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8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올곧음(1) - 대림절 두 번째 길목에서 본문: 마태복음 4:1-11 서론) 라틴어 ‘ad fontes’(아드 폰테스) 단어가 있습니다. 직역하면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단어를 종교 개혁의 슬로건으로 세웠습니다. 왜 이 문장을 앞세웠을까요? 이 단어를 의역하면 ‘근본으로’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세 가톨릭이 얼마나 성서를 왜곡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전혀 성서와는 상관이 없는 교리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하이어라키 즉 종교적 계급주의에 물들어 성서를 내 팽개쳐 버렸던 당시의 암울했던 종교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으로 돌이켜 하나님 정신을 회복하자는 종교개혁자들의 열망이 이 슬로건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근본으로 돌아가려면 당시 가톨릭 권력에 맞서야했고 곧 그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었기에 ‘ad fontes’를 외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독일의 나치즘과 맞서 싸웠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했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어록이 있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엄청난 명언입니다. “Vor Gott ohne Gott”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본회퍼의 이 명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독일에서 고난을 당할 때 독일의 루터교회(국가 교회)는 거의 모두 다 국가권력에 아부하는 교회 같지 않은 권력 교회였습니다. 그 권력에 굴복하여 히틀러에게 충성하고 그의 권력은 하나님이 세운 권력이라고 추앙하기까지 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이런 국가교회에 만행에 동참하지 않고 히틀러 정권과 맞서 싸운 고백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나치즘에 항전하다가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본회퍼는 국가교회였던 루터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맘대로 만든 하나님이라는 거짓된 신을 섬겼던 것을 맹비난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천명합니다. 그러면서 본회퍼는 이 명언을 남긴 것입니다. “Vor Gott ohne Gott”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기가 만든 거짓되고, 자기만족에 충실한 하나님을 제거해야 진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이 명언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적어도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삽니다. 이 길을 고집하는 자는 언제나 고난의 길을 걷습니다. 그래서 상당수 사람들은 이런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닌 것을 우격다짐을 하듯 교우들에게 압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과 이 삶을 우리 주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선택하셨고,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대망하며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대림절의 첫 번째 길목에서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한 중요한 키워드를 ‘자기 비움’이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주일에 두 번째 키워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올곧음’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기의 길을 걸으심에 있어서 결코 환경과 타협하지 않으셨다는 키워드를 두 번째 대림절에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예수께서 곧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성령이 순수하게 인도하신 대로 광야로 나간 것처럼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권위에 있어서 가장 앞서는 마가복음을 보면 이 구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절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몰아내다’라는 단어입니다. '몰아내다.' 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크발로’ 는 '강제적으로 몰아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NLT 1: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Immediately the Holy Spirit compelled Jesus to go into the wilderness.” 직역을 하면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즉시 성령께서는 예수를 광야 쪽으로 강제적으로 몰아 넣으셨다.”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강제로 몰아넣으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점입니다. 뱀들과 독충들과 전갈들 그리고 들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40일 동안을 머물게 한 주체가 성령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광야 시험의 프로젝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사탄의 작품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야에서 일어날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삼위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예수님이 실천하시며, 성령 하나님이 이루실 그 어떤 위대한 일을 광야 시험에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조금 더 살펴보십시다. 너무 잘 알고 있는 텍스트로 들어가 봅니다. 광야에서의 세 가지 시험은 이러했습니다. ①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 (3절) ② 성전 꼭대기로 예수님을 데려다 놓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너를 보호할 테니 뛰어내리라고 한 것. (6절) ③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며 다 줄 테니 내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 (9절) 주님은 첫 번째의 시험을 신명기 8:3절(본문 4절)로, 두 번째 시험은 신명기 6:16절(본문 7절)로, 그리고 마지막 시험은 신명기 6:13절(본문 10절)을 인용하시면서 이기셨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당하신 마귀가 던진 시험을 ‘아드 폰테스’ 즉 가장 근본적인 의미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미는 곧 성도가 지켜 나아가야할 신앙적 올곧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신앙적인 올곧음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님에게 요구한 것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요구였습니다. 유치한 것 같지만 이렇게 접근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돌을 돌로 만드신 이유는 돌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돌만이 갖고 있는 특징을 통해 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을 만드신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떡은 떡이 갖고 있는 가치와 특성이 있습니다. 해서 떡은 떡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고승으로 추앙받던 성철이 한 말을 적절한 것 같아 한 번 패러디하겠습니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인 것 같이, 돌을 돌이고 떡은 떡인 것입니다. 