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8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9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5:13-15 제목 : 자유도 자유 나름이다. 서론) 몇 년 전에 차준희 교수와 그가 협동 목사로 있는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가 제천에서 여름휴가를 보내 조금은 여유롭게 친구들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두 친구와 저는 아주 친하게 지내는 관계이기에 신학적인 부분에서나, 목사로 살아가는 삶의 내용에서는 비슷할 것 같지만 같지 않은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다양성이 서로에게 견제가 되고, 자극도 되며, 나하고 다른 면이 있는 친구들의 생각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기도 하기에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 세 명이 저녁 시간에 담소하며 치밀하게 나눈 담론 중에 하나가 동성애 담론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차 교수는 동성애에 대하여 중립적인 사고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제자들 중에 동성애자들이 있고 또 그들은 직접 찾아와 자기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여러 차례의 상담을 했던 기억이 있다고 전하면서 이렇게 저희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후천적인 요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선천적인 요인을 갖고 태어나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나는 동성애를 반대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동성애라는 성향은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들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분이 아니다. 기독교가 앞에 나서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목숨 걸고 반대하는 모양새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 나아가야 하는 입장에 있는 기독교에 독이 되면 되었지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임채영 목사가 약간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반론을 폈습니다. 임 목사는 이 부분에 있어서 대단히 보수적인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 목사의 반론은 동성애는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성재자들은 본인의 동성애적인 기질은 질병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양한 동성애 치료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차 목사와는 다른 입장을 제시했습니다. 듣고 있던 저는 가재는 게 편이라고 임 목사의 입장에 조금은 더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저 역시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임 목사와는 접근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차 교수가 말한 내용 중에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을 구제 불능의 타락한 자로 못 박고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정죄하는 태도는 저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차 목사의 일 부분에 대해서도 동의하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동성애 이야기로 설교를 열었습니다. 분명히 할 것은 저 역시 동성애가 선천적인 인자로 갖게 된 성향이 아니라 후천적 취향으로 갖게 된 것이라는 학설에 동의하는 목사입니다. 그러기에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저는 정의합니다. 돌이켜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면 보수적인 교회가 말하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있고, 또 돌이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동성애를 들고 나온 이상 오늘 설교는 본문과 연관하여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구절은 단 3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5장 한 복판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의 이 역설은 상당히 중요한 바울 신학을 내포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백석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최갑종 교수는 오늘 본문을 내러티브 스토리 형식으로 목회와 신학 부록인 ‘그 말씀’에 기고했는데 설득력 읽어서 교우들에 권문 그대로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말씀, 1999년 1월호) 갈라디아 교인들 우리 이방인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까? 바울 사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유대적인 삶을 채택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노예화되고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까? 바울 사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율법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이렇게 풀어 설명한 최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참 탁월한 접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을 인위적인 그 무언가로 풀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 바울의 입장을 설명한 것은 참 명쾌한 설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최 교수의 설명을 제가 극찬했습니까? 자유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이제 자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앞에서 동성애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행복권에 대하여 누구든지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유에서든지 트집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율법에서 자유 함을 얻도록 하셨던 예수의 그 놀라운 행위를 전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그 자유 함을 박탈하고 율법적인 범위 안으로 다시 교리라는 것을 동원하여 옭아 매려하는 짓을 한다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진보적 성향의 신자들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재론하지만 동성애자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향 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에 이런 정도의 세밀한 공격을 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교회 공동체의 대다수는 이런 복음적인 이율배반을 자행하고 있는 기존의 보수적인 교회들의 행태에 대하여 맹공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 14-15절은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공격하기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렇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정죄하지 말고 품어야 하는 근거가 바로 오늘 본문과도 같은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성애자들을 단지 정죄함으로 단죄한다면 본문 14-15절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꼴이 된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동성애자들을 품고 보듬어 그들이 본인들이 택하였던 길이 성서적이지도 않고 생리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방종이 자유 함에 포함되는가? 의 제 문제입니다. 방종마저도 주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영적 자유 함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에 대하여 대답해야 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방종은 자유 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을 하나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8:32절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구절을 음미할 때, 우리들은 너무나 귀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보편타당한 세속적 가치나, 가치중립적인 어떤 지혜라고 착각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보편타당한 세속적 가치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가치중립적인 어떤 지혜는 그 의미를 소중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요한복음 8:32절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진리라고 우기면 그건 정말로 어불성설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선포에 담긴 진리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우리에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명한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이 이 땅에 임재하실 때 그에게 충만했던 속성은 진리였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가장 결정적인 주님의 선언을 보십시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에 철저히 의거하여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내야 합니다. 