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41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6:14 제목 : 자랑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서론) 제이콥과 스테파니 부부는 더 큰집을 지어 이사를 하려고 차곡차곡 돈을 모으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들 부부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세상적인 목표를 향하여 무작정 달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열어 거룩한 계획을 보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설령 여태 꿈꾸어 왔던 것을 포기하라고 해도 따르겠다고요.” 주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다들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데 선뜻 부모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스테파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수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는데, 눈물이 솟구치더군요. 더 큰집을 지을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는 게 더 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뜻을 모은 부부는 즉시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를 입양하는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널찍한 집을 구하는 쪽과는 정반대로 움직였습니다. 살던 곳보다 더 작은 집으로 옮겼습니다. 가진 자원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쓸 여지가 한층 넓어졌습니다. 스테파니는 메일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이 삶을 이렇게 바꿔 놓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귀찮거나, 또는 율법적인 규범이 아니라 관계더군요. 매일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난생 처음 성경을 접한 사람처럼 열심히 읽었습니다. 나만 위해 살며 낭비한 세월이 아깝지만, 지금부터라도 시간을 아껴 가며 성실히 살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가 됩니다.”(데이빗 플랫, ‘래디컬 투게더’,두란노,pp,155-156,2012년.) 브룩힐즈 교회를 담임하는 데이빗 플랫이 섬기고 있는 성도 부부인 제이콥과 스테파니에게 일어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위대한 삶의 혁명을 소개한 글입니다. 듣고 나니 어떤 소회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혹시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저런 순진한 신앙적 낭만에 빠져 있는 정신 나간 사람이 있나?” “이런 일은 그들만의 리그이지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야!” “나는 그럴 만한 삶의 여유가 없어!” 뭐 그럴 수 있는 성도들이 있겠다 싶어 더 이상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2014년 4월 30일에 읽은 그러니까 정확히 5년 6개월 전에 읽었던 이 글을 오늘 설교의 도입 예화로 교우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한 문장이 저를 더 강타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귀찮거나, 또는 율법적인 규범이 아니라 관계더군요.” 데이빗 플랫의 이 글을 만났을 때,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걸작이 생각났었습니다. 부버는 그의 책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을. “Im Anfang ist die Beziehung.” “처음에는 관계가 있다.”(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p,31, 2017년.) 이렇게 말한 부버는 대단히 중요한 부연 설명을 내놓습니다. 이 관계는 대체로 세 가지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라고 말했는데 ⓵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⓶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⓷ 정신적 존재와 살아가는 관계라고 적시합니다. 그러면서 철학자인 부버는 이 셋 중에 제일 중요한 관계는 사람과 더불어 맺어가는 관계라고 말하였는데 그의 이런 지론은 다음을 전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과 신의 관계의 본래적 비유이다.”(위의 책, p,150) 부버가 말한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우리 신앙인들은 말 할 것도 없이 세 번째의 관계라고 입을 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버는 아주 단호하게 두 번째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하나님의 관계에서 신자들이 그 부르심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홀로’의 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의 관계로 살아내는 것에서 증명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점에 대하여 0.1%의 이견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앞에 소개한 브룩힐즈 교회의 제이콥과 스테파니 부부의 삶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자로서 가장 아름답게 응답한 신실한 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론) 앞에서 말한 담임목사의 설교 의도를 전제하면서 본문을 읽겠습니다. 그래야 오늘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저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이 구절의 전반절에 얽힌 무게감이 있는 영적 부담을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복기합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의 이 고백은 칼날의 양면과도 같은 예민함이 있는 선포라고 했습니다. 한 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주목할 것은 ‘only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정말로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 강조한 또 하나의 면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만으로 머물면 안 된다고 했던 점입니다. 자랑에 머물고 난 뒤, 그 다음 후반절에 접근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겉 멋 신앙으로 변질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은 칼날의 양면인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41번째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 우리가 나누어야 할 교훈을 예리하게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명확하게 본문 하반절이 대답해 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구절의 번역은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그 분 때문에 네게 세상은 십자가에 달렸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그러합니다.”(톰 라이트, 갈라디아서 주석,ivp,p,123.2014년.) 정말로 조금도 여유롭게 그리고 한가하게 숨 돌리지 못하게 하는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1)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불편하게 여겨지는 일체의 것들에게서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십자가에 매달라” 아마도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우리들은 움찔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에 우리들이 지나온 흔적을 돌아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매단 일들이 허다하지 내가 사랑하는 세상을 십자가에 매단 일이란 거의 찾기가 어려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세상이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일까? 성경의 한 내증을 통해 교우들과 함께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9:26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10년 전 이스라엘의 사해를 둘러 볼 때 가이드를 맡았던 후배 목사가 저희들에게 주변의 한 소금 기둥을 보게 했습니다. 마치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소금 기둥이었는데 후배 왈 저것이 롯의 처라는 전설이 있는 소금 돌덩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시큰둥하게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관광청에서 만들어낸 다분히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소금덩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한 가지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왜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을까? 가장 많이 해석되는 것은 소돔에 두고 온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이 아까웠기 때문이라는 아주 통속적인 해석인데 정말로 그것 때문이었을까를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전통적인 해석의 시각으로 볼 때 가장 은혜로운 해석이기에 거기에 또 다른 사족을 붙이는 것이 은혜롭지 못한 일이 될까 두렵지만 저는 또 다른 해석을 하나 남기렵니다. 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까? 떠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에서 머물고 싶어 합니다. 이 말은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말로 직결됩니다. 