문제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마술과도 같은 그 무언가를 세상이 요구하고, 또 그 요구에 부합하는 자들이 주목을 받고 성공을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혼돈의 무질서로 변질시키는 것에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다는 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담임목사의 해석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많은 보수적인 인사들이 동성애 반대에 목을 걸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한 대로 저 역시 동성애를 분명히 반대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의 의도에 대하여는 흔쾌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기독교의 비상식적인 변질을 방어하는 논리로 부각시켜 교계의 일탈을 희석시키고 자정능력이 없는 쪽으로 흘러가는 비성서적, 반신학적인 일탈을 가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반대하며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심히 강한 유감을 표합니다. 해서 동성애를 말하면서 에이즈를 발병시키는 원인으로, 그들은 상종하지 못할 존재들로 낙인찍는 일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담임목사의 동성애에 대한 조금의 다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저는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오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첫 번째 주제와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무질서의 차원으로 변질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떡을 만들라는 요구에 상응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성들을 철저하게 방치하고 성적인 일탈을 자행하는 남성들이 지천에 존재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편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성적인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지탄을 피해 다른 여성과 동성애를 행함으로 자기들의 성적인 쾌락을 맛보는 동성애가 자행했습니다. 언급했듯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죄악이 로마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서 일어났다는 점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남편 그리고 아내를 총망라하여 강력하게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로마서 1:24-27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변질시킨 결과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린 동성애 창궐로 이어졌다는 것을. 제 서재에 명지휘자 쥬빈 메타의 공연에 전 세계 남성 3대 성악가로 인정받은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합동으로 출연하여 주옥같은 곡들을 열창한 OST 앨범이 있습니다. 너무 귀한 앨범이라 자주 꺼내 듣곤 하는 앨범입니다. 이 명반을 꺼내 그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아주 묘한 감동을 받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들은 모두가 테너입니다. 그들이 소리 내는 테너의 음역은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음역은 같지만 세 사람의 음색이 다릅니다. 놀라운 것은 세 사람 모두가 공히 세계가 인정하는 테너이지만 세 사람이 함께 부른 피날레 메들리를 듣다보면 다른 음색으로 완벽한 노래를 자아내는 묘한 부조화의 감동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목사이기에 이들의 공연 음악을 들으면서 받는 영적 감흥을 색다르게 해석하곤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의 음색은 모두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부르는 음악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테너’라는 음역에서 이탈하지 않는 ‘아드 폰테스’ 기본적인 올곧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기의 역할 속에 이루는 질서 있는 감동이라는 해석을 이들 공연을 들으며 내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기본적 질서 위에서 피조 세계가 운행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죄요, 악입니다. 유대인 출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그의 걸작인 ‘누가 사람이냐’에서 대단히 중요한 갈파를 남겼습니다. “실제적인 인간 상황 속에서 ‘존재함’은 ‘어떻게 존재함’과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차원에서 그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발전 되어 나간다. 나는 지금 어떻게 나의 실존을 살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사람이냐?’라는 물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짜 물음이 ‘어떻게 사는 사람이냐?’임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 연구소 간, p,63.) 성도가 누구입니까?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주군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그 근본을 사수하며 살고 있는가? 의 질문에 yes 의 답을 하고 살아내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요 성도임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같은 것이라는 유사(類似) 신앙의 방향에서 떠나는 영적 올곧음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귀는 첫 번째의 시험에서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절치부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혹하였습니다. 뛰어 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보호할 것이라고 도전한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 듯한 그리고 설득력이 있는 유혹이지 않습니까? 틀린 구석이라고는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시면 이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첫 번째 시험도 같이 적용하여 주님이 돌을 떡으로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다치시겠습니까? 아마도 주님이 갖고 계신 속성 중에 하나인 신성으로 이 정도야 감당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단호하게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두 번째 시험에 방어기제로 사용하신 7절을 만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주지했듯이 이 구절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맛사(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모세를 공격하고 하나님께 대들던 그들을 향하여 모세가 회고하며 선포했던 신명기 6:16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탄이 주님을 데리고 간 성전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헤롯이 건축한 성전입니다. 에돔 출신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정통성 시비에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헤롯은 자신의 분봉왕으로서 입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BC 19-20년부터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폐허가 된 제 2 스룹바벨 성전 터에 어마어마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허호익 교수가 쓴 ‘예수 그리스도(Ⅰ)’를 보면 당시 헤롯이 건축한 헤롯 성전 건축기에 소상히 실려 있습니다. “마차 1,000대와 건축 수련공 10,000명을 동원하고 수많은 석공과 목공을 훈련시키고 많은 재정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략) 성천 건축 사업은 AD 62-64년에 완성되었다. 이 성전은 헬라식으로 건축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경건한 유대인들을 자극한 것은 성전 정문에 로마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독수리 상을 막대한 비용의 금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 2계명을 어긴 신성모독인 동시에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국가적 모욕이었다.”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Ⅰ”,동연 간, pp,63-64) 이와 같이 솔로몬 제 1성전과 스룹바벨 제 2성전의 터 위에 세워진 헤롯 성전은 허울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명목적인 성전이었지 실상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상 숭배의 진원지나 다름없는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태생적으로 이렇게 불경스러운 배경을 갖고 있었던 이곳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각종 유대 종교의 막강한 힘을 갖고 약한 자들을 짓누르던 전혀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던 장소였습니다. 