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6일 주일 예배 설교 제목: 길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본문: 마태복음 15:21-28 서론) 지난 주간에 냉전 시대에 구동독 출신이었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인 부자유함 때문에 서독으로 망명하여 여러 시를 쓰면서 저항 시인으로 발군의 시대적 성찰을 보여준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집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읽었습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와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멀어버린 내 귓속, 그 안 세상/아득한 곳에서 작은 교회의 종을 쳐준다/시간을 지킬 줄 모르는 교회/그래서,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늦었나, 이른가?/작은 교회 종, 제 맘대로 울리니/그래도 나는 알지, 줄이 누구 손에 쥐여졌는지(“와해” 전문,p,95) 이 글을 읽고 난 뒤에 서평을 작성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시를 읽다가 목사로서 아주 묘한 양가감정이 스멀댔다. 엉망진창인 교회의 종소리 때문에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시 작가의 토설이 왜 이리도 시리고 시리게 다가오는지,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내 사랑하는 교회가 심판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교회가 비상식적인 길에서 돌이켜 정상적인 종을 쳐주는 종지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쿤체의 노래이자 고백처럼 교회가 종을 잘 치지 못해(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그 종소리를 바른 삶의 바로미터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객설 하나, 종을 누가 쥐고 있을까! 그냥 내 주관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천박한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라 상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루고 있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시인이 감추고 있는 메타포 대로 적절하게 시간 맞추어 종을 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을 찾는 자들이다.” 너무나도 적확한 이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길을 찾되 잘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을 잘 찾아야 많은 사람들이 혹여 여타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시간에 맞추어 종을 칠 수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길을 잘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운 것은 길을 찾아야 하는데 잘못 찾을까봐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길을 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추적하면 길을 잘 찾을 수 있는 모형이 보이기에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답을 드려볼까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텍스트의 줄거리는 우리들이 익히 있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온 사건입니다. 그녀가 왜 주님을 찾아 왔는가? 그 여인의 딸이 심하게 귀신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마태는 증언합니다. 이렇게 이 여인은 딸의 치유를 위해 힘들게 예수님을 찾아왔건만 주님으로부터 심한 모욕에 가까운 냉대를 받은 스토리의 주인공이었음도 본문이 함께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본인에게 임한 여러 불리한 정황을 믿음으로 극복하여 결국에는 주님으로부터 딸의 치유를 얻어 냈음을 극적으로 본문이 증언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대체적인 스토리를 오늘 설교의 방향성에 맞추어 재해석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로서의 바른 길 찾기에 대한 영적인 은혜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의 사역을 마치고 유대인들이 꺼려 방문하지 않는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두로 지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올라가신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역은 레바논 지역에 위치한 항구도시들이었는데 이 도시에 대한 평가는 그리 곱지 않았던 이방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두로는 ‘악명 높은 가장 무서운 적들이 사는 곳’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유대종교적인 부분에서 버려진 열외지역이었습니다. 이런 험지를 주님께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곳에서 전도 사역을 하시는 어간 뜻밖의 사람의 방문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를 밝혀야 합니다. 창세기 9:18절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다시 말하면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욕보여 저주 받은 대표성이 있는 아들이었던 함의 아들이라는 말은 결국은 히브리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볼 때 저주받은 후손의 계보라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가나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인간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던 저주받은 열등 백성이었고 차별받던 족속이었습니다. 또 하나,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가나안 여인에 대한 정보를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7장에 있는 말씀으로 추적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7:26절입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렇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수로보니게 출신의 여인입니다. ‘보니게’라는 말은 ‘페니키아’라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한때 페니키아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북부 지역을 포함할 정도의 엄청난 지배 영토를 확보한 강자였습니다. 해서 본문에 ‘수로’ 즉 ‘시리아’ 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이 여인이 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었던 페니키아 인이 아니라 레바논 지역(시리아)에 살고 있었던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른 이유는 페니키아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살고 있었기에 본문에서 마태는 아마도 수로보니게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호칭한 것입니다. 여하튼 정리하자면 이 여인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출신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 달갑지 않은 지역 출신 여인의 방문을 받은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이 주님을 찾아왔는가?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 여인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기 때문임을 본문 22절이 증언합니다.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우리는 인지상정으로 사랑하는 딸이 귀신들렸기에 주님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출신 성분이 어디를 연고에 두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십분 이해합니다. 주목할 것은 여인이 주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외친 단말마적인 외침입니다. 그녀가 주님께 외친 외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였습니다. 