내가 배웠던 언어, 내가 참여했던 문화, 내가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과 연대를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입니다.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거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참여에는 대단히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보수적으로 살고 싶어 하고 거기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익숙한 것에 대한 머묾과 안주함에서 떠나라고 경고한다는 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예배 시간에 읽었던 성경 텍스트 한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2-5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은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불편한 것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불편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히 대비를 통하여 바울이 양아들 디모데에게 독려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익숙해서 사랑하는 것들에서 돌아서라” 바울은 불편한 것에 돌아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너무 익숙한 것 그래서 그것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돌아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나에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불편한 일체의 것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불편하게 여겨지는 일체의 것들에서 떠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여러분을 육체적으로 익숙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혹시 여러분들을 안주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혹시 여러분의 정욕을 채워주는 것입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까?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매다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에게서 돌아서십시오.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타협의 여백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난 주에 김기석 목사께서 저에게 신간 하나를 보내주었습니다. 신간 제목은 ‘욕망의 페르소나’입니다. 제가 제 신간을 보내준 것에 대한 답물(答物)이었습니다. 받은 책을 읽다가 한 부분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밑줄을 그었습니다. “신앙이란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라는 말입니다.”(김기석, ‘욕망의 페르소나’, 예책, p,36,2019년)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이것도, 저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입니다. 반대로 ‘이것이나 저것이냐의 선택의 길에서 항상 묻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묻고 그 기뻐하는 것을 향해 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그 일에서 떠나는 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임을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기뻐하실 만한 일체의 것들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삶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삶이야말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고. 앞서서 브룩힐즈 교회의 부부를 소개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제이콥과 스테파니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삶을 이렇게 바꿔 놓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중략)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가 됩니다.”를 간증하고 선포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한 자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으로 만족한 미완성의 신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기쁨이 만족의 대상입니다. 몇 년 전에 아이든 토저가 쓴 ‘십자가에 못 박혀라’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 지금처럼 ‘재미’에 몰두한 적이 없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향해 전진하려면 재미를 제물로 드려야 한다. 기독교는 상점의 진열대에 놓인 상품이 아니기에 말이다.”(아이든 토저, 십자가에 못 박혀라, 규장, 2015년,p,195) 이 글은 아이든 토저가 20세기의 미국 교회를 대상으로 선포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면 1세기 전의 상황보다 더 악화된 한국교회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땅을 치는 애통함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느끼는 기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느끼는 기쁨을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큰 소리 뻥뻥 치면서도 우리는 혹시 전자에 목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일 리 없습니다. 당신은 헛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왜요? 주님은 그 자랑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인 누가복음 15장의 한 단락을 살피겠습니다. 28-32절을 봅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거지꼴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시비를 거는 큰아들과 아버지의 대화입니다. 큰 아들의 시각은 내가 기쁘지 않다는 스펙트럼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시각은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기억합시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기쁨에 천착하는 자임을. 내 기쁨에 만족하는 자는 전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뜻에 무관심한 자임을. 위대했던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천재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토대로 자신의 신앙을 반추한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생각할수록 내 안에 큰아들의 모습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p,113, 2016년) 깊은 영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준 헨리 나우웬도 자신의 자아에는 큰아들의 모습이 있다고 고백했다면 나는 두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토대로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기쁨을 찾는 자인가? 아니면 나의 기쁨을 찾는 자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바울이 1:10절에서 왜 그렇게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강력하게 이 말까지를 선언했는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사역자로 서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음을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종이 되겠다고. 오늘 주일 설교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도 십자가를 자랑하는 정도가 아닌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 삶을 살기 위해 주님의 기쁨을 추구하며 사는 백성이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나의 결단을 재확인하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을 읽으셨을 줄로 믿습니다. 금년은 제 둘째 처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말 그대로 20주기입니다. 금요일, 아내는 바리바리 짐을 싸서 서울로 향했습니다. 처갓집 식구들과 인천 강화에 있는 처남의 묘를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는 아내가 약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일 아침에도 매일반이었습니다. 서울로 자가 운전하여 혼자 가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알기에 남편의 권위로 포기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허나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너무 불편하고 화도 났지만 몇 번 큰소리를 치는 것을 상황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동생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였기에 그 사랑의 마음을 닫게 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하는 상대방이 무엇을 기뻐할까에 모든 마음을 빼앗깁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습니다. 더불어 그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합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자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불편해 할 만한 일체의 것에서 떠나십시다.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십시다. 바울은 먼저 그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