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해 아래2024-02-27 10:59
작성자 Level 10

2019년 6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해 아래

본문전도서 1:12-18

 

서론)

 

전도서 1:1절을 읽어 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 문장을 근거로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이라고 규정하는데 동의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혜서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목회자라면 서슴없이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말하고 다윗의 아들이라는 문구는 꼭 솔로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조에 속해 있었던 모든 이들은 본인들을 이렇게 호칭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전도 12장에 걸쳐 그 어느 한 구절도 솔로몬이라는 것을 예상하게 하는 구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많은 학자들과 지성적 목회자들이 솔로몬을 전도서의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전도서 1:12절을 소개합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솔로몬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이 구절에서 소개한 동사의 시제를 원어성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성서적입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며 이 구절은 솔로몬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자료로 역전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죽기 전 그의 말년까지 단 한 번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일까?

주일 낮 예배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 저자 문제를 소상히 말씀드리기는 불가능 합니다.

다만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아마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지혜를 추구하는 지성적인 그 어떤 높은 관직을 경험했던 사람 정도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지성적인 히브리인이라면 아마도 경제적으로나사회적으로나정치적으로 지명도가 꽤나 높은 위치에 있었던 자 정도로 추측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전도서의 저작 시기를 포로기 이후 시기의 말엽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전 200년경으로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경제적으로사회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의 신분이라면 여하튼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던 그 누구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가 본문에서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중요한 소회를 내 비치고 있는데 이 내용들은 거의 전도서 전체의 교훈이기도 하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무엇을 전도서를 통해 말하고자 했습니까?

 

본론)

 

1) 해 아래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본문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다시 각인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대단히 시적인 표현인데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상상만으로 교만한 표현입니다.

잡을 수 없습니다.

누가 바람을 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은 해 아래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모든 것들이 찰나적이고 한시적이기에 붙들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전도서의 저자가 이 언급을 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삶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막말로 말해 될 되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인생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사회적인 명망도 있고경제적인 부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지성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허무적인 언사들을 남발하겠느냐를 생각해본다면 저와 여러분도 한 번 즈음은 저자의 이 도전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히 저자는 본문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쓸 만한 내용은 많지 않았다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만만하게 만들어 놓지 않으셨다내가 모든 것을 살펴보니 다 연기에 불과했다연기요허공에 침 뱉기였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전도서 1:14)

어디 이뿐입니까?

오늘 본문의 전 단락인 전도서 1:4-9절을 읽어 보십시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저자가 무엇이라고 진단했습니까?

한 세대는 가고 온다고 했습니다.

해는 떴다가 진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분다고도 했습니다.

강물은 바다로 흐르지만 채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이상의 말을 듣고 있자니 굉장히 허무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핵심을 놓치며 안 됩니다.

전도서 저자의 진단은 허무주의를 부추기는 발언이 아닙니다.

전도서 저자는 정말로 해 아래에서의 일체의 일들이 한시적이요찰나적이요아침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는 절감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발언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던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수아 5: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만나가 무엇입니까?

도무지 광야에서 얻을 수 없었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의 대용물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후에는 또 다시 하찮은 것이라고 불만을 쏟아내지만 분명한 것은 이 양식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수 있었던 최상의 식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리신 이 만나의 유통 기한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라는 한시적인 시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던 만나도 영원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중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해서 전도자는 말합니다.

해 아래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했듯이 서재에 있는 음향 기기들 중에 여러 가지의 부품을 지난 주간 교체했습니다.

아내가 시집을 올 때에 가지고 온 혼수 가전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을 본 기사가 저에게 이렇게 농을 던지며 말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가전제품 수리 및 장사를 하고 있지만 목사님처럼 전자제품을 30년 동안 쓴 사람은 정말로 처음입니다헌데 오늘 교체하는 부품들의 소프트웨어는 길어야 3-5년입니다. 30년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얼마 전에 동기 목사들과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행하는 대화는 모두가 건강에 대한 담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건강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맺은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⓵ 60년을 썼는데 고장이 날 때가 되었다.

⓶ 고치면서 쓰다가 더 이상 고쳐 쓰지 못하는 때가 되면 폐기처분하자.

씁쓸하지만 정답입니다.

해 아래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 인생을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90:3-6절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어디 시인뿐이겠습니까?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4:14절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간사는 영원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기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해 아래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지식과 지혜도 붙들 대상이 아니라고 진단합니다.

 

본문 16-18절을 읽습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도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다고 표현한 정도로 정치적인 상층부에 있었던 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더불어 이 전도서의 저작 연도를 저는 포로기 이후 말엽이라고 전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저자는 분명히 솔로몬의 영화와 그가 갖고 있었던 지혜에 대한 구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 이전에 위대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를 전수해 들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정치적인 욕망과 그의 업적은 물론솔로몬이 갖고 있었던 부귀와 명예와 지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글을 썼던 저자도 스스로를 전도자이자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지혜를 갖고 있는 자라고 자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17절은 분명히 전합니다.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그래서 저자는 18절에서 말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자는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라는 것을.

잠언 1:7절을 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기에서 쓰인 지식’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다아트의 원래의 뜻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파생되는 지식지혜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되지 않는 모든 것은 지식일 수 없고 지혜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잠언전도서시편과도 같은 지혜문학에서 쓰인 지혜라는 단어 호크마도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통치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는 지혜를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조금 더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지혜’, ‘지식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때만 사용되던 단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전도서의 저자는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해 아래에서 주어진 지식지혜가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은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1-4절을 소개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지식의 총체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전부였던 주님이 제시하셨던 표적은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의 표적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하는 지식과 지혜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공부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지혜에 대하여 이렇게 갈파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1:22-24절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 그것이 진짜 붙들 지혜요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일전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 동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횟수가 35만 번 정도다하나님 앞에 서서 내 삶의 흔적을 뒤돌아볼 때 텔레비전 리모컨 컨트롤을 350,000번 돌리다 옴이라고 보고할 때 얼마나 치욕적인 보고가 될 것인가를 기억하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전교인 수련회 기간 동안 보았던 영화 이 주인공이었던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짐 엘리엇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어차피 놓아 버릴 수밖에 없는 것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그러나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그 영원한 것을 찾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것 이것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의 삶이 아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붙들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승진입니까?

향락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이런 것들을 붙들고 산다면 우리는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해 아래에는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붙들고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지식과 지혜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을 모르던 세월 방황하던 내 영혼

아름다운 목자 음성을 거역하며 살았네

달콤한 유혹과 즐거움 나를 썩게 하여도

사망의 그늘이 지는 줄 생각지도 못 했네

 

그림자 같은 나날을 욕심으로 채우고

항상 나 하나만 위하여 쓸모없이 지냈네

분토만도 못한 소욕이 어찌 그리 중했나

오주여 용서 해 주소서 머리 조아립니다

 

부드런 주님의 손길 나를 어루만질 때

육신으로 살던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져

더러웠던 나의 옛사람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새 옷을 입었네 주여 나를 보소서

 

시간과 물질과 노력 나의생명까지도

주님께만 바치렵니다 나를 받아주소서

좁은 이 길 모두 걸은 후 주님다시 뵈올 때

영광의 면류관 쓰고서 영원토록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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