저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 외침을 이렇게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극치였다. 왜 제가 이렇게 정의합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께 외쳤던 외침은 기도를 하는 대상자가 기도를 듣는 주체에게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절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본인의 능력으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유한적인 무능함을 인정하고 그 무능함을 뛰어넘게 해 주는 절대자를 찾아간 것입니다. 찾아간 그 여인은 기도를 받는 대상자에게 이렇게 호칭을 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 여인은 언급했듯이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헬라적인 이방인인의 피가 흐르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지금 자기가 찾아온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문화에서 성장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 그 다윗이 주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문화에 속했고, 다윗의 자손이 누군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문화, 사회에서 자라난 이방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지금 자기가 찾아온 예수에 대한 정확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는 정보가 22절의 한 구절에 에 담겨 있습니다. “그 지경에서 나아와” 바로 이 대목에서 저와 여러분같이 올바른 길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첫 번째의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 즉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줄 주체가 다윗의 자손인 주 예수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곱씹겠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가만히 주목해 보십시다. 여인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은 팩트이며 현실입니다. 추측하기에는 이 여인이 딸의 치유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추측 근거는 이렇습니다. 앞에서 전술했듯이 이 여인은 헬라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페니키아 출신의 이방 여인입니다. 거대한 제국 그것도 잘 나가던 페니키아인이었던 그녀에게 피식민지 영토였던 팔레스타인의 변방인 이스라엘은 결코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곳 출신의 다윗의 자손, 그것도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예수는 그냥 바람에 스치고 지나가는 먼지처럼 간과해도 될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딸이 고통당하는 아픔을 보면서 어떻게 하든지 딸을 치료하려는 일념으로 이모저모에 집중하던 어간, 예수의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시기 전의 활동 영역은 갈릴리 북쪽이었던 게네사렛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 영토 중에 페니키아 지역과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었기에 아마도 예수의 소문을 듣는 것이 수월했을지도 모릅니다. 여인이 들은 예수는 거라사와 같은 갈릴리 지역에서 자신의 딸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귀신들린 여타 사람들을 치유하였다는 점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체의 권능이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분명히 민중들 앞에 올 메시아 즉 주가 아니고서는 이루실 수 없음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 여인은 마침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 안으로 예수께서 들어오셨다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고 예수께 딸을 데리고 와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다윗의 자손 예수께 그녀는 고백합니다. “당신은 주님이십니다.” 설교자인 제가 무릎을 치며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행한 최고의 행위는 예수를 찾았다는 점이라는 선택을 말입니다. 왜 이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까? 정말로 잘 찾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길임을 믿기에 그 분을 찾는 데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예수라는 길은 우리의 신앙 여정 중에 지속적으로 찾아야 하는 정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군은 우리에게 직접 당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군께서 당신의 정체성이라고 표현한 ‘길’ 즉 ‘호도스’를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절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에 기록된 ‘도’ 즉 ‘로고스’는 요한복음 1:1절에서 요한이 밝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했던 ‘말씀’ 즉 ‘로고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이 찾아서 따라가야 할 길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그 분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이야 말로 저와 여러분이 승리하는 유일한 요소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수록된 구절 하나를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5:25-29절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주목하십시다. 많은 의사를 찾았던 이 여인의 결과는 많은 괴로움이었다고 마가는 요약합니다. 공교롭게 이 여인이 많은 괴로움을 당한 뒤에 찾은 예수님으로부터 12년 동안에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혈루의 근원이 말랐다고 마가는 보고합니다. 이 기사를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동은 이런 것입니다. 내 삶의 일거수일투족의 범사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이나 고난의 일체의 근원은 주님이 마르게 하실 때만 마른다는 감동 말입니다. 의사로 상징되는 비 진리를 찾는다고 해서 우리들의 문제 혈루들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로. 지금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입니까? 의사입니까? 마가복음 1:40-45절을 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이 구절 역시 저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줍니다. 나병 환자의 드라마틱한 치료라는 팩트보다 저에게 더 큰 감동을 다가오는 구절은 이 본문 기사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병 환자의 치료 이후 대중적인 인기몰이를 염려하셨던 주님이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계셨지만 가버나움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이 구절이 주는 의미를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가 이깁니다. 승리합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감동시키는 믿음이 있을 때 길을 잃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서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만났으니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 23-2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가장 기대했던 당사자인 예수께서 여인의 청에 대하여 싸늘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24절에서 도무지 해석이 곤란한 반응을 주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에는 이렇게 24절을 번역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이 글을 문자적으로 대하면 극단적인 해석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차별적인 예수를 믿으라는 말인가!” 