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일곱 번째 강해) 제목: 바로 이 분이십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8-11 서론) 교회 창립 11주년 주일 아침에 세인 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교우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며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11년 동안 수고해주셨고, 또 수고하고 있으며, 수고하실 지체들에게 주님께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부어주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스트셀러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보면 루게릭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던 대학 스승인 모리 슈워치와 그의 애제자 미치 앨봄이 14주 동안 화요일마다 나누었던 감동적인 대화중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모리가 제자 앨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모두들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어!”(p,109) 세간에서 많은 지성인들이 쓰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정도의 라틴어 문장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개선장군들은 의도적으로 노예들에게 이 외침을 크게 외치라고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왜? 전쟁의 승리를 했다고 교만하거나 방자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마치 주문과도 같은 메시지이자 자기를 뒤돌아보게 하는 시금석과 같은 문구로 되새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소개한 이 두 문장은 죽음이라는 명제를 되새기며 사는 자가 지혜로운 자임을 알려주는 금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보십시다. 그렇다면 죽음을 그리워하거나 사모하는 자가 이 땅에 존재할까요? 말기 암 환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라는 봇물이 전 세계적으로 터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말기 암 환자라는 대전제에 한해서입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자 중에서 내 스스로 죽음을 갈구하며 사모하는 자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단언건대, 없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빌립보서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빌립보서 1:23-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선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만 육신의 장막을 걷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어떤 날은 정말로 그러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여러분이 겪고 있는 일이 있으니 내가 이 세상에서 끝까지 견디는 것이 더 낫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신약”,p,545.)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는 지금 죽었으면 정말로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삶의 애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조금은 더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죽어도 괜찮다고 감히 말했을까요? 학자와 설교자들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에 대하여 약간의 해석이 다르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나 슬픔도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고통의 한계를 뛰어넘으면 지쳐서 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개한 빌립보서 편지만 놓고만 보면 대단히 감동적인 메시지로 여겨지는 구절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주님을 그리워하면 육신의 장막을 걷고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어 할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1장의 배경은 전혀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학자들의 이견을 전제하지만 저는 빌립보서가 에베소에 있는 어떤 감옥에 바울이 구금되어 있었을 때 쓴 편지라는 해석에 동의합니다. 이 때가 언제일까요? 이 시기를 가늠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 텍스트로 건너뛰겠습니다. 본론) 본문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학자들은 8절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술회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① 익사의 가능성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②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우며 죽음을 당할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③ 에베소에 있는 어떤 감옥에서 느껴야 했던 죽음의 공포였습니다. (사도행전 21:27-22:29) ④ 은장색 직공들이 바울에게 소송을 제기한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23-41, 디모데후서 4:14) 분명한 것은 빌립보서가 옥중서신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바울이 에베소에 거주할 때 여러 차례 옥에 갇혔던 기사 중에 그가 다시 빌립보를 갈 것을 기대하며 쓴 편지가 빌립보서라고 한다면 이 때는 에베소 감옥에서 풀려나기 직전으로 여겨지기에 4번이 가깝다고 저는 동의하기에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사건을 가리켜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이라는 표현에 정점을 찍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이나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빌립보 지체들에게 표현한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한 그 상황이 동일하다고 보는 해석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에서 자기가 당한 고통을 술회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송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송사에 휘말려 에베소 감옥에 있을 때, 바울은 빌립보서를 썼는데 그때의 상태가 너무 힘이 들어 차라리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심정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에베소의 감옥에 있었을 때 왜 이렇게 번 아웃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내외적인 공격에 너무 지쳤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공격은 무엇이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은장색 데메드리오로 대변되는 에베소 지역의 우상 숭배자들이 떼거지로 덤벼든 핍박이었습니다. 내적인 공격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베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립보교회에서 들려오는 배신의 소식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몇 몇 무리들이 바울의 투옥 소식에 반색을 한다는 기분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지자 일단의 무리들이 바울의 안위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서로 다투며 바울의 그 권위의 자리를 넘보는 행위를 보입니다. 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기도 하고 분쟁까지 한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 진 것입니다. 빌립보서 1:15절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런 복잡한 일을 당했던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지체들에게는 아주 쿨 하게 나로 인하여 어떻게든 저들이(아마도 바울에게 양육된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니 기쁘고 또 기쁜 일이라고 에둘렀지만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으면 당사자들인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 세상에서 그만 육신의 장막을 걷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라고 말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동시에 그가 진짜로 에베소에서 당한 환란이 얼마나 크면 죽고 싶겠다는 표현뿐만이 아니라, 다시 강조하지만 오늘 본문 8절에 이렇게 그의 뇌리에 담고 있었겠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여기까지만 보면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비슷한 평범한 사람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9-10절 본문을 보면 대단한 바울의 반전이 열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은 본인이 당했던 기막히게 참담했던 현실을 당시 이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교회의 말썽 많은 자들을 포함하여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일단의 모든 그리스도인 후배들에게 보란 듯이 역전시키는 신앙의 고백을 남깁니다. 