있는 예루살렘의 상태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도 현재진행, 능욕을 받는 것도 현재진행,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졌고, 성문들이 불타고 있다는 것도 현재진행이라는 비참한 보고였습니다.
저는 하나니 일행이 가지고 돌아온 보고의 내용 여부를 예루살렘 멸망의 트라우마 라는 고통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자들에게 현재진행 중이라는 해석으로 3절을 접근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느헤미야가 소식을 전해 듣고 제일 첫 번째로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그렇습니다.
느헤미야의 첫 번째 반응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본문 4절에서 두 가지였음을 보고합니다.
눈물의 기도와 금식 기도였음을 밝힙니다.
이 두 가지의 기도 내용은 공통적으로 비상의 기도를 드릴 때 동반하는 행위들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루터신학교 트론베이트 교수는 5절 기도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문제의 진정한 근원이 이스라엘이 계약을 다 지키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을 분별해 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라고 간구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치욕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이 이 도시의 참담한 상황이라는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트론베이트, “현대성서주석-에스라,느헤미야기”, 105)
트론베이트 교수의 말대로 느헤미야는 이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본인의 기도를 역사의 주체이시자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학개를 통해 예언했던 장밋빛 청사진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인해 좌절의 극을 달리고 있었던 예루살렘 귀환 공동체의 영적 무너짐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주체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느헤미야를 통해 다시 재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드린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 충분히 주관화할 수 있는 죄의 원인을 객관화시키는 치열한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내용은 정말로 감동입니다.
6-10절을 나눕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 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느헤미야는 바사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3세대 자녀로 추측됩니다.
그가 주전 445년 11-12월로 산정되는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에 하나니의 비극적인 보고를 들었고, 그 후 약 4개월 뒤인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인 주전 444년 3-4월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들어가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는 청원을 합니다.
그렇다면 연대기적으로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는 유다가 멸망을 당한 이후 약 1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한 세기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그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오늘 본문 기도내용을 통해 마치 그가 150년 전 남 유다가 멸망할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더불어 자기도 남 유다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공범자처럼 사죄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6절에서 느헤미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6절 중반절)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 (6절 하반절)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정수가 보입니다.
열조가 지었던 죄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곧 나의 죄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충격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자행했던 죄에 대한 연대적인 죄 값을 후손 모두가 받았기에 이 죄에 대한 연대적인 책임도 함께 져야 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 기도의 출발은 자신과 전혀 관계없이 일어난 이스라엘 선조의 죄를 주관화하지 않고 객관화하여 후손인 자신의 죄로 연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출발이 너무 좋은 출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의 교묘함은 연대적인 죄에서 슬며시 빠져 나오게 하는 모략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던 날, 충격적인 예언을 하나 던지셨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나를 팔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을 받은 제자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에게 3년 간 주님과 동고동락했던 자들 중에 한 명이 자기를 판다는 말을 그대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통보를 받은 제자들의 반응을 마가복음 14:1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렇습니다.
사탄의 계략과 세속적 가치의 나라에서 획책하는 비열함은 유리한 것은 객관화시키지만 불리한 것을 주관화시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작업이며 시작입니다.
기도라는 것의 정의가 이런데 기도를 하는 자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기도의 주체에게 빼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는 행위이겠습니까?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자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한 태도입니다.
기도는 자신부터 불리한 것을 안고 가겠다는 선언이자 선포의 행위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위대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기도를 시작한 느헤미야는 그래서 본문 11절 마지막 절에서 또 다른 위대한 결론을 맺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다음 주일에 교우들과 나누겠습니다.
하지만 미리 맛을 본다면 아주 단순한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나를 예루살렘에 갈 수 있도록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기에 11절은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라는 당대 고대 근동 최고의 패권 국가의 수반의 경호실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느헤미야는 식민지 계층의 백성으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신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생각을 할 때, 느헤미야의 기도 내용은 대단히 손해 볼 짓이었습니다.
너무 잘 나가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의 보고에 따르면 사람 살기가 매우 열악하고 황폐한 땅에 솔선수범하여 가겠다는 기도였으니 느헤미야의 기도는 정말로 바보 같은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런 어리석기 그지없는 기도에 응답 받기 위해 울며, 금식하며 4개월간을 기도합니다.
철저히 기도 내용을 객관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기도는 철저히 자신에게 임할 불리함을 배제하기 위해 주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받겠다는 객관화 작업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가 남긴 유고의 글을 묶어 제자들이 출간했습니다.
그의 글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첫 번째로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마지막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될 때 기도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려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복 있는 사람, 147.)
기막힌 기도에 대한 통찰입니다.
적어도 유진 피터슨이 행한 이 기도의 정의에 동의하려면 기도의 제목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느헤미야는 이런 기도를 드렸던 선도적 위치에 있었던 평신도 사역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성벽 재건의 첫 걸음은 대단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아름다운 기도의 걸음에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제 권사회 월례회 예배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4-8절을 근거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명예 권사님들은 가시의 기운으로 인해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 기도로 후배들의 본이 되라고, 시무권사님들은 습기가 없어 씨들이 말라버리지 않도록 기도의 눈물로 습기를 만드는 사역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의 공통분모는 자기를 희생하는 기도 사역자가 될 때 가능함을 전제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기도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당들이 하는 푸닥거리가 아닙니다.
기도는 종교적인 쇼맨십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경주입니다.
기도는 은혜의 길에서 탈락되지 않도록 하는 아딧줄을 붙드는 것입니다.
놓치면 안 되는 생명줄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2023년 기도의 내용을 내 기도로 객관화하고 좋은 출발을 딛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