목사인 저 역시 주님의 이런 대우하심을 주석적인 작업을 거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의 반응을 이해하려면 조금은 더 깊은 해석을 해야 합니다. 가장 복음주의적인 해석으로 널리 애용되는 본문 이해는 주께서 가나안 여인을 시험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녀가 개와 같은 존재로 수모를 당했지만 그 수모까지도 이길 수 있는가를 주님이 보셨다는 해석입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여인은 주님의 이 시험을 이겨 딸을 고칠 수 있었다는 해피엔딩의 스토리로 마감하는 것이 통상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을 해석하며 설교하는 담임목사는 이런 통상적인 해석을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또 하나의 해석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면일까? 주님이 반응하신 냉소적인 행동은 주님의 입장에서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무슨 말인지를 설명합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철저하게 지키셨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역의 순서 즉 질서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시기는 세례자 요한이 헤롯에게 순교를 당한 뒤 부터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쳤던 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음을 압니다. 이렇게 외쳤던 세례 요한이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은 무대 정 중앙 위로 올라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무대로 올라오신 것은 세례요한이 죽음을 당한 뒤였다는 점은 주님이 얼마나 사역의 질서를 존중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주님의 일성 역시 세례 요한의 일성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역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선교의 순서도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제일은 이스라엘에게, 그 다음은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이 구원사적인 사역의 순서는 아브라함부터 지금 주님의 시간까지 지켜지고 있음을 아셨기에 주님은 본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며 반응하셨다는 해석에 저는 한 표를 던집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칙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인을 시험하셨다는 해석은 왠지 저에게 불편하고 옹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갖고 계셨던 원칙에 따라 그렇게 반응하셨다는 해석이 저는 더 정직한 해석이라고 동의하기에 여기에 강조점을 두며 교우들에게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그 다음의 해석으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통상적인 해석에 따른 본문의 그 다음 이해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주님이 펼쳐 놓으신 시험을 여인이 극복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지지하는 해석의 그 다음은 이렇습니다. 시험의 통과가 아니라 주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고도 큰 믿음이 여인에게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아름다운 믿음을 갖고 있었던 구도자라고 확신합니다. 본문 25-27절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인의 고백에 별 감동이 없으십니까? 아무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영적 수준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이 고백에 전율하는 감동이 있다면 당신은 오늘 이 본문의 주인공인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가장 아름다운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은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신 것입니다. 감동하신 주님은 당신의 계획과 원칙도 바꾸십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에 기록된 본문 마지막 28절의 번역은 짜릿함 감동을 독자인 저와 여러분에게 선사합니다. “예수께서 뜻을 굽히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남다르다. 네 소원대로 되었다. 그 즉시 여자의 딸이 나았다.” 보이십니까? 주님이 뜻을 굽히셨다는 문장이. 읽으셨습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남다르구나! 하셨던 감동 받으신 표현을. 어제 점심식사를 외부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맞은 편 식탁에 아주 젊은 부부가 막 이유식을 할 정도의 아들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와 있었기에 제가 주문한 식단이 나올 때까지 그 젊은 부부들의 행동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애기 엄마는 아주 작은 양의 밥을 떠서 자극적이지 않은 반찬을 수저에 올려 아들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아들이 입을 벌려 먹는데 갑자기 아빠가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아들, 너무 잘한다고 더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순간, 이요한 전도사에게 같은 방법으로 밥을 떼 먹이기 위해 숨바꼭질을 하던 그 옛날이 생각이 나서 피식했습니다. 막 이유식을 하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아이 엄마는 왜 박수를 치며 그렇게도 기뻐했습니까?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아들이 너무 대견해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아들이 한 단계를 넘어 그 다음 단계로 넘어서는 단계를 보이면 일취월장한 느낌이라 너무 행복한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마도 두로에서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의 큰 믿음을 보셨던 주님께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여인의 엄청난 믿음을 확인하셨고 끝내는 감동하셨습니다. 해서 주님은 당신의 뜻을 굽히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남다르구나! 이렇게 주님을 찾아와 인생의 극적인 드라마를 쓴 여인은 딸의 질병을 고침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플러스알파의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길을 걷는 가장 행복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유대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존재는 결코 그냥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한국기독교연구소 간,p,68) 이 글에 밑줄을 친 이유는 ‘의미’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헤셀이 말한 ‘의미’가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무엇일까? 상투적인 언급으로 들려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나 되도록 한 의미는 예수가 길 그 자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지금도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 길이 유일하게 나에게 펼쳐진 은혜의 길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까? 바랍니다. 그것이 성경이든,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주님 앞에 엎드림이든, 또 아니면 성서에 근거한 영적 조명이든 또 아니면 세미한 음성이든 주님이 주시는 다양한 길을 찾으십시다. 길을 찾는 순간, 여러분은 가장 의미 있는 감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이 은혜를 찾기 위해 더 많이 엎드리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넓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