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2:18-29
제목: 대강절 살아내기 (2)
서론)
신학생 시절, A,J 크로닌의 걸작 ‘천국의 열쇠’를 만났습니다.
이 위대한 작품을 만났을 때가 신학도 시절이었기에 저는 현장에 나가면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작품을 통해 밑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치셤과 안셀름 밀리는 가톨릭 신학교의 동기생이었습니다.
안셀름 밀리는 기득권 가톨릭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걸었던 편안한 길을 걸어 그 역시 가장 안정적인 요직을 두루 차지하며 주교의 자리에 이르고 승승장구하는 성직자의 길을 간 대명사가 됩니다.
반면 그의 동기생이었던 프랜시스 치셤은 가톨릭 정통 보수주의의 길을 걷지 않고 도리어 반골적인 기질로 인해 평탄하지 않은 사제의 길을 선택합니다.
교권적인 가톨릭 체제에 잘 녹아들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신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서 무단이탈한 죄 때문에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지 못할 뻔했던 치셤이었지만, 담당 사제였던 맥납 신부는 치셤의 내면 안에 있는 영성을 보고 그를 구원해 주어 신부 서품을 받게 했고, 치셤은 결국 모두가 기피하는 중국 파이틴으로 파송 받아 그곳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낮은 자와 함께 하는 사제로 사역합니다.
두 사람의 길을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은 지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저를 흥분하게 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치셤이 사역하던 선교지에 페스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비규환에 빠지고 생명을 잃게 됩니다.
바로 그 때 무신론자 의사 윌리 탈록이 페스트로 죽어가던 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그 역시 페스트이 감염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의 임종을 보던 치셤이 탈록과 나누었던 대화는 30년 이상이 지났지만, 내게는 영적인 화살이 되어 꽂혀 있습니다. (A,J 크로닌, “천국의 열쇠”, 섬앤섬, 376)
탈록: 이상하지? 나는 아직도 신이 믿어지지 않아.
치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탈록: 그게 무슨 상관이냐니?
치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나님께서 자네를 믿을 텐데.
탈록: 이 사람아. 무리하지 말게. 나는 회개하지 않아.
치셤: 인간의 괴로움, 그게 다 회개하는 행위라네!”
이 구절을 교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에게도 구원이 임했다고 말하는 치셤을 이단이라고 몰고 갈 것입니다.
하지만 교리적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탈록이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해석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사랑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 지로 해석할 것입니다.
제가 크로닌의 이 글을 만났을 때 가졌던 우선적인 생각은 목사가 품어야 할 대상자를 갈라치기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금석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하게 지녀야 할 가치는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교리는 종교적인 체계에서 만들어낸 인간의 규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교리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교리가 아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원뜻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은 가장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자 기초가 되는 가치입니다.
본론)
본문을 읽다보면 두 개의 산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개의 산은 시내 산이고, 또 하나의 산은 시온 산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소개하며 전개하고 있는 두 산에 대한 해석을 지금부터 교우들에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⓵ 시내 산에 대한 해석입니다.
본문 18-2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시내 산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다다른 곳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받던 시내 산이 아닙니다. 그 산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며 검은 구름과 짙은 어두움에 싸인 채 폭풍이 일고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산이었습니다. 그때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이상 말씀하시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짐승이라도 이 산에 닿기만 하면 돌로 쳐 죽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나 두려워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모세도 무서워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조금 이해가 쉬워지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시내 산을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시내 산을 율법으로 상징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히브리서 여행을 진행하면서 율법의 불완전성에 대해 계속 짚었습니다.
그 불완전한 율법의 상징적인 그림으로 시내 산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에모리 대학교의 토마스 롱 교수는 시내 산에 대한 등장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설교자는 시내 산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으로 인해 이전의 모든 제사가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 행해지고 있는 모든 종교적 행위의 대명사로 시내 산을 내세 운 것이다.”(토마스 롱, “현대성서주석-히브리서”,p,244)
율법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지탱하는 신호등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버리지 못하는 폐쇄적인 유대인들을 경종하기 위해 히브리서 저자는 시내 산을 등장시킴으로 그곳에서 십계명을 하사 받은 모세마저도 두렵고 떨리는 장소(21절)라고 토로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접근 불가의 성역과도 같은 두려운 곳이 시내 산이었습니다.