우리들을 자유롭게 한 주체는 주군이셨다는 결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방종을 허락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허용하시는 무조건적인 자유 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는 주님의 이런 자유하게 하심의 은혜를 기막힌 촌철살인으로 풀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죄로의 자유(Freedom to sin)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sin)다.”(BST 주석 갈라디아서 강해, P,175) 그렇습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죄에 대하여 방심하라고 너그러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하셨던 주님의 일격(一擊)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8:11절은 몇 번이고 가슴에 새기며 곱씹어야 하는 주님의 명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간음한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의 이 말씀의 핵심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 구절에서 여인에게 전하셨던 말씀의 압권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본문에 대한 해석을 담아 놓은 본인의 주석서에서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에 대하여 다음 3가지의 논리로 풀었는데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⓵ 그리스도인의 자유 함은 육체에 탐닉하는 자유가 아니다. ⓶ 그리스도인의 자유 함은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니다. ⓷ 그리스도인의 자유 함은 율법을 무시하는 자유가 아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는 교우들에게 오늘 주시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싶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 함은 결코 방종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이제 왜 제가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그들을 품어야 하지만 그들이 포기하지 않으려는 동성애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자유 함이 아니라 방종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는 자유를 빙자한 방종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런 자유 함을 빙자한 방종이 어찌 동성애뿐이겠습니까?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유 함을 빙자한 방종의 사례가 있습니다. 예배를 무시하는 행태입니다. 소위 말하는 가나안 신자들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왜 가나안 신자가 되었는지 많은 조사에서 대변해 줍니다. 교회에서의 상처입니다. 담임목사에게서의 상처, 교우들로 인한 상처, 교계 전체에 대한 실망 등등이 그 원인으로 파악됩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을 품는 인내심이 교회 공동체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그 반대의 경우들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하고 싶은 이유, 어떤 조직이나 누군가에게 얽매이기 싫은 이기심, 내 삶에 대하여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아집 등등으로 교회를 떠나는 신자들도 허다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나안 신자와 맞물려 포장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처를 빗댄 방종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자신의 불신앙을 덮기 위해 무력화시키는 방종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지체 중에 제천 Y-CBMC에서 활동하는 집사님과 교제를 하다가 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목사님, 실은 제가 활동하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형제들 중에 상당수가 교회에서 예배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말씀에 대한 기갈로 몹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무슨 말인지에 대하여 십분 이해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기갈로 갈급한 영혼이 얼마나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 나름 이해합니다. 지체의 아픔은 진실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듣는 순간, 괜히 설교하는 저 역시 공범자가 된 듯해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부여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교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에 대한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말씀보다 위에 앉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만함이 그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를 자신의 불신앙으로 거부하는 방종입니다. 물질관에 방종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7-9절을 읽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번역은 개역개정판 번역입니다. 허나 저는 이 구절 중에 7절은 전에 보던 개역판 번역이 훨씬 의미 있게 번역했다고 생각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개역판으로 읽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이 구절에서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규모 없이 행하지 말라’입니다. 물질은 하나님께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질의 몫은 청지기로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주십니다. 그러기에 주어진 물질을 자족하기를 배우고 그 물질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만에 하나, 나에게 주어진 물질에 맞지 않게 사용한다면 데살로니가전서 3:7절에 있는 말씀처럼 규모 없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자유 함을 빙자한 물질에 대한 방종입니다. 이왕 본문을 소개했으니 한 가지 예를 더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11절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 중에는 머리가 비상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빙자하여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남들은 최선을 다해 일하는데 이들은 게을러 일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키기 싫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곧 오실 텐데 일해 무엇 하나?” 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해 철퇴를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을 위한 기도는 이래야 합니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이번에는 반드시 SKY에 진입하게 하옵소서” 게으름을 빙자한 방종입니다. 결론) 이제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유를 빙자한 방종에 빠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바울은 분명히 본문에서 제시합니다. 다시 본문 14-15절을 읽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저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다음 주에 한 번 더 나누려고 합니다. 사랑하기에 대한 바울의 역설은 한 주간만 더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방종하지 맙시다. 특별히 저와 여러분 같은 그리스도인이 속아 넘어지기 쉬운 것이 바로 방종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일갈을 다시 곱씹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죄로의 자유(Freedom to sin)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sin)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에 탐닉하는 방종이라는 자유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착취함으로 얻는 방종이라는 자유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무시함으로 인해 막 사는 랜덤이라는 방종에 빠지지 않습니다. 아멘 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