은혜로운 바울의 신앙적 결기를 다시 복기해 보십시다. 바울은 토해 냅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던 바울은 이 상황을 사형선고라고 재 정의하면서도 이렇게 반전에 성공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 사형선고를 이겨내려고 하지 않았다고. 더 큰 은혜가 사형선고 뒤에 있었다고.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9절 후반절) 바로 이 대목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아시아에서 당한 큰 고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내 여력이 아닌 주님의 힘 쪽으로 집중하게 하신 목적이 고난이라는 해석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이처럼 담백한 신앙적 표현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새겨주는 고난 극복의 방법론이 있습니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식상하셨습니까?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신앙적 결단과 결기 외에 신앙인들이 당하는 고난 극복의 방법이 있다면 공유하십시다. 그리고 혹시 공유된 고난 극복의 내용이 제가 제시한 고난 극복의 내용보다 설득력이 있고, 탁월한 그 무언가라면 아무리 제가 목사이지만, 저 역시 그 방법을 택하라고 흔쾌히 동의하겠습니다. 내가 뭔가를 의지하려는 것은 내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본문 9절 전반절의 표현으로 복기한다면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강력하게 반전에 성공했습니까? 사형선고를 받아 살 소망까지 잃어버렸던 바울이 어떻게 역전합니까? 이렇게 싸늘하게 죽어 있는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역전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적지 않은 목양적인 경험을 축적해왔습니다. 이 경험은 신학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배운 게 아닙니다.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의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고 울면서 배운 내용들입니다. 그 중에 한 예를 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타 교회에 비해 양육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양육을 위해 과거 11년 동안 부단히 달려왔습니다. 상당수 많은 교우들이 양육 시스템에 접목되어 잘 달려왔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에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주입식이든, 아니면 소그룹 나눔을 통한 토론식이든 상관없습니다. 나름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공부하는 교회입니다. 일례로 책읽기에 전념하며 지난 세월을 달려왔습니다. 담임목사는 부흥회적인 목회 시스템으로 세인 교회를 리딩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지성적 성찰을 위한 세미나, 혹은 사경회 중심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지금 소개한 것들은 앞으로도 제 임기 내에 지속할 사역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여러분이 그만큼 컸습니까? 성장했습니까? 절대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교육, 양육, 공부, 세미나 등등으로 여러분들이 성장할 것을 기대했다면 저는 아마도 이 사역을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역에 전심하고 있습니까? 일련의 사역들을 통해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일련의 사역보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 모멘텀(힘)은 주님이 나를 인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저와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일하심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변하지 않는 영적 모멘텀(힘)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당연한 우리들의 신앙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내 여력이 아닌 주님의 힘 쪽으로 내 신앙의 여력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사형선고와 같은 고난과 맞서지 않겠습니까? 뉴욕 리디머 거뮤니티를 섬기는 팀 켈러가 저의 이 마음을 미리 알았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쉽게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뭔가가 남아 있어야 한다.”(팀 켈러, “예수, 예수”, 두란노, p,116.) 이제 우리는 내가 의지하는 존재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대단히 감동적인 본문 마지막의 교훈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내 여력이 아닌 주님의 힘 쪽으로 내 신앙의 힘을 집중해야 하는 두 번째의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 그 분의 일하심을 기록한 사전에 ‘단절’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음미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렇습니다. 호주 맥쿼리 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폴 바네트는 10절을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분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셨으며(과거시제), 우리도 다시 살리실(미래 시제) 뿐아니라, 또한 계속해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현재 시제) 분이며, 이는 비유법으로서 그 분의 백성을 절박한 환경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폴 바네트, “고린도후서 강해-BTS시리즈”,IVP,p,42.) 정말로 기가 막힌 설명이 아닙니까? 폴 바네트의 이 말을 이렇게 담임목사의 설교 메시지로 바꾸겠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사전에는 ‘단절’이라는 단어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울이 선포한 이 구절을 읽다가 골리앗이라는 괴물과 싸웠던 현장에서 생트집을 잡던 큰형 엘리압을 향하여 담대하게 선포했던 다윗의 외침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7:34-37절에 주목해 주십시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주님이 다윗에게, 바울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은 저와 여러분에게 그렇게 일하십니다. 다윗의 시대에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의 시대에 단절되지 않은 것처럼, 바울의 시대에 일하셨던 주님의 일하심도 오늘 우리에게 단절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일하심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는 은혜임을 믿는 자는 오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이 알려줍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단절이 없이 고린도교회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의 연대입니다. 함께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너희도 간구하는 기도의 연대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권면이 어찌 고린도교회만을 향한 외침이겠습니까? 코로나 19라는 사상 초유의 일을 경험하면서 지난 두 달을 달려온 우리 한국교회를 향한, 그리고 지난 11년, 교회가 이타적일 때만 교회라는 슬로건으로 잘 달려온 세인 공동체 지체 모두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연대를 요청하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창립 주일 메시지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주보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적은 ‘마시멜로 이야기’의 기사를 주일 설교 원고에 옮겨와서 재음미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젤이 잠에서 깬다. 가젤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뛰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온힘을 다해 달린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사자가 잠에서 깬다. 사자는 가젤을 앞지르지 못하면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온힘을 위해 달린다. 네가 사자이든, 가젤이든 마찬가지다. 해가 떠오르면 달려야 한다.”(호아킴 데 포사다, 엘런 싱어 공저, “마시멜로 이야기”, 한국경제신문,pp,121-122.)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제 또 시작되는 제 12주년을 향하여 믿음의 여정을 떠나는 저와 여러분은 또 다시 뛰어야 합니다. 그런데 12주년을 향하여 뛰는 우리는 이제 이렇게 뛰십시다. 내 여력이 아닌 주님의 힘 쪽으로 집중해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뛰십시다. ‘단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과 함께 같이 기도로 연대하며 달리십시다. 이렇게 달리기를 원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까? 그럴 리가요. 오늘 이렇게 요청하시는 분이 바로 이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