타오르는 불이 여전히 있고, 어둑 캄캄한 곳이 시내 산이었습니다.
짐승조차도 접근하면 돌로 침을 당하는 장소가 시내 산이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은 하지만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 대명사입니다.
그런데도 배교를 하려는 위험한 인물들이 그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음을 저자가 질타한 것입니다.
⓶ 시온 산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본문 22-24절을 읽습니다.
역시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다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 곳은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 그리고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로운 사람들의 영이 있는 곳입니다. 또 우리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과 복수를 호소하던 아벨의 피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피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시온 산 해석은 시내 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시온 산을 하늘의 성이라고 명명된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시온 산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거하는 장소이며, 의로운 사람들이 거하는 장소라고 소개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벨의 피보다 더 은혜로운 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전혀 다른 특성을 갖고 있는 두 산을 소개한 히브리서의 설교자는 독자들에게 이어서 중요한 권면을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 텍스트 중에 레마를 찾을 수 있는 25-29절을 나누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25절의 메시지는 대단히 선명합니다.
이미 독자들에게 전해진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는 경종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오늘 본문에 의거하여 적용하자면 결코 시내 산으로 등산하지 말고, 시온 산으로 등산하라는 권면을 한 셈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강력한 경종을 던진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토라(율법)를 전한 모세의 말을 거역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심판을 하셨는데, 어찌 하나님이 전한 말씀을 거역하는 자에게 심판이 임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한 저자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하늘을 움직이는 날이 이르면 이 땅에서 흔들린 모든 것들을 제거하시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하지만 시온 산에 올라온 하나님의 성도들은 땅이 흔들리고 세상이 심판을 당하는 그 날이 오도라도 흔들림이 없이 견고한 나라에서 안전하게 거하게 될 것임을 명료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사실이 빈 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마지막 구절 2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며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유진 피터슨은 29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분은 불이십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강력한 권위를 재천명한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두 번째 주일,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주일에 받아서 살아내야 하는 레마는 무엇이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살아내야 합니다.
다시 25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을 외면하지 말라는 저자의 외침일 것입니다.
본문 정황에 맞추어 적용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오라고 명하신 시온 산에 올라오지 않고 굳이 두렵고 떨리며 어둑 캄캄한 시내 산으로 올라가려는 배교자들을 향한 경종일 것입니다.
기도원에 들어갈 때 가지고 올라간 책이 있었습니다.
제 신약선생님인 김판임 교수가 집필한 ‘워킹 위드 지저스(walking with Jesus)’입니다.
독서를 마치고 서평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 한 부분을 교우들과 나누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17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한 구절입니다.
김 교수는 베드로와 안드레 소명 메시지를 한 신학자의 독특한 단어를 인용하며 풀었습니다.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두 명의 제자를 부르실 때 사용했던 ‘나를 따르라’라는 문장을 ‘Anrede’라는 단어로 사용했다. 이 단어에서 ‘Rede’는 ‘말’이라고 번역하지만 ‘Anrede’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An’은 전치사로 ‘〜에게’로 이해하면 옳을 것이다. 이대 교수를 역임한 허혁 교수는 불트만의 이 단어를 고민한 끝에 ‘걸어오는 말’이라고 번역했다. ‘걸어오는 말’, 불트만 같은 학자는 사람의 인생이란 걸어오는 말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p,35)
이 글을 읽다가 눈이 번쩍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행하셨던 방법은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말을 걸으시며 부르셨다’에 저 역시 방점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걸어오신 말에 대해 거부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할까요?
그 답을 제 서평이 쓴 글로 대신해 보려 합니다.