바로 이곳으로 사탄은 주님을 이끌고 간 것입니다. 그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의 진면목을 보이라는 사탄의 요구는 전형적인 성전 중심적인 제왕적인 권위와 면모를 드러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주님은 사탄의 이런 술책과 간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런 사탄의 간교함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방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변질시키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준엄한 선언이었습니다. 본질이시며 ‘폰테’ (근본)이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번째의 영적 올곧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언제나 유사 신앙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언젠가 변화 경영 연구소장으로 있는 구본형 소장이 쓴 글을 인터넷 상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서 구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일생에서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놓치지 말라” 그의 문구를 읽다가 저는 개인적으로 구 소장의 일견에 1/2 동의했습니다. 왜 1/2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2/2를 동의하면 그것은 카피 인생이지 자신의 정체성을 사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울 만한 멘토를 만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멘토를 통하여 길라잡이를 삼는 것이지 그의 인생이 자기의 인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멘토의 삶을 본받고 그와 같이 사는 것은 멘토의 유사 인간으로 사는 것이지 자기 본질로 사는 자기 주체적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앞에서 언급한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일침에 동의합니다.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살아가는 것이 타락이다.” (김기석, “청년 편지”, 성서 유니온 간,p116.재인용) 기독교 신앙은 성전을 우상의 볼모로 삼아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올곧음을 견지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적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3) 세속적인 일체의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올곧음입니다. 세 번째 시험에 살펴보십시다. 본문 8-9절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주목할 단어는 두 개의 단어입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입니다. 천하만국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분명히 세속적인 일체의 부귀, 권력, 쾌락, 편안한 안락 등등의 모든 것을 담지 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 위력은 가히 상상하지 못할 매력일 것입니다. 해서 이 유혹을 이기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모 대형교회의 부자 세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만행을 아들 목사는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공부한 사람이 참으로 아이어니하게도 짐 윌리스라는 개혁적인 사회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미국의 대부라고도 하는 짐 윌리스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딴 그가 이론적으로 교회를 사유화하는 짓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인가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수많은 비난에도 눈감고 세습을 수용한 이유는 천하만국의 위용 때문입니다. 저는 이 유혹에서 누구든지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범인 목사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탄의 공격과 시험이 얼마나 집요하고 영적인지를 실감하여 소름이 돋았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하만국의 면모를 보여준 사탄의 간교함에 혀를 내들릴 정도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하만국이 가장하고 있는 그 모습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독싼 아우톤’ 번역하면 ‘그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 천하만국의 영광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헬라어 단어 ‘dovxa’(도크싸)는 ‘천박한 영광이나 값싼 영광’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영광은 거룩한 영광 즉 영적인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종교적인 영광으로 위장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가끔은 헷갈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들입니까? 나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이유로 진짜로 괜찮은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제 내가 하나님께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릴 테니 나를 간섭하지 말고 무조건 축복이나 하라고 하나님을 겁박하는 그런 나의 모습이 나의 종교적인 행동을 통해서 과시되는 경우입니다. 아모스와 미가 시대에 갖은 반 신앙적인 이들을 자행하면서 하나님께 최고의 제사를 드릴 테니 눈감아 달라는 영적인 뻔뻔함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미가 6:6-8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모스 5:21-24절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내가 하나님 신앙의 올곧음으로 바로 서 가기 위해서는 종교성으로 위장한 세속적 영광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유언을 남긴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24:14-15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그래서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신앙의 거인이었던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행동이든 무행동이든 인간의 인정이 동기가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와 무관한 것으로 밀쳐 내고 스스로 인간 나라에 종속되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 있는 사람, p,314.)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더불어 한국 개신교회 만이 지키는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워싱톤 사귐의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김영봉 목사께서 ‘나는 왜 믿는가?’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믿음을 보험 상품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지금 들고 있는 패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는 사람처럼, 진짜 믿는 사람이 되도록 이 믿음의 길에 당신의 인생을 거시기를 바랍니다.”(김영봉, “나는 왜 믿는가?”, 복 있는 사람, p,83.)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이여! 진짜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마십시다. 주님이 이기셨던 그 삶을 본받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하나님 같은 것이라는 유사(類似) 신앙의 방향에서 떠나며, 세속적인 일체의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올곧음으로 무장하는 대림절 두 번째 주간으로 보냄으로 아기 예수를 진정성 있게 기다라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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