“명쾌한 통찰이다. 잠시 저자의 해제에 멈춰 섰다. 목사로 사역하기 위해 신학교 문을 노크한지 40년이 넘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역한지 꼭 30년째다. 그렇게 사역자로 서서 달려온 세월,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어야 하는 것이 목사의 길이라고 치부하면서 말 그대로 버티고 달려올 수 있었던 가장 큰 기저는 주군께서 시분초마다 행하셨던 ‘Anrede’ 즉 ‘주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조금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걸어오는 말 때문에 무감각해지려하고 안전해 지고 싶어 하는 방어기제의 기존의 삶을 단절시키는 일과 싸웠고 또 ‘Anrede’ 즉 ‘주께서 걸어오시는 말’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내려고 치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치열함 때문에 나는 주님을 따랐다.” (이강덕, “김판임 교수의 ‘워킹 위드 지저스”를 읽고 쓴 서평 중에서)
이 시대의 절망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절망은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무언(無言)중에 생각하는 교회 안의 무신론자들이 더 많다는 절망입니다.
길르앗라못을 도모하기 위해 모처럼 남북의 왕들이 하나 되어 전쟁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북쪽의 아합보다는 조금 더 영적이었던 여호사밧이 전쟁에 나가기에 앞서 예언자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물어보자고 제안하자 마지못해 아합이 허락을 하고 북쪽에서 정치권력에 기생하고 있는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전쟁의 당위를 묻자 당연히 아부성 발언으로 아합을 부추깁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그러나 여호사밧이 다른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고집을 피우자 할 수 없이 아합에게 언제나 눈엣 가시 같은 예언자 미가야를 부르기로 하고 아합이 사자들을 그에게로 보냅니다.
미가야에게 도착한 사자들은 아합이 요구한대로 예언을 하라는 압박을 가하자 미기야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역대하 18: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겠다는 영적 오기가 미가야에게서 보입니다.
미가야의 영적 자존감인가? 아니면 객기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전자입니다.
대세는 여호사밧이 아니라 아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합에게 붙어야 유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존에도 그렇고, 삶의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가야는 그 반대의 방향성을 선택했습니다.
아합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추상같은 하나님의 서릿발 신탁을 전했습니다.
개역개정판에 기록된 본문의 내용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길르앗 라못 전투가 벌어지면 아합 당신은 죽을 거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궁정 예언자이자, 당대 정치권력인 아합과 야합했던 관제 예언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상황을 돌리기 위해 애썼지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영적 자격 미달의 예언자가 무력시위를 한 것은 무기력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언대로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며 대패를 당합니다.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미가야는 ‘안레드’ 즉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낸 예언자였지만, 시드기야는 ‘안레드’ 즉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자였기에 말씀 부재로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없었던 차이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 걸어오심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더불어 그 말 걸어오신 레마에 순종하여 그 말씀을 살아내십시다.
이것이 대강절 두 번째 주일에 새겨야 하는 레마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오륜 교회에서 진행된 다니엘 기도회에 강사로 초청된 개그우먼 정선희 집사의 간증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간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증꾼으로 전락한 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정 집사의 간증 내용에는 담아야 할 내용이 있어서 짧은 시청이었지만 의미 있게 보았습니다.
그녀가 간증했던 내용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경험했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기 때문이었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는 가장 기초적이고 원론적인 간증을 들으면서 은혜가 임했습니다.
간증 중에 그녀가 했던 한 마디가 큰 울림이 되어 저를 울렸습니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며 교회를 타격했을 때,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 커피를 타 먹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순간 너무 추잡스러운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집사인데.”
흔히 할 수 있는 멘트인데 그녀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예배의 감동, 말씀에 대한 무시가 팽배한 시대에 이 정신을 갖고 있는 정 집사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간증을 듣고 있노라니 정선희 집사가 이런 정신을 갖게 된 맥이 있음을 짚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말씀에 무뎌지면 그건 신앙생활에 닥친 최대의 위기입니다.
대강절 두 번째 주일 아침, 이렇게 결단해 보십시다.
하나님,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거절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말씀하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주님의 도를 배우고
주님의 길로 행하리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